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마지막 편은 음산한 사형대에서 그 얘기를 시작한다. 동인도회사가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와 교수형에 처하는 장면. 목에 ‘강철’ 같은 밧줄을 두른 한 소년의 입가에서 작고 여린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비록 찢어지게 가난했거나 지은 죄가 있어 해적이 됐지만 그들은 결코 죽지 않을 거란 주술적인 노래였다. 흔히 해적을 떠올리면 통쾌한 일탈과 자유, 어마어마한 보물이 연상되지만 실제 해적의 삶이 상상처럼 즐겁고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해적의 전성기였던 17세기, 그들의 공격 목표는 허황된 보물이 아닌 식민지의 무역선이다 보니 언제나 정부와 등 돌릴 수밖에 없었고 잡히면 그대로 교수형이었다.
배 안에는 질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해적의 몸은 늘 상처투성이였다. 해적은 ‘결코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단명했을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내과] 총칼보다 무서운 모기?
이름 : 윌 터너(올랜도 블룸 분)와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 분)
특징 : 다정한 연인
생활습관 : 블랙펄의 갑판 위에서 종종 데이트를 한다. 그때마다 향수를 즐겨 쓰는 엘리자베스는 모기떼의 습격을 받곤 한다.
낭만적인 기분에 젖어 ‘모기 따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기는 말라리아나 황열을 옮기는 위험한 곤충이다. 만약 엘리자베스를 문 모기가 운 나쁘게도 황열 바이러스를 지니고 있었다면 엘리자베스는 3~4일 안에 고열에 시달리게 된다. 극심한 오한과 두통이 찾아오고 각혈을 하다 5~10일 뒤에는 사망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엘리자베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 모기가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도 병을 옮길 수 있다는 데 있다.
연세대 원주의대 생화학교실 예병일 교수는 “역사 기록에 따르면 황열은 17세기 카리브해에서 유행하며 항해 경로를 따라 쿠바와 미국, 브라질로 전파됐다”면서 “그 당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를 실어나르던 배에 황열 환자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항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황열에 대한 공포가 컸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해적들도 황열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치과•피부과]캡틴 잭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이름 : 잭 스패로우(조니 뎁 분)
특징 : 호기심 많고 엉뚱하며 가끔은 정의감에 넘친다.
생활습관 : “럼주만 있다면 무인도에 있어도 행복할 거야”라고 말할 정도로 타고난 애주가. 해적이라는 ‘직업’상 늘 뜨거운 햇볕을 받고 살기 때문에 피부는 검게 그을렸고 거칠거칠하다. 1년에 한번 목욕할 정도로 더럽고 머릿속에는 이가 득실거린다.
천하무적 잭 선장이라도 알코올중독의 위험을 간과할 수는 없다.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상균 교수는 “좁은 배 안에서 오래 생활하며 술을 많이 마시면 알코올중독으로 뇌가 손상되거나 영양결핍을 겪을 수 있다”며 “과거에는 술을 정제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술에 불순물이 많이 들어있었고 몸에도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잭 선장이 가끔 혀 꼬인 목소리를 내거나 몸을 휘청거렸던 까닭이 알코올중독 때문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입을 벌리고 웃는 잭 선장의 치아는 까맣게 썩어있거나 군데군데 빠져있다. 배에서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양치질까지 하는 ‘호사’를 누릴 수 없는 탓이다. 연세대 치대 구강생물학교실 정한성 교수는 “항해하는 동안 해적들은 육포나 견과류처럼 딱딱한 건조식품을 많이 먹었을 테고 이는 치아나 잇몸에 염증이 생기게 한다”며 “입속 세균에서 나오는 독소가 심장 혈관을 좁게 만들어 심근경색, 협심증을 일으키고 당뇨병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잇몸이 스펀지처럼 부어오르고 이가 빠지거나 피부에 궤양이 생긴다면 괴혈병에 걸렸을 확률이 크다. 괴혈병은 비타민C가 부족하면 나타나는 질병으로 모세혈관이 약해지며 몸의 여기저기에 출혈이 생기고 멍이 든다. 당시에는 비타민이란 영양소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던 터라 과일만 잘 먹어도 예방할 수 있는 괴혈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서울 크리스탈피부과 황지환 원장은 “오래 바닷바람을 쐬거나 당근 같은 황색 야채를 먹지 못해 비타민A가 결핍되면 피부가 건조해지고 쩍쩍 갈라지는 일명 ‘두꺼비피부증’에 시달릴 수 있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기미와 주근깨, 검버섯이 생기거나 피부암에 걸릴 위험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다”라며 해적의 피부 상태를 진단했다.
