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어느날 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려던 참이었다. … 마치 바닷속에 있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느낌을 받았다. 곧바로 무시무시한 정적이 엄습했다.”
1912년 초호화여객선 타이타닉이 북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하던 순간을 미국인 여성 생존자가 생생하게 기록한 내용이다. 지난 5월말 파리의 한 박물관에서 공개된 이 글은 영화 ‘타이타닉’의 감독 제임스 캐머런에 영감을 줘 실감 나는 여자 주인공을 탄생시켰다.
최근 지구온난화가 가속되면서 빙산의 수가 늘고 있다. 특히 2002년 초 남극 북서쪽 웨델해 라센B 빙붕(3250km2, 서울 면적의 5.4배)이 갈라지면서 서쪽 반도에서 떨어져 나온 수천개의 빙산이 해안을 표류하고 있다. 크기도 수m에서 수백km까지 다양하다. 서남극의 빙상이 이런 식으로 붕괴되기만 해도 세계 해수면이 5m 가량 상승한다는 예측도 있다. 빙상이 몰고 올 재앙은 타이타닉 참사를 훨씬 능가할 것이다.
지난 6월 22일자 온라인저널 ‘사이언스 익스프레스’에는 미국 몬테레이만 아쿠아리움연구소 케니스 스미스 박사팀이 남극 웨델해 빙산 2개를 추적한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 결과 놀랍게도 바다를 표류하는 빙산 주변에는 다양한 해양생물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빙산이 재앙의 그림자가 아니라 생명의 안식처란 말인가. 또 지구온난화의 결과로 증가한 빙산은 오히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작용을 한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빙산에 다가가 조사하는 일은 위험한 도전이다. 먼저 스미스 박사팀은 남극 웨델해 1만1000km2를 찍은 위성사진에서 빙산 1000개가량을 찾아냈다. 연구팀은 이 중에서 판자 모양의 빙산 2개를 선택했다. 하나는 길이 2km에 폭 0.5km의 빙산 W-86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 21km에 폭 5km의 빙산 A-52이다. 높이 41m의 W-86은 300m 깊이까지, 높이 25~32m의 A-52는 230m 깊이까지 각각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다음은 현장 조사. 연구팀은 남극조사선 ‘로렌스 굴드’를 타고 남극대륙 서쪽에 있는 웨델해로 들어갔다. 2005년 12월 드디어 바닷물에 둥둥 떠다니던 두 빙산을 추적하며 그 주변 환경을 면밀하게 살펴봤다. 빙산에서 거대한 조각이 떨어지거나 빙산이 예고 없이 뒤집어질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빙산에 20m 이내로 가까이 접근했다. 3일에서 6일까지 A-52를, 7일에서 15일까지 W-86을 각각 쫓아다니며 조사했고, 16일에서 21일까지 A-52를 재조사했다. 조사 기간 동안 A-52는 총 531km의 거리를, W-86은 130km를 떠다녔다.
실제 조사에는 비디오카메라를 장착한 무인잠수정(ROV)과 저인망(바닥 끌그물)을 이용했다. 빙산으로부터 반지름 9km 이내에서 바닷물 표본을 수집해 해양생물의 종류와 분포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빙산에서부터 3.7km 근처까지는 식물플랑크톤, 크릴새우(남극새우), 어류, 바닷새가 풍성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식물플랑크톤의 먹이 미네랄 풍부해
빙산 주변에서 어떻게 이런 해양생물이 살 수 있을까. 연구팀은 빙산에서 녹아내리는 물에 주목했다. 빙산에는 남극대륙에 있던 육지 광물질(미네랄)이 많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빙산에서 철 같은 미네랄이 풍부한 물이 주변 바다로 퍼져나갈 수 있다. 이는 마치 육지 광물질이 바다로 흘러가는 강어귀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비슷하다.
연구팀에 따르면 녹은 얼음에서 흘러나온 미네랄은 식물플랑크톤의 먹이가 된다. 크기가 20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 이상인 식물플랑크톤은 대부분 돌말(규조)류로 밝혀졌다. 연구팀의 조사결과 돌말류는 빙산 근처 바다에서 깊이 8~60m에 서식했다.
무인잠수정과 비디오카메라는 빙산 근처 바닷속을 조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구팀은 빙산에 뚫린 바닷속 동굴도 탐험하고 비디오카메라로 수중생물도 촬영했다. 비디오에는 어린 남극빙어, 화살벌레, 빗해파리, 관해파리, 크릴새우가 잡혔다.
투명 물고기, 바다 위 걷는 새
남극빙어는 아가미를 비롯한 몸체의 얇은 부분이 투명한, 남극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특이한 물고기다. 척추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혈액 속에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이 없기 때문이다. 피의 색깔도 약간 노란색을 띨 뿐 투명하다. 헤모글로빈이 없는 대신 혈액의 점도가 낮고 혈관도 굵어 적은 에너지로도 혈액을 순환시킬 수 있다. 그래서 생체조직과 혈액 사이에 산소 교환이 원활하다. 이는 저온에서 생활하기에 적합하도록 적응한 남극빙어만의 생존전략인 셈이다.
바닷새는 빙산에서부터 0.9km 이내에 많이 서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알락풀마갈매기(Cape Petrel)가 가장 많고 은풀마갈매기(Antarctic Fulmar), 윌슨바다제비(Wilson’s Storm Petrel) 순으로 많이 발견됐다.
풀마갈매기는 겉보기에 갈매기처럼 보이지만 갈매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사실 바다제비(petrel)의 친척이다. 바다제비의 이름은 성 베드로(St. Peter)처럼 바다 위를 걷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유래했다.
플랑크톤에서 바닷새까지 둥지를 틀고 있는 빙산은 움직이는 바다생태계 보고(寶庫)인 셈이다. 빙산에 해양생물이 많이 산다는 사실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바로 빙산이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빙산 근처에 사는 식물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하기 위해 물에 있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데, 바다는 이산화탄소가 줄어든 만큼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할 수 있다. 또 크릴새우는 식물플랑크톤을 먹어치운 뒤 탄소가 포함된 배설물을 내놓는다. 결국 배설물이 해저에 가라앉을 때 탄소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는 말이다.
스미스 박사팀은 2개의 빙산에 대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표류하는 빙산이 웨델해역의 약 40%에서 해양생물의 안식처를 제공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웨델해역 빙산의 90%가 이번 조사대상보다 더 작아 앞으로 작은 빙산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빙산이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효과가 어느 정도로 밝혀질지 앞으로의 연구를 지켜볼 일이다.
*빙상·빙붕
빙상(氷床·ice sheet)은 대륙을 덮고 있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 빙붕(氷棚·ice shelf)은 빙상에서 바다 위로 뻗어 나온 부분. 빙붕이 붕괴되면서 크고 작은 빙산(氷山·iceberg)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