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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은 신의 선물?!

아스피린, 미녹시딜의 재탄생 스토리

영화 ‘맨 인 블랙’에서 주인공이 단번에 기억을 지워버리는 기계를 사용하듯,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배우자의 죽음 같이 나쁜 기억만 골라 지울 수 있는 ‘꿈의 신약’이 개발됐다고 최근 보도됐다. 그런데 이 약은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약이 아니다.

원래 고혈압 치료제로 널리 쓰이던 프로프라놀롤은 무대공포증으로 남 앞에 서면 극도로 긴장하는 사람이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에게 처방되곤 했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기능이 커지면 기억을 잊는 효과도 생긴다. 이것이 기억을 지우는 약의 탄생 스토리다.

고혈압 치료제와 나쁜 기억을 지우는 약.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약을 개발한 캐나다 맥길대 약학과 연구팀은 “프로프라놀롤은 고혈압치료제로 인기가 높았지만 몸과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부작용이 있었다”며 “부작용이 연간매출 1조원 이상을 올리는 블록버스터의 행운을 줬다”고 소감을 밝혔다. 약 개발자들은 흔히 우스갯소리로 블록버스터 약은 신의 도움 없이는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신약 개발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부작용도 신의 선물일 수 있을까.

약을 처방한 사람이 의도하는 약물의 효과를 ‘주작용’이라 하고, 원치 않았지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반응을 부작용(副作用, side effect)이라 한다. 한자어로 부가적이란 뜻의 ‘副’와 부수적인 작용이란 뜻의 영어 ‘side effect’에서도 볼 수 있듯 부작용을 모두 ‘나쁜’ 작용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다만 이 가운데 약 복용량을 높였을 때 인체에 해가 되는 반응이 생기는 것을 유해부작용이라고 한다.

이로운 부작용도 충분히 많다. 그리고 이로운 부작용은 약물의 활용 범위를 넓히는 데 유용하다.신약을 개발해 판매승인을 받기까지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신약개발 비용이 10억 달러(약 9200억 원)를 넘어섰다는 보고서도 나왔다. 또 쥐나 토끼 같은 동물뿐 아니라 인간에게 시험해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최소 10년 이상이 걸린다.


‘원 소스’ ‘멀티 유즈’

이 때문에 제약회사는 돈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 시장에 나와 있는 약에서 새로운 약효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일종의 ‘재활용’이자 ‘원 소스’로 ‘멀티 유즈’를 하는 셈이다. 이를 ‘임상 4상’이라고 하는데, 약의 부가적인 작용(부작용)을 검토해 다른 적응증(질병)에도 약효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이다. 다른 적응증(질병)에도 효과가 있으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약을 새로 개발할 필요 없이 저렴한 값으로 시장을 늘릴 수 있다. 1899년 독일 바이엘사가 해열 진통제로 내놓은 아스피린이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심근경색, 뇌졸중, 대장암 예방 등 다양한 치료제로 쓰이는 것도 임상 4상의 결과다.

임상 4상 중 뜻밖의 발견으로 탄생한 약물이 많다. 약학자들은 이를 ‘세렌디피티’라고 부른다. 예기치 못한 행운과 마주친다는 의미다. 최근 바르는 탈모 치료제로 각광받고 있는 ‘미녹시딜’이 대표적 예다.

미녹시딜은 원래 탈모와 관련이 없는 고혈압 치료제였다. 당시 ‘로니텐’으로 불렸던 이 약은 혈관을 넓히는 효과가 있어 중증 고혈압 환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1980년대 초, 로니텐을 복용한 일부 환자들의 팔, 다리, 얼굴에서 털이 나는 현상이 발견됐다. 고혈압을 고치려 약을 먹었는데 온 몸에 털이 나자 미녹시딜의 인기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미국계 제약회사인 업죤은 부작용 때문에 외면을 받았던 약물에서 새로운 ‘금맥’을 찾았다. 미녹시딜에서 발모제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리고 농도가 5%인 미녹시딜 용액을 발랐을 때 두피에서 머리카락이 가장 잘 자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피에 흡수된 미녹시딜이 몸속 효소와 만나 활성화되면 머리 피부의 혈관이 확장된다. 혈액의 흐름도 원활해지고 혈류의 양도 늘어나 영양분이 두피에 원활히 공급된다. 이 때문에 탈모가 줄어들고 발모가 촉진된다.