배변 뒤 손을 잘 씻지 않거나 오염된 물과 음식을 먹으면 장티푸스에 걸릴 수 있다. 특히 잭 선장의 곱게 땋아 장식한 머릿속에는 이가 득실거렸을 가능성이 높다. 예병일 교수는 “머릿속이 간지러워 긁을 때마다 상처가 생기고, 상처를 통해 이의 몸에 기생하던 병원균이 침투하며 발진티푸스에 감염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발진티푸스의 잠복기는 10~14일로 40℃를 오르내리는 고열과 투통, 관절통을 불러온다. 불행하게도 잭 선장이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면 시체와 의복에까지 살충제를 뿌린다니 해적의 말로치고는 무척 비참한 풍경이다.
[안과]애꾸눈 해적의 이유 있는 변명
이름 : 라게티(매킨지 크룩 분)
특징 : 천성은 착하지만 배신의 유혹에 늘 흔들린다.
생활습관 : 툭하면 빠져나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나무 의안 때문에 애를 먹는다.
짓궂은 바르보사 선장(제프리 러시 분)은 라게티의 의안을 주워 혀로 낼름 핥은 뒤 돌려주곤 하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궁금증 하나. ‘피터팬’에 등장하는 후크선장, 소설 ‘보물섬’의 애꾸눈 선장 그리고 17세기 카리브해에서 악명을 떨쳤던 많은 해적들이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던 까닭은 뭘까. 한쪽 눈을 가리면 시야가 좁아지고 사물의 원근감을 잘 느끼지 못해 불편했을 텐데 말이다.
아주대병원 안과 국경훈 교수는 해적들이 안대를 착용한 까닭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싸움을 자주 하는 해적들은 눈가에 외상을 입기도 쉬웠을 것이다. 치료를 제때 하지 못해 실명으로 이어지거나 안구가 위축되며 눈의 기능을 잃었을 가능성도 크다. 결국 그들은 흉측하게 변한 눈가를 가리기 위해 안대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즘은 눈동자에 외상이 생겨도 감쪽같이 봉합수술을 한다. 안구를 제거해야 할 경우에는 탁구공 크기의 인공 안구를 채워 넣고 그 위에 눈동자 모양의 콘택트렌즈를 붙여 실제 눈과 거의 비슷하게 만든다.”
여름철 맹위를 떨치는 눈병은 어떨까. 국 교수는 “집단생활을 통해 빠르게 전염되는 눈병은 바이러스성 질환이므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치유되고 실명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다”면서 “단 오랜 기간 바닷바람을 쐬거나 강한 자외선에 노출되면 백내장이나 익상편에 걸려 실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의대 안과학교실 곽상인 교수도 “역사드라마에서 궁예나 당태종이 눈을 다친 뒤 안대를 하고 나오는 것처럼 해적의 검은 안대는 겁주기나 멋내기용이 아닌 상처 입은 눈을 가리려는 목적”이라고 추측했다.
[정신과]자유의 대가는 지독한 마음의 병
이름 : 데비 존스(빌 나이 분)
특징 : 무서운 저주를 받아 10년에 단 한번만 뭍에 오를 수 있다.
생활습관 : 사랑에 배신당한 뒤 심장을 도려내 버렸건만 오르간 연주를 할 때마다 연인에 대한 기억으로 눈물을 흘린다.
질병과 외상만큼이나 해적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 외로움이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사막 한가운데에 블랙펄과 함께 버려져 있는 잭 선장이 등장한다. 전편에서 그는 바다괴물 크라켄에게 먹혀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블랙펄에서 돛을 올리고 밧줄을 조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여기도 잭 선장, 저기도 잭 선장, 사방이 잭 스패로우로 가득하다. 그는 수많은 자신의 분신에게 명령을 내리고 맘에 안 드는 ‘놈’은 단칼에 죽여 버린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과 윤대현 교수는 “사람들과 동떨어져 아무 자극 없는 환경에서 지내다보면 일시적으로 환상을 보거나 환청에 시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잭 선장은 지옥을 탈출한 뒤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정신분열증으로 보기는 어렵다”면서 “일반적으로 정신분열증은 환경이 바뀐다 해도 회복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데비 존스의 뒤를 이어 유령선의 선장이 된 윌 역시 연인 엘리자베스를 만나려면 10년이란 세월을 견뎌야 한다. 윤 교수는 “그리움이 지나치면 우울증으로 발전하거나 혹은 상대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불신으로 자라날 수 있다”고 염려했다.
우리가 꿈꾸는 해적의 삶은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롭다. 비록 그 이면에는 질병과 배신, 음습한 고독이 웅크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류시화 시인은 ‘길 위에서의 생각’이란 시에서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고 읊지 않았나.
*익상편
눈동자에 날개모양의 핏줄이 자라는 질병으로 대개 코 쪽 흰자위에서 검은자위 방향으로 생긴다. 강한 자외선이나 먼지, 바람에 오래 노출되면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