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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간을 아시나요?

기후학으로 풀어본 제주도 이사풍습의 비밀

제주도에는 대한 후 5일에서 입춘 전 3일 사이에 집을 고치고 이사하는 ‘신구간’(新舊間)이라는 특이한 풍속이 있다. 이 풍속이 언제 시작됐고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마다 1월 25일부터 2월 1일 사이가 되면 제주도는 이삿짐 행렬로 장사진을 이룬다. 왜 제주도에만 이런 풍속이 있는 걸까?

제주도민의 15%가 이동하는 일주일
 

제주도에는‘신구간’이라는 특이한 풍속 때문에 해마다 1월 25일~2월 1일에는 이삿짐 행렬이 이어진다. 제주도의 전통 초가(왼쪽)와 현재의 이사 모습.


약 일주일 남짓한 신구간 기간 동안 제주도민의 약 15%인 1만 세대 정도가 한꺼번에 이사를 하니, 제주도 전체가 들썩거릴만하다.

동사무소에서는 밀려드는 전출입신고로 정신없고, 법원 등기소에서는 전세 등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면서 관공서는 비상체제가 된다. 전화국에서는 평소보다 6배 이상 되는 전화이설 요구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고, 통신회사와 유선방송국은 수만 가구의 인터넷과 유선방송을 다시 설치하느라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지경이다.

이사차량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안심하고 이사하려면 몇 달 전에 이삿짐센터에 예약을 해야 한다. 이삿짐센터도 하루에 서너 탕씩 뛰느라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여서, 육지의 이삿짐센터가 제주도로 원정을 오기도 한다. 이사할 때 한꺼번에 쏟아지는 이사 쓰레기 때문에 도심 곳곳이 몸살을 앓는다.

하지만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곳도 있다. 중국집, 커튼가게, 가구점, 그리고 가전제품 대리점에서는 신구간이 대목인 셈이다. 그래서 침체됐던 경기도 신구간에 반짝 살아난다.

반대로 신구간이 아닌 다른 시기에는 집을 세놓거나 빌리기가 쉽지 않다. 아파트를 분양할 때도 대부분 신구간에 입주할 수 있도록 준공일자를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구간이 끝난 2월 말경에 육지에서 제주도로 이사 오는 경우엔 집을 구하지 못해 낭패를 겪기 일쑤다.

신들의 임무교대
 

대한후5일부터입춘전2일은곧신구세관(新舊歲官)이교승하는때다. 입춘 일을범하지말고, 반드시황도일과흑도일을가려서먼저조상의신주에게길 (吉)한방향으로피해서나가도록청해야한다. 이때에는산운에도거리낌이없 어길흉살에이르기까지극복되므로, 임의대로가택을짓고장사를지내도불리 함이없다. -‘천기대요’중 세관교승


첨단과학기술 시대인 오늘날 신구간 같은 풍속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해마다 이런 일은 되풀이 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제주도에만 이런 풍습이 있다는 사실을 두고 제주도에 유난히 많은 민간 신앙 때문으로 풀이한다.

예로부터 제주도에는 연중 온난다습한 기후 때문에 세균감염으로 인한 질병이 많았다. 게다가 제주도의 토양은 물이 잘 빠지는 화산회토(화산재와 같은 화산분출물로 이뤄진 토양)인데다 태풍의 길목이어서 늘 가뭄과 비바람에 시달려야 했다. 옛사람들은 자연재해와 질병을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 여겼다. 그래서인지 제주도는 ‘신들의 고향’이라 불릴 만큼 신화가 많이 전해져오고 있다.

그럼 신구간 풍속의 근간이 되는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민속학자들은 신구간의 유래를 ‘천기대요’의 세관교승(歲官交承)에서 찾는다. 세관교승은 ‘신구세관교승기간’(新舊歲官交承期間)의 줄임말로 여기에서 관(官)은 신(神)을 말한다. 천기대요는 성여훈이 1636년에 펴낸 장래의 길흉을 예언하는 도참서로 당시 관청과 민간에서 널리 읽혔다.

여기에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내려온 신들의 임기가 다 끝나 구관(舊官)과 신관(新官)이 교대하는 신구간에 가정사의 중요한 일을 하면 아무런 탈이 없다고 쓰여 있다.

