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페이퍼테이너 뮤지엄’(Papertainer Museum)의 1차 설계도가 나왔다. 종이 기둥과 컨테이너로만 이뤄진 ‘종이 박물관’. 1986년부터 종이를 건축 재료로 사용해온 세계적인 건축가 시게루 반이 설계를 맡았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한국에 종이 박물관이 지어질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감격도 잠시, 첫 단추부터 꿰기가 어려웠다. 박물관의 주 재료인 종이 기둥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종이 기둥을 생산하는 싱가포르 기업에 의뢰했지만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11m 높이 거대 기둥
일단 국내 업체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다들 난색을 표했다. “높이가 5m 이상은 불가능하다”거나 “두께 15mm 이상 생산할 수 있는 기계는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수소문 끝에 종이 기둥을 생산하는 설비를 세계에 수출하는 중소기업인 ‘윤성’을 만났다. 윤성과 수차례 협의 끝에 박물관 설계도에 따라 높이 11m, 지름 75cm, 두께 25mm의 거대한 종이 기둥을 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윤성이 직접 제작하기로 했다. 이제 컨테이너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1차 설계도에서는 길이 40피트(약 12m)짜리 중고 컨테이너를 구입해 두 줄로 쌓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컨테이너는 박물관에서 전시 공간의 역할도 해야 했다. 그러기엔 40피트짜리 컨테이너는 활용도가 떨어졌다. 계획을 수정했다. 컨테이너 중에서 가장 작은 10피트(약 3m)짜리 컨테이너 147개를 사용해 양쪽 벽체를 만들고, 40피트짜리 컨테이너 19개로 지붕을 덮기로 했다.
7월 초 한국은 장맛비가 한창이었다. 수정된 설계도를 들고 인천 부둣가에 위치한 컨테이너 업체인 ‘에이스특수공업’을 찾았다. 다행히 에이스특수공업은 종이 박물관의 계획에 적극적이었다.
문제는 종이 기둥과 컨테이너를 박물관이 들어설 서울 올림픽공원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종이 기둥 353개를 수원에서 목적지까지 운반하는데 4.5톤 화물차 60대가 필요했다. 화물차 한 대에 종이 기둥 6개씩 실었다. 컨테이너는 인천에서 날랐다. 컨테이너 166개는 5톤 화물차 93대에 나눠 실었다.
유난히 길었던 장마는 7월 말이 되자 조금씩 사그라졌다. 8월 3일 박물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첫 삽을 들었다. 기초를 다지고, H빔을 깔고, 그 위에 철판을 덮었다.
장마가 지나간 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됐고 한여름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용접으로 인한 열이 뒤섞여 인부들의 등줄기엔 땀이 비 오듯 했다. 밤 10시까지 야간 공사를 한 덕분에 8월 30일 드디어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의 외관이 완성됐다. 현장을 찾은 시게루 반은 한국인의 시공 능력과 품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게차 올리고 가스불 붙여도 거뜬
“라이터 하나면 미술관을 날려 버릴 수 있다.”
9월 1일 한 언론 매체를 통해 종이 기둥으로 박물관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 네티즌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이런 악성 댓글을 달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종이로 만든 기둥이 얼마나 튼튼하겠느냐며 종이의 강도에 의구심을 가졌다.
사실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은 서울의 세종문화회관과 크기가 비슷하다. 우리의 전통 건축인 종묘나 불국사에서 나타나는 열주(列柱) 방식을 적용해 종이 기둥을 천장을 찌를 듯 높게 연이어 세웠다. 이런 대형 미술관을 쉽게 물에 젖고, 금방 불이 붙으며, 간단히 손으로 찢을 수 있는 연약한 종이로 기둥을 만들어 세우다니.
하지만 종이는 건축 재료로서 수많은 실험과 심의 과정을 거쳐 강도가 세고 안전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종이 기둥은 콘크리트 강도와 비슷하다. 독일과 일본 정부는 이미 종이 기둥을 주요 건축 구조재로 건축법에 등재했다.
특히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을 떠받치는 종이 기둥은 제작할 때부터 내구성을 염두에 뒀다. 현재 국내에서 생산되는 판지는 최대 두께가 0.6mm다. 종이 기둥 제작을 담당한 윤성은 합지기를 이용해 종이 두께를 1~2mm로 만든 뒤 이를 다시 10여 차례 기계에 감아 종이가 여러 겹으로 겹쳐지면서 나선형으로 말려나가도록 해 25mm까지 늘였다.
이때 판지와 판지 사이에 화학약품인 풀을 칠하면서 방수, 방화 처리를 했다. 종이 기둥을 완성한 뒤 방수 처리를 한 차례 더 했고, 판지 사이를 밀착시켜 진공 상태로 만들어 산소와의 접촉을 피해 불에 쉽게 타지 않도록 했다.
