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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이론의 꿈

표준모형 탄생 40년, 스티븐 와인버그를 만나다


와인버그 교수


제2차 세계대전 뒤 기초과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중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인 1967년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에 발표된 3쪽짜리 논문이다.

‘경입자 모형’(A Model of Leptons)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논문은 지금까지 약 6300회 인용됐으며,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Standard Model)을 처음으로 제시한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논문의 저자인 스티븐 와인버그 교수는 현존하는 최고의 물리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기념비적인 논문과 저작들을 써왔으며 그가 구축한 표준모형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이론적 틀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는 이 논문으로 197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와인버그 교수가 1993년 발표한 책‘최종이론의 꿈’ 표지.


1993년 출간된 그의 논쟁작 ‘최종이론의 꿈’(Dreams of a final theory)을 번역한 일이 계기가 돼 필자는 지난 5월 31일 와인버그 교수를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최종이론의 꿈’은 그 제목이 말해주듯 물리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종착지에 대한 담대하고도 도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유명해진 데에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와인버그 교수는 1980년대 중반 초전도 초대형 충돌기(SSC, 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라는 가속기 건설계획을 주도했다. 약 8조원으로 추정되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만큼 이 계획은 미국 안팎으로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SSC 계획을 대중적으로 설파하기 위해 쓰였지만 그 이면에는 거대과학(big science)에 대한 인식의 차이,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대한 논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과학사적인 논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40년 전 발표된‘경입자 모형’이라는 제목의 논문은 표준모형을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LHC, 힉스입자 발견할까?


양성자 충돌 직후 힉스입자가 4개의 뮤온입자로 붕괴되는 현상을 시뮬레이션했다. 힉스입자가 존재하는 시간이 너무 짧아 직접 보긴 어렵지만 뮤온입자를 검출하면 힉스입자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SSC 계획은 이 책이 출간된 직후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미 의회에서 완전히 폐기됐다. 하지만 이 역할을 대신할 사상 최대의 가속기가 내년 5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가동될 예정이다. 와인버그 교수에게 던진 첫 질문은 대형강입자충돌기(LHC, Large Hadron Collider)로 불리는 이 신형 가속기에 대한 소회였다.

“매우 기쁘다”며 운을 뗀 그는 LHC에서 우리가 무엇을 관측하게 될 것인지 간략하게 언급했다. 그가 구축한 표준모형에는 힉스(Higgs)입자로 알려진,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핵심적인 구성요소가 하나 있다.

힉스입자는 와인버그 교수가 발견한 약전기 대칭성* (electroweak symmetry)을 깨면서 표준모형의 각 입자들에게 질량을부여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약전기 대칭성이 어떻게 깨지는지 그 메커니즘을 모른다.

와인버그 교수 자신이 이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을 제시했는데, 이른바 ‘총천연색’(technicolor) 시나리오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시나리오를 “약전기 대칭성이 새로운 강력에 의한 어떤 비섭동적 효과* 때문에 깨진다”는 아이디어라고 설명했다.

힉스입자의 발견은 LHC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그러나 그는 힉스입자를 발견해서 표준모형을 실험적으로 확증하는 일보다 오히려 표준모형을 넘어선 새로운 물리 이론에 훨씬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힉스입자 하나만 달랑 발견하면 정말 실망스러울 것”이라며 ‘분리된 초대칭성’(split supersymmetry)으로 알려진 최근의 시나리오에 가장 끌린 듯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입자는 스핀(spin)이라는 물리량을 갖고 있다. 뿐만아니라 스핀이 가질 수 있는 값은 0, 1, 2와 같은 정수값이거나 1/2, 3/2과 같이 정수에 1/2을 더한 값 두 종류뿐이다.

사람들은 전자를 보존(boson), 후자를 페르미온(fermion)이라고 부른다. 초대칭성은 바로 이 보존과 페르미온 사이의 대칭성이다. 즉 자연에 초대칭성이 있다면 모든 보존에는 그와 초대칭짝을 이루는 페르미온이 존재해야 하고, 모든 페르미온에는 그 초대칭짝인 보존이 있어야 한다.

분리된 초대칭성에서는 표준모형에서의 페르미온의 초대칭짝이 엄청나게 무거운 반면 보존의 초대칭짝은 적당히 가볍다. 그래서 LHC에서 우리가 일부 초대칭 입자를 관측하지 못하더라도 그리 슬퍼할 필요는 없다.

표준모형을 만든 장본인마저 표준모형을 간절하게 탈피하고자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표준모형이 완성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표준모형에 갇혀 있다. 아니, 아직 힉스입자를 보지도 못했으니 사실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20세기에 우연히 발견된 21세기 이론’으로 불리는 초끈(superstring)이론은 양자역학에 중력을 일관되게 포섭하는 가장 유망한 이론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표준모형과 초끈이론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차이가 존재한다. 이 기막힌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까?

아직도 학계에는 초끈이론을 실험적인 검증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신뢰할 수 없다는 흐름이 있다. 와인버그 교수는 이에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비록 실험과 성공적인 접점을 갖지 못한 일은 실망스럽지만, 초끈이론이 대통합을 위한 유일한후보라는 것.


