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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과 유기물 중매해 손톱만한 슈퍼컴퓨터 꿈꾼다

이종성장 제어 연구단


실리콘과 유기물 중매해 손톱만한 슈퍼컴퓨터 꿈꾼다


21세기 인류는 ‘석기시대’를 살고 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분명 석기·청동기·철기시대를 거쳐 다시 ‘새로운’ 석기시대에 접어들었다. 현대인의 필수품인 컴퓨터와 휴대전화에서 고속철도와 우주왕복선에 이르기까지 모두 반도체칩이 쓰인다. 반도체칩은 실리콘(Si)으로 만드는데, 실리콘은 모래의 주성분인 석영(${SiO}_{2}$)에서 얻는다. 모래는 돌이 부서진 것이므로 현대인은 돌을 갈아 쓰고 있는 셈이다.

1946년 세계 최초로 개발된 컴퓨터 에니악은 1만8800개의 진공관과 7000개의 저항기를 사용 했다. 무게는 30톤에 이르렀고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실 면적의 두배 가량(138.8${m}^{2}$)을 차지했다. 하지만 진공관을 대체한 트랜지스터가 개발되면서 손톱만한 칩 하나에 DVD 영화 10편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정보소자의 집적도가 높아졌다. 어디서나 가져다 쓸 수 있는 값싸고 흔한 물질이면서 가공하기에 따라 엄청난 정보량을 집적할 수 있는 재료인 실리콘 덕분이다.

수십년 전부터 과학자들은 무기물질인 실리콘에 유기물질을 결합해 손톱만한 크기의 슈퍼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반도체 소자를 구현하려고 노력중이다. 그러나 두 물질이 화학적으로 어떻게 결합하는지 모른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이에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구자용 박사가 이끄는 이종성장제어연구단은 실리콘 위에 탄소나 질소, 인, 브롬 같은 유기물질을 원자 수준에서 제어하기 위한 연구에 나섰다.
 

연구단에서 제작한 주사터널링현미경. 겉모습은 엉성해 보이지만 실리콘 표면에 탄소가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대한 해묵은 난제를 해결한 일등공신이다.


정보혁명의 원동력, 유기물질에서 찾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인텔, 도시바 같은 반도체업계는 트랜지스터끼리 연결하는 선과 선 사이의 폭을 더 좁게 만들어 집적도를 높이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화선지에 굵은 붓보다 가는붓으로 글씨를 쓸 때 더 많은 글자를 쓸 수 있는 원리와 같다.

그런데 실리콘으로 반도체의 저장용량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얼마 전까지‘반도체의 집 적도가 18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을 제치고‘반도체의 집적도는 1년에 2배씩 증가한다’는 황의 법칙이 유행했다.

그러나 반도체 회로의 선폭이 50nm(나노미터, 1nm=10억분의 1m) 이하로 작아지면 원자의 크기보다 반도체 표면의막두께가 얇아지면서 전류가 줄줄 새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무어의 법칙이나 황의 법칙으로도 집적도를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연구단을 이끄는 구 박사가“지난 50년은 정보혁명의 원동력을 실리콘에서 찾았다면 앞으로 50년은 유기물질에서 찾겠다”고 나선 이유다.

구 박사는“실리콘 같은 무기물질보다 훨씬더 작은 크기에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유기물질이 새로운 대안”이라고 말했다.실제로 반도체업계는 전기적인 성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실리콘에 유기 물질을 첨가하면 반도체의 두께를 줄일 수 있다는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리콘과 유기물질이 어떻게 화학적으로 결합하는지 알지 못해 반도체 성능 개선에‘큰 벽’을 느껴왔다.

연구팀은 실리콘 위에 탄소를 주입하면 규칙적인 원자구조를 갖지 못한다는 선입견이 원인 규명에 장애가 됐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탄소를 골고루 주입하면 규칙적인 원자구조를 가질 것이란 가정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고체 상태의 흑연을 가열해 실리콘에 스며들게 했지만 연구팀은 기체 형태의 탄소를 실리콘 위에 뿌린 뒤 기판을 가열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가장 간단한 불포화 탄화수소인 아세틸렌(${C}_{2}$${H}_{2}$)을 실리콘 위에 흡착시키자 표면에고루 퍼졌고, 600~700℃의 고온으로 가열하자 상당량의 탄소가 실리콘에 침투했다.

다음으로 구 박사는 실리콘에 침투하는 탄소 개수를 원자 수준에서 측정하면 실리콘에 접합하는 불순물의 원자구조를 규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도체나 반도체의 재료를 원자수준까지 관찰할 수 있는 고해상도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이 동원됐다. 그 뒤 구 박사는 하루 6시간씩, 때론 10시간 이상을 STM으로 실리콘 표면을 세심히 관찰했다.