별도의 안전성 시험도 거쳤다. 종이 기둥 위에 무게가 수톤 나가는 지게차를 직접 올려 강도를 측정하고 물을 뿌려 내수성을 확인했다. 가스통을 이용해 불을 붙여 내화성도 검증했다. 그 결과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은 정식 건축물로 송파구청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은 국내 친환경 건축의 새장을 열었다. 종이 기둥과 컨테이너는 건물을 짓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시멘트와 물을 사용하지 않아 건축과정이 매우 효율적이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 이미 건축에 사용된 소재를 그대로 재사용해 다시 박물관을 지을 수 있다. 이는 곧 건축물을 해체하더라도 산업폐기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지난 9월 15일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이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의 80% 이상이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종이, 나무, 컨테이너, 자갈 같은 친근하고 단순한 소재로 웅장하고 훌륭한 공간을 탄생시킨데 대한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박물관 주제음악을 작곡해 관람객에게 트는 일도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위해 박물관에 적합한 스피커를 직접 제작해 설치했다.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은 천장이 높고 종이 기둥이 있어 기둥 사이 사이에 거리를 두고 스피커를 설치했다. 종이 기둥은 반사음을 흡수해 관람객에게 더 좋은 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
353개의 거대한 종이 기둥이 서 있고, 166개의 컨테이너가 튼튼한 벽과 지붕이 되는 건물.
상상불가의 이 건물은 꿈이 아니다. 환상도 아니다. 올해 마지막 날까지 오아시스처럼 존재하게 될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에 오면 그 과학적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종이 건축의 일인자 시게루 반
시게루 반은 세계 건축계의 시인이자 조용한 혁명가다. 겸손하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지구를 구원하는 구원자이기도 하다. 종이와 컨테이너. 도무지 건축 재료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물건도 시게루 반의 손을 거치면 훌륭한 건축 재료로 탈바꿈한다.
시게루 반이 종이를 건축 재료로 쓸 수 있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둘둘 말린 필름 뭉치를 보면서였다. 둘둘 말린 필름은 두루마리 종이와 같은 모양이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시게루 반은 1986년 두루마리 종이, 즉 종이 기둥을 건축물에 처음 적용했다.
그는 일본 고베시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1985년의 대지진으로 고통 받던 사람들을 위해 ‘종이 통나무집’(Paper Loghouse)과 ‘종이 교회’(Paper Church)를 설계하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건설했다. 당시 시게루 반은 아무리 설명해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보한 나무’라는 말까지 만들며 종이 기둥을 설명해야 했다.
종이 교회는 지진으로 화재가 난 타카토리 교회 자리에 들어섰다. 교회를 설계하고 짓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게루 반은 이전 프로젝트를 통해 발전을 거듭한 종이 기둥의 뼈대를 사용했다.
자재는 여러 기업에서 기부받았다. 16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종이 교회는 5주 만에 완공됐다. 그는 1997년 광주비엔날레에 자신이 가르치는 게이오대 학생들과 함께 만든 ‘고베 지진 텐트’를 출품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종이 통나무집은 맥주 박스(기린 맥주회사에서 기증)를 바닥 기초로 사용하고 그 위에 오두막집을 짓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벽채는 종이 기둥으로 만들었으며, 천장과 지붕에는 천막을 쳤다.
시게루 반의 종이 기둥 건축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 누구라도 쉽게 건설할 수 있어야 하고, 충분히 단열이 되면서, 외관도 마음에 들어야 한다. 또 추후 재활용할 수 있고, 비용도 저렴해야 한다. 고베시에 종이 통나무집과 종이 교회를 건설한 뒤 그는 터키의 재난 지역, 르완다의 빈민촌 주택, 쓰나미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 지역 등 재난을 당한 지역을 찾아가 종이 기둥으로 집을 지어줬다. 이때도 그의 건축 원칙이 철저히 적용됐다.
터키에서는 단열효과를 높였으며 현지의 생활방식과 날씨를 고려해 바닥 면적을 넓혔다. 인도에서 통나무집을 지을 때는 파괴된 건물의 잔해를 이용해 진흙 바닥의 기초를 만들었다. 대나무를 쪼개 천장 서까래로, 통대나무를 들보로 사용했다. 천장은 대나무와 방수천으로 만든 이중 매트로 덮었다.
그의 종이 기둥 집은 만들고 허물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썼던 재료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 사용할 수 있어 ‘자연주의’에 충실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현재 그는 ‘시게루 반 건축설계’ 대표이자 게이오대 환경정보학부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