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철학의 지형도를 바꿔 놓은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19세기 사회사상가이자 경제학자인 칼 마르크스는 고대 원자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대철학의 거봉으로 불리는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우주의 생성을 역학적으로 설명하는 가설을 제시했다. 누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사돈의 팔촌’이라고 했던가. 여기 과학과 인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괴짜’들이 있다.
김호_ 전통의학에서 사람을 본다
2000년 방영된 드라마 ‘허준’은 전국최고시청률 65%의 대기록을 세우며 안방극장을 사로잡았다. 허준과 당대 내의원의 최고 의원이었던 양예수의 대결구조는 다음 회가 기다려지게 만드는 거부할 수 없는 ‘미끼’였다.
그런데 경인교대 사화과교육과 김호 교수에게는 그 ‘미끼’가 ‘눈엣가시’였다. 그는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터였다. 허준, 양예수와 절친했던 미암(眉巖)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따르면 양예수는 허준의 라이벌이 아니라 스승이었다. 그는 그 얘기를 담아 그해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라는 책을 펴냈다.
2004년 온 나라는 ‘대장금’ 열풍으로 다시금 전통의학에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대장금이 중종(中宗)의 주치의가 되면서 조선 왕가의 병력이 화제에 올랐다. 김 교수는 순조(純祖)와 몇몇 왕실 가족의 처방을 조사한 결과 조선 왕가 대부분이 운동부족과 스트레스로 만성적인 위장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역사학자인 그가 조선시대 의학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뭘까. 그는 “전통의학의 패러다임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이 인간을 어떻게 보는지 찾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그는 조선의 법의학 서적인 ‘무원록’(無寃錄)을 현대적으로 번역한 책을 출판했다. 그에게 과학은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이며 동시에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강호정_ 자연과 인공의 중간지대에 서다
하나는 인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원시림이나 깨끗한 호수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고서는 얘기할 수 없는 인공적인 분야다. 전자는 살아 있는 생명을, 후자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무생물을 다룬다. 생태학과 공학은 이렇게 멀다.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강호정 교수는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있다. 현재 지구상에서 인간의 활동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지역은 거의 없다. 때문에 최근 들어 인간이 모여 사는 도시도 생태계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생겼다. 도시를 기존의 ‘생태학’(Ecology)이 아니라 새로운 ‘생태공학’(Ecological Engineering)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인간이 배출하는 오염물을 습지에 서식하는 식물이나 조류, 미생물이 흡수, 분해하도록 한다거나 음식물쓰레기를 이용해 농업용 비료를 개발하는 일은 생태공학을 응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강 교수가 생태공학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환경대학원에 진학해서였다.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윌리엄 미취 교수가 쓴 ‘습지’(Wetland)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게 생태공학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러다가 미취 교수의 실험실을 방문해 같이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고, 그 인연으로 생태공학은 강 교수의 평생 ‘업’이 됐다. 미취 교수는 현재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교수로 있으면서 ‘생태공학’이라는 학술지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요즘 강 교수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또 있다. 글쓰기다. 지난해 4월 서울대 글쓰기교실에서 과학 글쓰기에 대해 특강을 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주변에서도 “글 참 잘 쓰는 과학자”라는 평을 많이 듣는다.
그의 글쓰기 노하우는 의외로 단순하다. 간결하고 명확하게 쓸 것, 용어를 통일할 것 그리고 논리적인 연결에 집중할 것. 서울대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그는 “과학적인 글쓰기는 하나의 기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가 생지화학적인 순환에 대한 두 편의 논문을 세계적인 과학 전문지 ‘네이처’에 실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유려한 필력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최정규_ 이기적인 경제, 이타적인 인간을 깨닫다
“놀이방에서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러 오는 시간이 5분, 10분씩 자꾸 늦어지더랍니다. 그래서 놀이방에서는 늦게 오는 엄마에게 벌금을 물리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벌금 제도가 생기고 지각하는 엄마들이 더 늘어났답니다. 왜 그럴까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엄마들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벌금이라는 경제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제시하면 벌금을 내지 않으려고 시간에 맞춰 오는 엄마들이 늘어야 정상이다. 자신에게 최대이익을 남길 수 있는 전략을 택하는 것, 그것이 경제학의 기본전제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은 ‘타락’한다. ‘벌금 좀 내고 말지’라고 생각한다.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최정규 교수는 이것이 “인간의 이타성과 호혜성”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경제 논리가 아니라 도덕심이나 책임감에 따라 행동하기도 한다는 얘기다. 놀이방에서 벌금 제도가 없을 때는 엄마들이 도덕심 때문에 조금 늦더라도 시간에 맞춰 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벌금 제도가 생기면 조금 늦었다는 도덕심을 벌금으로 만회한다.
헌혈도 마찬가지다. 헌혈을 한 사람에게 돈을 주기 시작하면 대가를 지급하지 않을 때보다 헌혈자가 준다. 공공의 책임감 같은 이타성이 작용해 기꺼이 헌혈을 하던 사람들에게 돈을 지급하면 시장의 논리에 따라 헌혈에 가격을 매기게 되고, 이때 가격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헌혈 횟수를 줄인다. 인간의 본성이 경제활동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줄이야.
경제학자인 최 교수가 인간의 본성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이타성이 어떻게 이기심을 물리쳤을까.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혈연관계에 있는 개체들에게 헌신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고 하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이 종종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는 해답의 실마리를 다윈의 진화론에서 찾았다. 즉 우리 사회가 자연선택 되기 위해서는 겉으로만 이타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타적인 인간이 살아남아 진화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치열한 적자생존의 장에서 이기적인 개체가 아니라 이타적인 개체들이 살아남고 진화해왔다는 사실을 경제학자는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