이런 세관교승에 대한 이야기는 1700년경에 홍만선이 펴낸 ‘산림경제’에도 실려있다.

그러나 두 책을 신구간의 근원으로 보기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두 책은 조선시대 후기 전국적으로 널리 읽힌 책으로 세관교승의 내용은 제주도보다 오히려 본토에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제주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신구간 풍속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신구간 풍속이 ‘세관교승’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왜 제주도에만 신구간 풍속이 남아 있을까.

입춘에 봄이 시작하는 유일한 지역
 

신구간과 관련된 첫 기록은 1953년 1월 21일자‘제주신보’에“신구간 앞두고 방세 껑충, 연중관례로 이사하는 시기인 신구간을 앞두고 셋방살이하는 피난민들에게 일부 집주인들이 엄청난 방세를 요구하고 있다”는 보도다.


제주도 속담에 ‘오뉴월에는 앉은 자리도 못 옮겨 앉는다’는 말이 있다. 고온다습한 시기에 물건을 옮기며 이사하면 뒤탈이 난다는 말이다. 신구간의 경우는 가장 추운 시기에 변소를 고치고 집을 수리하고 이사를 하면 뒤탈이 없다는 풍속이다. 실제로 신구간은 대한(大寒) 추위가 이어져 우리나라 전역에서 가장 추운 시기다. 신구간을 전후한 절기들의 일평균기온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대한 후 5일부터 입춘 전 3일까지, 즉 1월 25, 26일부터 2월 1, 2일까지를 ‘절기상 신구간’이라 하고, 일평균기온 5℃ 미만(겨울)에서 일평균기온 5℃ 이상(봄)으로 넘어가는 1주일 내외의 기간을 ‘자연계절의 신구간’이라 하자. 기상학에서는 대체로 겨울을 식물의 생장과 미생물의 활동이 둔화되는 일평균기온이 5℃ 미만인 기간으로 정의한다.

절기상 신구간과 자연계절의 신구간을 비교해보면 본토에서는 이 둘 사이에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절기상 신구간에는 계절적으로 볼 때 한겨울이고, 자연계절의 신구간이 되려면 3월 10일경이나 돼야 한다. 지리적, 기후적으로 볼 때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완도는 자연계절의 신구간이 되려면 2월 20일쯤이 돼야 한다.

세관교승의 내용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는데도 본토에는 신구간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이유는, 절기상으로는 입춘이 돼도 여전히 계절적으로는 한겨울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신구간이 엄동이어서 이사를 하거나 집을 수리하기 어렵다.

반면 제주도에서 신구간은 1년 중 일평균기온이 5℃ 미만으로 내려가는 거의 유일한 기간으로, 절기상 신구간과 자연계절의 신구간이 일치한다. ‘입춘’이 문자 그대로 봄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제주도에서는 입춘에 따뜻한 봄을 실제로 맞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은 신구간 동안은 지상에 신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액운이 없다는 속신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이처럼 제주도는 절기상으로 입춘이 되면 기상학적으로도 봄이 시작되는 유일한 지역이기 때문에 세관교승에 따라 신구간이 풍속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자유의 시간, 축제의 기간

신구간은 연중 온난한 기후로 늘 세균감염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사람들에게 1년 중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유일한 기간이었다. 또 농사에 전념했던 제주 사람들이 집수리, 화장실 수리, 이사 등 농사 이외의 일을 할 수 있는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고 농촌에서도 농한기가 따로 없다. 또 방역이 철저하고 위생상태가 좋아져 세균감염으로 인한 질병의 위험도 사라졌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제주사람들이 ‘신구간=이사철’을 지키는 가장 큰 이유는 신구간이 임대차(賃貸借)의 회계연도로 정착됐기 때문이다. 전세 계약기간을 올해 신구간에서 다음해 신구간까지로 해온 관례가 되풀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관례를 그대로 따르기에는 그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너무 크다. 따라서 신구간 풍속의 의미를 되새겨 새롭게 변모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제주사람들에게 신구간은 신으로부터 해방돼 자유롭게 새봄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이런 의미를 살려 신구간을 그동안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독특한 축제 기간으로 삼는 것은 어떨까. 신구간을 제주도에서 미련 없이 보내고 새출발 할 수 있는 자유의 시간, 해방의 시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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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진행

    박현정
  • 윤용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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