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산길이나 들길을 거닐다보면 바지 섶에 붙어 따라오는 ‘녀석’을 볼 수 있다. 바로 엉겅퀴, 도꼬마리, 도깨비풀 같은 식물의 씨앗이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사람 옷이나 동물 털에 들러붙어 먼 곳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고 있는 ‘찍찍이’라 부르는 벨크로 테이프는 엉겅퀴 씨앗을 흉내낸 발명품이다. 1948년 프랑스의 조르주 드 메스트랄이 발명한 이 제품은 각종 신발과 의류는 물론이고 무중력 상태의 우주선 내에 물건을 고정시키는데도 이용되고 있다. 벨크로는 자연에 존재하는 특수한 기능을 공학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예로 생체모방 또는 자연모사 기술을 언급할 때 항상 등장한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물체는 35억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지구의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끊임없이 다듬어져 최적화된 작품이다. 자연을 모사해 공학적으로 응용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기능을 갖는 소자나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자연모사기술(nature inspired technology)은 생물체나 생체물질의 기본구조, 원리와 메커니즘을 모방하고 응용해 공학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을 말한다. 2006년 9월 중국 길림대에서 열린 국제생체공학학술대회에서 영국 바스대의 줄리안 빈센트 교수는 생물학과 공학 사이를 ‘절대적 복제’에서 ‘영감적 설계’까지 5단계로 구분해 설명했다. 자연모사공학은 생체모방공학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공학 기술에 더 가까운 분야다.
자연모사기술 중에서 천장에 거꾸로 붙어도 안 떨어지는 게코도마뱀의 발바닥, 사람 귓속 달팽이관에 있는 미세한 털, 물을 밀어내는 연꽃잎, 그리고 강철보다 강한 거미줄을 공학적으로 응용하려는 노력을 만나보자.
1_깨끗한 반도체기판 얻으려면
벽과 천장을 자유자재로 기어 다니는 게코도마뱀의 비밀은 2000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이 밝혀냈다. 도마뱀 발바닥에는 가느다란 털인 섬모가 수없이 존재하는데, 섬모와 벽면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힘인 ‘반데르발스힘’이 작용해 게코도마뱀이 맘대로 붙어 다닌다는 것이다.
게코도마뱀의 발바닥을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길이 50~100μm(마이크로미터, 1μm=100만분의 1m)에 지름 5~10μm의 강모가 수백만개 덮여 있다. 이 강모 하나는 다시 주걱 모양의 섬모(spatula) 수백개로 갈라져 있다. 섬모 하나는 길이가 1~2μm이고 지름이 200~500nm(나노미터, 1nm=10억분의 1m)다. 섬모 하나의 부착력은 미약하지만 수억개가 힘을 합하면 도마뱀 무게의 수십배를 벽면이나 천장에 붙일 수 있다.
이런 섬모가 달린 표면구조물을 만들어 활용한다면 접착제 성분 없이 붙였다 뗄 수 있는 획기적인 접착기구가 탄생할 수 있다. 게코도마뱀의 발바닥을 모사한 친환경 접착기구는 기존 접착테이프나 접착제를 대체하는 것은 물론 반도체 제작공정이나 우주인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도체는 청정 진공환경에서 제작해야 하는데, 기판(웨이퍼)을 가공하면서 들어서 옮겨야 할 때 기존처럼 흡착판이나 접착제를 이용하면 기판이 더러워질 수 있지만 이 접착기구를 이용한다면 깨끗하게 옮길 수 있다. 또한 우주인이 이 접착기구가 들어간 장갑을 착용한다면 무중력 공간에서 훨씬 자유롭게 활동할 것이다.
도마뱀의 부착 메커니즘을 이론적으로 밝혀낸 뒤 2006년 초 미국 스탠퍼드대에서는 게코도마뱀을 본떠 유리벽을 기어오를 수 있도록 만든 로봇인 ‘스티키봇’(Stikybot)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섬모처럼 3차원 구조물을 나노미터 규모로 정교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현재 실험실 상태에서 개발된 ‘도마뱀 섬모’는 몇 번 사용하고 나면 힘을 쓰지 못한다. 지금 전세계는 도마뱀 접착기구를 상업화하기 위한 연구가 한창이다.
2_강철보다 강한 나노섬유
거미는 거미줄 단백질이 모여 있는 실샘에서부터 긴 관을 거쳐 방적돌기를 통해 몸 밖으로 고체 상태의 거미줄을 뿜어낸다. 후미진 곳에서 하찮게 보이는 거미줄이 강철보다 5~10배 강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공 거미줄을 대량 생산하는데 거미줄 성분의 단백질을 합성하고 거미줄을 생성하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다.
캐나다 생명공학회사인 넥시아에서는 거미줄 유전자를 염소에 이식해 이 염소의 젖에서 거미줄 단백질을 추출한 뒤 전기방사공정으로 인공 거미줄인 ‘바이오스틸’(BioSteel)을 개발한 바 있다.