미녹시딜의 거추장스러운 부작용이 새롭게 탈바꿈한 셈이다. 지금까지 미녹시딜은 FDA의 검정을 통과한 유일한 국소용 발모제다.
 

두피에 영양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탈모가 진행된다. 고혈압제로 쓰이던 미녹시딜 5% 용액을 두피에 바르면 영양공급이 원활해져 탈모가 치료된다.


‘기형아’ 파동 딛고 다시 우뚝 선 탈리도마이드

우연히 관찰된 부작용을 활용해 신약을 개발한 사례와는 달리, 기형아를 유발하는 위험한 약임에도 불구하고 그 부작용을 적극 활용해 신약으로 발굴한 사례도 있다. 탈리도마이드가 그 주인공이다.

1957년부터 1962년 사이에 팔과 다리가 없거나 뇌가 손상된 기형아가 약 1만 명 태어났다. 산모가 수면제인 탈리도마이드를 몇 알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일상적으로 복용할 수 있는 약이 무서운 결과로 나타나자 1962년 미국 의회는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탈리도마이드를 임산부가 절대 복용할 수 없도록 미국에서 판매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파동이 가라앉고 2년이 지난 1964년 어느 날, 이스라엘 히브르대 하닷사 병원 내과 제이콥 세스킨 교수는 잠을 못 이루는 한센병 환자에게 탈리도마이드 2알을 건네줬다. 탈리도마이드가 수면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현상이 발견됐다.

약물을 복용한 환자가 잠을 편안히 잔 것은 물론 그의 피부 염증까지 호전됐다. 한참 뒤인 1993년 미국 록펠러대 세포 생리학·면역학 실험실 길라 카플란 교수팀은 탈리도마이드가 염증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 면역학 분야의 세계 권위지인 ‘실험의학’ 저널에 발표했다. 탈리도마이드는 염증의 원인인 ‘종양 괴사인자-α’(tumor necrosis factor-α)의 작용을 억제했다.

탈리도마이드의 새로운 기능이 속속 밝혀지면서 탈리도마이드의 새로운 효능에도 신뢰가 생겼다. 결국 1998년 FDA는 탈리도마이드를 한센병 염증 치료에 사용하도록 허가했다. 이어 2006년에는 골수에 암이 생기는 질병인 ‘다발 골수성’ 환자에게 염증 치료제인 덱사메타손과 함께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탈리도마이드 사용을 허가했다. 미국 제약회사인 셀진은 탈리도마이드 성분이 함유된 ‘탈로미드’란 이름으로 신약을 출시했다. 희대의 기형아 파동의 원인이었던 탈리도마이드가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FDA는 탈리도마이드 사용을 허가하며 엄격한 제한규정을 뒀다. ‘탈리도마이드에 대한 교육과 안전한 처방을 위한 시스템’(STEPS)이란 특별한 프로그램에 등록된 처방의사나 약사만이 탈리도마이드를 조제할 수 있다. 그리고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 환자는 단 한 알의 탈리도마이드만으로도 기형아를 낳을 수 있으므로 탈리도마이드를 절대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하는 남성은 정액에 탈리도마이드 성분이 있으므로 임신할 가능성이 있는 여성과 성교를 할 경우 반드시 라텍스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

부작용의 부는 ‘不’가 아니라 ‘副’다. 쉽게 말해 부작용이 있는 약과 독성이 있는 약은 다르다. 부작용이 생명을 앗아갈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지만, 부작용이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한 몫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약의 양면성에서 의약품의 부작용을 바라보자.
 

비아그라는 원래 동맥을 팽창시켜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심장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약물이었다. 그런데 혈관 확장기능이 심장보다 남성 성기에서 더 큰 작용을 했다. 심장병 치료제가 발기부전 치료제로 탄생한 배경이다.

불면증이 있던 산모가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하면, 태아의 팔과 다리가 자라지 못한다. 이들을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라고 부른다.


*임상 4상
임상 1상은 소수의 환자(약 20~30명)를 대상으로 약의 효능을 시험하는 것이다. 환자 수를 좀 더 늘리면(약 200명) 임상 2상, 마지막으로 대규모 환자 집단(약 1000명)을 대상으로 부작용을 세세히 테스트하는 과정이 임상 3상이다. 임상 4상은 약물을 시판한 뒤에 약물복용 환자를 대상으로 새로운 약효(부작용)를 찾는 시험을 일컫는다.

2007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창호 교수
  • 김상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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