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로 진행된 초소형 테스트에서 비행선 조종을 맡게 된 다크 펜델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아진 원형 비행선을 타고 주사기를 통해 잭의 몸에 들어간다. 다크는 모니터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전달받으며 잭의 혈관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레이저 광선으로 암세포를 제거하기도 하고 위산이 가득한 위 속에서 악당과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우리 몸은 단백질 자기조립체
1987년 개봉한 영화 ‘이너스페이스’는 당시 기발한 상상력으로 화제를 낳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영화 속에서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 다크가 조종하던 초소형 비행선은 나노기계를 연상시킨다. 최근에는 기계 부품을 사용하지 않고 나노기계를 대신할 수 있는 자기조립 물질을 만드는 ‘나노메디신’(nanomedicine) 기술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자기조립 물질을 의학 기술에 활용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우리 몸을 이루는 수많은 생체 분자들은 나노 크기다. 세포막을 이루는 인지질 이중층과 DNA를 비롯한 핵산, 갖가지 단백질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조립형 물질이다. 적절한 신호를 받으면 스스로 조립하거나, 이미 조립돼있는 구조체는 몸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일례로 세포 안에 있는 수많은 리보솜은 DNA에 담긴 유전 정보로부터 아미노산을 재료로 삼아 스스로 단백질을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단백질은 자발적으로 결합해 몸 전체를 이룬다. 이 때문에 최근 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기술이 나노 크기에 맞춰지고 있고, 여기에 자기조립 기술을 접목하려는 시도가 많다.
그 중에서도 나노메디신은 특히 암 치료에 가장 많이 사용된다. 암은 현대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복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이 없다. 외과 수술, 화학 요법, 면역 요법, 방사선 치료 등 암을 치료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이용되지만 여전히 부작용의 위험이 있고 항암 효과도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화학 요법에 쓰이는 항암제는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세포까지 죽이기 때문에 몸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다. 방사선 치료는 외부에서 방사선을 쪼여 암세포의 유전 물질을 파괴하지만 방사선으로 인해 정상세포의 돌연변이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2000년경부터 나노메디신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진단을 위해 자기공명영상(MRI) 장치의 조영제로 사용될 산화철 나노입자를 만들거나 약물로 사용될 고분자 나노입자도 개발됐다.
그 중에서도 암세포에만 선택적으로 결합해 암이 발생한 부위로만 항암제를 전달하는 나노 크기의 약물 전달체를 자기조립으로 만들기 위한 연구가 최근 각광받고 있다.
친수성과 소수성의 마법, 마이셀과 리포솜
세포막은 인지질과 단백질의 이중구조다. 여기서 머리 부분은 친수성이고, 꼬리 부분은 소수성으로 이뤄져 친수성인 머리가 세포의 안과 밖을 향하고 꼬리끼리 맞닿아 있다. 세포막이 이런 형태로 자기조립하는 성질을 모방한 대표적인 예가 마이셀(micelle)과 리포솜(liposome)이다.
마이셀은 물을 좋아하는 친수성 부분과 물을 싫어하는 소수성 부분을 함께 갖고 있는 고분자로 이뤄진 나노 입자다. 마이셀을 물에 녹이면 물을 싫어하는 소수성 부분이 서로 밀어내면서 지름이 수십~100nm의 공 모양으로 뭉친다.
이때 마이셀의 안쪽은 소수성이므로 물에 잘 녹지 않는 항암제를 손쉽게 붙잡아 가둘 수 있다. 반대로 마이셀의 표면은 친수성이므로 물이 많은 몸속에서 안정된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리포솜은 세포막을 이루는 인지질로 이뤄진 나노 입자다. 인지질은 친수성인 인산 부분과 소수성인 지질 부분을 함께 가진 생체 분자다. 따라서 세포막처럼 물에서 자기조립하면서 지름이 수십~수백nm의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인지질 이중층을 이룬다. 리포솜은 세포막의 구성 성분이므로 몸에 넣어도 해롭지 않다. 따라서 리포솜은 독성이 강한 항암제를 넣고 몸속에서 오래 돌아다닐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마이셀과 리포솜이 어떻게 암세포만 공격할까. 해답은 바로 암조직과 정상적인 조직의 주변 환경이 다르다는데 있다. 환자 몸 안 어딘가에 암조직이 자란다고 가정하자. 암조직은 정상적인 조직보다 왕성하게 자라므로 많은 산소와 영양분을 필요로 한다.
암조직이 일정 크기를 넘어서면 산소와 영양분을 더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 새로운 혈관을 만든다. 그런데 이때 생성되는 혈관은 정상적인 혈관에는 없는, 큰 구멍이 숭숭 뚫린 엉성한 형태다.