바이오스틸은 의료용 봉합사로 활용될 수 있다. 전기방사공정은 거미줄 단백질이 포함된 용액이 나오는 노즐과 전극 사이에 고전압을 걸어주면 용액이 섬유 형태로 퍼져 나가 인공 거미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섬유가 제멋대로 뿜어져 나온다는 단점이 있다.
한국기계연구원에서는 노즐 옆에 전극을 설치해 나노섬유가 효과적으로 뿜어져 나오게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 섬유의 굵기는 공정 조건에 따라 거미줄 정도인 10μm에서 거미줄보다 가는 수백nm까지 다양하게 조절할 수 있다.
인공 거미줄 같은 나노섬유는 화상을 치료하는데 쓰는 거즈로 유용하다. 기존 거즈로 상처 부위를 덮으면 공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자라기 힘들다. 하지만 나노섬유를 뿌려 만든 거즈는 세균이 침투하지 못하지만 공기는 통하는 미세한 틈새가 있어 새 살이 돋는데 좋다. 현재는 동물실험 단계다.
3_1 년 내내 세차 안해도 되는 연꽃잎 효과
연꽃잎의 표면은 물기나 먼지가 남아있지 않고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렇게 특수한 성질을 보이는 비결은? 연꽃잎의 표면을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돌기가 산봉우리처럼 있고 여기에 나노미터 크기의 돌기가 나무처럼 배열돼 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연꽃잎은 물을 밀어내 물방울이 퍼지지 않고 맺히도록 하는 효과를 보인다. 이를 ‘연꽃잎 효과’라 한다. 또 물방울이 먼지를 쓸어내는 자기세정 효과도 있다. 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란잎도 연꽃잎 표면 돌기와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연꽃잎 효과를 나타낸다.
섬유 올 하나하나에 돌기를 만들어 비에 젖지 않는 옷을 만들거나 스스로 먼지나 때를 없애는 페인트를 개발할 수 있다. 목욕탕 거울에 연꽃잎 효과를 내는 필름을 코팅하면 김이 서려 뿌옇게 되는 현상을 막을 수 있고 자동차 전체에 이런 필름을 코팅하면 따로 세차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실용성에는 문제가 있다. 독일에서 개발한 페인트는 온도와 습도가 잘 맞는 조건에서만 연꽃잎 효과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효과가 사라진다.
한국기계연구원에서는 연꽃잎 효과를 지닌 투명한 필름을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현재 실험실에서 개발한 가로세로 3cm의 작은 면적이 1주일쯤 연꽃잎 효과를 내는 정도다. 이것이 자동차의 선탠용 필름과 사이드미러, 건축물 내외관의 유리창, 태양전지판 표면, 거리의 표지판에 부착되면 표면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기능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4_달팽이관에서 찾는 잠수함 추적센서
사람 귓속에는 소리를 듣고 균형과 방향감각을 담당하는 청각기관이 있다. 동물 귀, 물고기 옆줄도 사람 귀와 비슷한 기능을 하고, 히드라나 해파리 같은 해저생물에도 청각기관이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지름 수백nm에 기다란 막대형태인 부동섬모(stereocilia)라는 구조다. 부동섬모는 소리, 즉 공기나 물이 진동하며 압력을 가해 생긴 파를 신경계에 전달한다. 청각기능과 평형기능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감지하는 역할도 한다.
부동섬모는 보통 크기와 길이가 다른 3개의 막대가 정렬돼 있고 이들이 ‘팁링크’라는 가느다란 실 구조에 의해 서로 연결돼 있다. 외부자극을 받아 막대들이 변형되면 팁링크가 작용해 이온채널을 열고 칼슘이온이 이동하며 기계적 신호가 전기 신호로 바뀌어 청신경세포로 전달된다. 인체의 부동섬모는 공학적 센서보다 감도가 훨씬 좋다. 예를 들어 부동섬모를 이용하면 움직임을 측정하는 자동차 에어백용 가속도 센서보다 100배 이상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나노공정기술로 제작한 미세한 부동섬모를 이용한 청각센서는 막의 떨림을 전기신호로 바꾸는 기존 센서에 비해 크기가 작으며 감도는 상당히 높아질 수 있다. 현재 휴대전화 스피커는 고주파의 귀뚜라미 소리를 잡아낼 수 없지만 인공 부동섬모로 만든 청각센서는 사람 귀처럼 고주파도 감지할 수 있다. 인공 부동섬모 장치는 귀의 전정기관처럼 생체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나 물고기 옆줄처럼 물의 작은 흐름을 파악해 적 잠수함을 찾아내는 센서로도 활용될 수 있다.
자연모사 또는 생체모방이라는 분야는 국내외적으로 아직 탐색 연구 단계에 있지만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관찰력,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연구개발을 통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 또한 분야에 따라서는 나노기술과 바이오기술이 함께 발전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핵심 융합기술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