20년 넘은 난제에 마침표 찍다

놀랍게도 STM으로 관찰한 원자배열은 이전의 연구결과와 사뭇 달랐다. 마침내 연구단은 실리콘 원자층에 있는 탄소 원자의 수를 정확히 측정하는데 성공했다. 탄소 원자의 양이 5% 이하인 수준에선 1차원의 나노선 형태로, 탄소 원자가 많아져 12.5%에 이르면 넓은 범위에 걸쳐 규칙적으로 배열로해 실리콘 표면에서 0.4nm 깊이의 단일한 원자층을 이뤘다.

연구단은 이 결과를 지난 2001년 물리학 분야의 권위지인‘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발표해 20년 넘게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던 난제에 마침표를 찍었다. 해외 과학자들도 STM을 사용해 원자의 배열을 관찰했지만 구 박사가 손수 제작한 STM의성능에는 미치지 못했다.

특히 구 박사는“다른 연구자들이 200장의 사진에서 5장을 고를 때, 1000장의 사진에서 쓸 만한 사진 5장을 고르는‘우둔함’이 만든 결과”라며“실리콘 표면의 물성을잘이해하고 있던 것도 큰 자산”이라고 밝혔다.

지난 1999년부터 이종성장제어연구단은‘피직스리뷰레터스’에4편,‘ 피직스리뷰B’에 4편을 포함해 모두 23편의 수준급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또 실리콘 분야에서 50년 넘게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질소와 산소, 브롬, 인의 흡착 문제에 대해서도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무기물질인 실리콘과 탄소, 질소, 인 같은 유기물질을 원자수준에서 정확히 측정하고 제어하게된 연구단은 이미 수십년 먼저 연구를 시작한 미국의 IBM,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 일본의 이화학연구소를 제치고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실험할 때마다 하나의‘작품’을 탄생시키는 고통을 겪는다는 구 박사는 이제 영원히 남을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구 박사의 꿈대로 유기물질이‘석기’를 대체할 날, 손톱만한 슈퍼컴퓨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실리콘에 침투시킨 유기분자의 위치측정

초진공 상태의 챔버에 실리콘과 유기분자를 넣는다(01). 유기분자는 챔버의 온도가 600~700℃로 올라가면 녹아서 실리콘 내부로 침투한다(02). 실리콘 내부로 침투한 유기물질을 주사터널링현미경으로 원자 수준에서 정확한 위치를 측정한다(03).
 

실리콘에 침투시킨 유기분자의 위치측정
 

실리콘에 유기물질을 결합하면 반도체의 두께를 줄일 수 있다. 이제까지는 경험적인 방법으로 유기물질의 양을 조절했다. 연구팀은 STM을 이용해 실리콘에 결합한 유기물질의 구조와 위치를 명확히 파악했다. 이로부터 반도체 공정의 생산단가를 크게 낮췄다.

든든한 후원자, 주사터널링현미경
구자용 박사

 

구자용 박사


고향인 경북 선산을 떠나 도시에 살게 된지 올해로 34년째인 구자용 박사는 아직도 스스로를 ‘촌놈’이라고 부른다. 학창시절, 선생님이 내준 시험범위에 관계없이 처음부터 배운 곳까지 공부했던 우직함이 여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 박사의 원래 전공은 반도체가 아닌 강유전체와 레이저다. ‘생뚱맞은’ 실리콘과의 만남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연구자는 자신이 인연을 맺고 있는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죠. 이미 터를 닦은 곳에서 계속 연구할 때 성공의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로 건너가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실제로 다른 과학자들은 20년 넘게 연구하고도 실리콘에 결착하는 탄소의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반면 새로운 분야로 뛰어든 구 박사는 0.01nm 크기까지 관찰할 수 있는 고해상도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을 손수 만들며 부단히 노력했다. 구 박사에게는 STM에 얽힌 ‘새옹지마’와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몸 담은지 3년째 되던 해에 구 박사가 처음 맡게 된 일은 수입품보다 해상도가 훨씬 좋은 STM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당시 연구원에서는 STM을 모두 수입해 쓰고 있었는데, 때마침 과학기술부에서 실험 장비를 국산화하는데 연구비를 지원했다.

“남들이 짧은 기간에 논문을 많이 써내는 연구를 하고 있을 때, 논문 한편 쓸까 말까 하던 일을 했죠.” 이 때문에 구 박사는 2년간 아무런 실적을 내지 못했다. “이때 원장님께서 저를 불러 다른 부서로 옮겨준다고 하셨지만,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기계도 손으로 어루만지면 인간과 교감이 이뤄지는 것일까. 구 박사의 손때가 묻은 STM은 지금 그가 하는 연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있다. 구 박사는 “10~20년 뒤 우리의 연구가 새로운 반도체를 만드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종성장제어연구단 구성원.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단장인 구자용 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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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서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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