이제 환자의 팔에 항암제를 채운 마이셀을 주사하자. 마이셀은 100nm 정도로 작기 때문에 몸 속 곳곳에 퍼져있는 혈관을 따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이들은 혈관을 돌아다니다가 암조직에 다다르면 엉성한 혈관에 만들어진 큰 구멍을 따라 암조직 안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암조직 안으로 들어온 마이셀은 안에 넣어둔 항암제를 바깥으로 방출한다. 리포솜의 경우 암세포 안으로 들어가 터진다.
최근에는 마이셀과 리포솜의 표면에 항체 분자를 붙이기도 한다. 항체 분자는 암세포에서 발현되는 단백질과 결합하기 때문에 항체 분자를 붙인 리포솜의 경우 항암 치료 효과가 더욱 좋다.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단백질이 필요하다. 우리 몸의 유전정보를 전달하고 저장하는 DNA는 전사 과정을 통해 mRNA를 만들고 해독 과정을 거쳐 필요한 단백질을 만든다.
암세포도 이와 동일한 과정을 거쳐 자신이 자라는데 필요한 단백질을 얻는다. 다만 암세포는 정상세포에 비해 세포 분열이 훨씬 왕성하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단백질의 양도 엄청나다. 암세포 하나가 짧은 시간 안에 암세포덩어리를 만들고 온몸에 전이되는 이유도 이런 이상 세포 분열 때문이다. 따라서 암세포 증식에 필요한 단백질 발현만 억제해도 암 치료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
단백질 발현 막는 siRNA
최근 siRNA가 이런 연구에 많이 사용된다. siRNA(small interfering RNA)란 20개 가량의 핵산으로 이뤄진 짧은 이중 가닥의 RNA다. siRNA는 자신과 염기 서열이 상보적인 mRNA에 결합하는데, 이 과정에서 mRNA의 해독 과정을 억제해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못하도록 한다.
특히 siRNA와 mRNA가 결합할 때는 siRNA 중 단 하나의 염기 서열만 달라져도 표적이 되는 mRNA에 결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siRNA는 정상적인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해독 과정은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암세포가 자라는데 필요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siRNA를 이용한 기술은 꿈의 치료 기술로 각광받고 있다.
아무리 꿈의 기술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siRNA를 이용해 암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문제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siRNA가 암세포 안으로 들어가서 mRNA와 결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짧은 핵산인 siRNA는 표면에 나와 있는 인산기가 강한 음전하를 띠고 있어 세포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다. 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인지질 이중층도 강한 음전하를 띠고 있어 siRNA와 전기적인 반발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siRNA를 어떻게 세포 안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siRNA의 음전하를 중화할 수 있도록 양전하를 띤 물질을 함께 섞으면 암세포의 세포막과 전기적인 반발력을 줄일 수 있다. 양전하를 띤 물질로는 양이온을 지닌 아미노산인 라이신이 여러 개 연결된 폴리라이신이나 화학적으로 합성한 폴리에틸렌이민 같은 고분자들이 있다.
siRNA와 양이온성 고분자를 섞은 다음에도 문제는 남는다. 이들을 주사하면 혈관을 따라 돌아다니다가 암조직에 이르러야 하지만, 실제로 우리 몸의 혈액에는 핵산 분해 효소나 외부에서 들어온 물질을 잡아먹는 대식세포가 많다.
siRNA가 이들에 의해 작은 조각으로 잘라지면 표적 mRNA의 해독을 억제하는 능력은 사라진다. 그래서 siRNA를 안정적으로 감쌀 수 있는 나노 구조체가 필요하다.
여기에 자기조립 기술이 활용된다. siRNA와 친수성 고분자를 이은 접합체를 만든 뒤 양이온성 고분자와 섞으면 양전하와 음전하가 서로 이끌려서 만나는 힘에 의해 동그랗게 뭉친 이온성 고분자 즉 일종의 마이셀을 만들 수 있다.
siRNA의 음전하와 양이온성 고분자의 양전하가 만나면 전하가 중화되면서 소수성 부분이 만들어지고, 친수성 고분자는 물과 만나 바깥쪽으로 나온다. 이때 친수성 고분자로는 폴리에틸렌글리콜이 많이 쓰인다. 폴리에틸렌글리콜을 붙여주면 신기하게도 우리 몸에 있는 핵산 분해 효소나 대식세포의 방해 작용을 피할 수 있다.
자기조립을 이용한 나노메디신 기술은 앞으로 응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멀지 않은 미래에 각종 난치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나노 자기 조립체가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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