01높이 16m, 가로 17m, 세로 13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초전도 자석을 사용한 CMS 검출기 내부. CMS 검출기는 초당 6억번의 입자 충돌 실험을 통해 우주와 물질의 기원을 밝힐 것으로 기대되는 LHC 실험에 사용된다. 02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점 같이 생긴 입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하는 매우 가느다른 끈으로 보는 초끈이론을 나타낸 그림. 초끈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4차원이 아니라 10차원(9차원의 공간+시간)의 시공간으로 구성된다.


우주론과 과학정책에도 영향 미쳐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은 4%에 불과하다. 그림은 초기 우주의 상상도.


와인버그 교수는 입자물리학 뿐만 아니라 우주론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명저 ‘처음 3분간’은 대중적으로도 매우 인기 있는 책이며 ‘중력과 우주론’은 교과서 중의 교과서로 꼽힌다. 얼마 전에도 그는 우주론에 관한 논문을 몇 편썼고, 최근에는 ‘중력과 우주론’의 후속작을 거의 마무리하는 등 이 분야에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입자물리학과 우주론, 천체물리학이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들 각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 우주론은 WMAP(Wilkinson Microwave Anisotropy Probe)이라는 과학위성이 보내 온 데이터로 “흥분에 휩싸여” 있다. 그는 우주론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수수께끼를 세 가지로 요약했다. 암흑에너지의 본성, 암흑물질의 정체,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본질.

WMAP의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matter)은 우주에 겨우 4%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그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는 물질, 즉 암흑물질(dark matter)은 약 22%를 차지한다.

나머지 74%는 물질과는 전혀 다른,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이를 암흑에너지라고 부른다. 우주의 진공에너지를 표현하는 우주상수(cosmological constant)가 암흑에너지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대체로 짐작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플레이션(inflation)이란 초기 우주의 급속한 가속팽창을 의미한다. 현재 관측되는 우주의 모습들을 일관되게 설명하기 위해 1981년에 처음 제안된 개념이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와인버그 교수는 “인플레이션이 예측하는 중력파의 관측이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그의 가장 최근 논문도 이의 계산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휘소 박사와 각별한 사이였던 와인버그 교수는 그에 대한 일화도 몇 가지 소개했다. 와인버그 교수는 거의 혼자서 논문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이휘소만큼 절친한 동료 연구자는 없었다”며 물리에 대한 그의 직관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와인버그 교수는 네덜란드의 트후프트가 1971년 표준모형의 내적정합성을 증명했을 때 자신은 그 의미와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휘소 박사가 여기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사실 이휘소 박사는 힉스입자를 포함한 게이지 이론*의 내적정합성을 밝혀 표준모형의 이론적 일관성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면 지금 우주론에 대한 연구를 둘이서 같이하고 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야심차게 준비한 SSC 계획이 실패했지만 와인버그 교수는 여전히 미국의 과학정책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가 유인우주비행계획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무인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추진하는 유인계획은 극단적으로 값비싼 볼거리 스포츠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과학혁명 일어날까


와인버그 교수(맨 왼쪽)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리처드 파인만(오른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과 함께 최고의 물리학자로 평가받는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가 또 다른 과학혁명을 기대할 수 있을까. ‘최종이론’에 지금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 다가왔을까. 올해 75세인 노(老)교수는 나이를 의식해서인지 가까운 장래와 자신의 여생을 비교하며 원자론의 예를 들었다.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을 주창한 때가 기원전 450년이지만 실험적으로 확인된 때는 대략 1800년이니까, 무려 220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내일 당장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래서 지금 우리는 최종이론에 90% 이상 도달해 있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2000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는 최종이론에 3% 정도 밖에 다가가지 못 했을 것이다.

표준모형이 세상에 나온 지 어느덧 40년. 왜 아직도 우리는 여기에 갇혀 있는가 하는 필자의 질문이 문득 어리석게 여겨졌다. 물리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됐다는 와인버그 교수의 논문조차도 처음 한두 해 동안에는 단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다고 하니 “너무 성급할 필요는 없다”는 그의 위로는 빈말이 아닌 듯하다. 눈부신 순간들을 위해 2000년을 숨죽이고 기다리며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디디는 발걸음이 어쩌면 과학의 본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표준모형*
소립자 세계의 질서를 나타낸 기본 모형.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인 쿼크, 렙톤과 이들 사이의 힘을 매개하는 입자로 나타낸다. 힉스입자는 이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한다.

약전기 대칭성*
전자기력과 약력을 통합하는 비가환(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달라지는) 게이지 대칭성.

비섭동적 효과*
약력이나 전자기력은 그 힘을 표현하는 결합상수가 충분히 작아서 이 값을 중심으로 급수전개(섭동론)가 가능하지만 강력의 경우 그 결합상수가 아주 커서 섭동론을 적용할 수 없다.

게이지 이론*
특정한 게이지 군에서 게이지 변환을 하더라도 주어진 물리계는 변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기초로 하는 이론. 표준모형은 게이지 이론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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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미국 오스틴=이종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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