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다.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2006년 겨울은 기상관측 100년 가운데 가장 포근했다. 많은 사람들이 겨울을 빼앗아 간 주범으로 주저없이 지구온난화를 꼽는다.
지구가 더워지면서 가장 직접적으로 고통 받는 동물 중 하나가 북극곰이다. 최근 기후 변화로 북극의 빙붕(氷棚, 바다에 떠 있는 엄청나게 넓고 큰 얼음 덩어리)이 급속히 줄면서 상당수의 북극곰이 삶의 터전을 잃고 있다.
북극은 남극과 달리 육지가 없다. 이런 곳에서 북극곰이 살 수 있는 이유는 삶의 터전인 얼음이 물에 뜨기 때문이다. 물은 고체(얼음)의 밀도가 액체(물)보다 작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물질 중 하나다. 얼음이 물 위에 뜨지 않는다면 북극곰은 애초부터 북극에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물은 왜 이런 성질을 갖는 걸까.
물의 끓는점이 높은 이유
극성분자인 물(H2O)분자는 산소원자 쪽에 음전하가, 수소원자 쪽에 양전하가 생기는 쌍극자를 만든다. 이런 이유로 물분자 두 개가 가까이 다가서면 산소와 수소가 마주보는 방향으로 쌍극자 사이에 힘이 작용한다(분자의 극성과 쌍극자간 힘은 2007년 3월호 참고).
물분자 사이에 작용하는 쌍극자간 힘을‘수소결합’이라고 부른다. 수소를 매개로 물 분자들이 계속 연결돼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소결합은‘결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다른 분자간 힘에 비해 매우 강하다.
물분자의 수소결합이 얼마나 강한지 끓는점을 비교해 살펴보자. 산소와 같은 족 원소인 황(S), 셀레늄(Se), 텔레늄(Te)도 산소와 마찬가지로 수소원자 두 개와 공유결합을 이뤄 황화수소(H2S), 세렌화수소(H2Se), 텔루르화수소(H2Te) 분자를 만든다.
일반적으로 같은 족 원소들이 수소와 결합해 분자를 만들면 분자량이 클수록(분자의 크기가 클수록) 분자간 힘은 커진다. 분자간 힘이 크면 결합해 있는 분자를 떼어놓기 그만큼 어려워지므로 끓는점이 높다.
따라서 이들 물질의 끓는점은 분자량이 큰 순서(H2Te 〉H2Se 〉H2S 〉H2O)에 따라 물이 가장 낮다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끓는점을 비교해보면 놀랍게도 물의 끓는점이 가장 높다.
물을 제외한 나머지 물질의 끓는점은 분자량 순서에 따라 높아진다(H2S:-60.7℃ <; H2Se:-41.5℃ <; H2Te:-2.2℃). 이 경향을 따른다면 물의 끓는점은 -100℃ 정도가 될 것이다. 만약 물이 -100℃에서 끓는다면 지구는 생명체가 가득한‘푸른 행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 물의 끓는점은 다행히 100℃다.
물분자 사이에 이렇게 강한 결합력이 생기는 이유는 산소원자의 전기음성도가 크기 때문이다. 전기음성도는 특정 원자가 공유결합을 이룰 때 전자를 끌어당기는 정도를 수치로 나타낸 값으로 산소의 전기음성도(3.44)는 같은 족 다른 원소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S:2.58, Se:2.55, Te:2.10). 따라서 산소쪽에 음전하가 크게 생기고 물분자 사이에 수소결합이라는 매우 큰 쌍극자간 힘이 만들어진다.
끓는점을 높여주는 수소결합이 물분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소원자와 결합해 분자를 이루는 어떤 원소의 전기음성도가 충분이 크다면 다른 분자의 수소와 강하게 결합해 수소결합을 만들 수 있다. 질소(N)가 수소와 공유결합해 만든 암모니아(NH3)가 대표적인 예다. 암모니아(끓는점 -33.4℃)는 질소와 같은 족 원소가 수소와 결합해 만들어진 포스핀(PH3), 삼수소화비소(AsH3), 삼수소화안티몬(SbH3)에 비해 끓는점이 높다.
물분자가 만든 정사면체 얼음
북극곰은 물분자 사이에 작용하는 수소결합 덕분에 빙붕 위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까. 온도가 낮아지면 물분자는 산소를 중심으로 다른 물분자 4개와 수소결합해 정사면체를 만든다.
즉 물분자를 이루는 수소원자 2개가 각각 다른 물분자의 산소와 수소결합을 하고, 산소는 다른 2개의 물분자에 있는 수소와 수소결합을 한다는 뜻이다. 이 결합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 구멍이 뻥 뚫린 구조가 된다. 물이 얼면 부피가 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플루오르(F)와 수소(H)로 이뤄진 플루오르화수소(HF)도 수소결합 때문에 끓는점이 높은 물질이다. 전기음성도가 다른 원소에 비해 큰 플루오르, 산소, 질소는 수소결합을 이루는 원소다.
이제 열을 가해 얼음을 녹여보자. 수소결합으로 예쁘게 정렬돼 있던 3차원 구조가 깨지면서 물분자가 서로 엉킨다. 그러면 물의 부피가 작아지고 물의 밀도는 커진다. 하지만 온도가 높아지더라도 밀도가 계속 커지지는 않는다. 물분자의 운동이 활발해지면 분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부피가 팽창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물질은 온도가 낮아지면 분자 운동이 약해져 부피가 줄어들지만, 물은 수소결합 때문에 오히려 입체구조를 만들며 부피가 커진다. 물분자의 운동과 수소결합이 균형을 이뤄 물의 부피가 가장 작아지는 온도가 바로 4℃다. 따라서 얼음은 물보다 밀도가 작아 물에 뜬다.
DNA에 생명정보 쓰는 연필
북극곰은 물분자의 수소결합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는 사실에 고마워해야겠지만 사실 수소결합은 북극곰의 생명 자체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명체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원소는 탄소(C), 수소(H), 산소(O), 질소(N)다. 이중 탄소는 단백질과 같은 생체고분자 화합물의 골격을 이룬다(탄소의 역할은 2007년 1월호 참고).
그리고 수소결합! 생명체는 DNA와 RNA같은 핵산이라는 고분자를 이용해 생명을 유지하고 유전정보를 후대에 전달한다. DNA분자가 이중나선구조를 이루고 그 안에든 유전정보를 이용해 생명체에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 때도 수소결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소결합이 유전정보를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결합력이 강하다는 특징 말고 더 특별한 뭔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어떻게 그 많은 생명의 정보를 작은 분자에 담을 수 있는 걸까. 바로 수소결합의 방향성이 DNA분자에 생명의 정보를 적는‘연필’역할을 한다.
핵산은 A(아데닌), T(티민), G(구아닌), C(시토신)라는 4가지 물질이 줄에 구슬이 꿰어져 있듯이 연결돼 있는 고분자다. A, T, G, C는 탄소, 수소, 산소, 질소로 이뤄졌는데, 산소와 질소가 이 안에 어떻게 배치돼 있느냐에 따라 수소결합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 방향에 따라 A, T, G, C가 배열되는 방식이 달라지며 무수히 많은 생명의 정보를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