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만났다. 수천억원 상당의 사업계약을 진행하기 위해 만났지만 007가방은 물론 계약서도 보이지 않는다. 악수도 나눴지만 명함 한 장 교환하지 않았다. 왜일까? 그들이 악수를 나눌 때 이미 피부를 통해 서로에게 전자명함이 전달됐다. 또 두 사람이 쓴 안경에는 전자명함에 담긴 정보가 자동으로 나타나고, 필요한 서류도 악수를 나눌 때 상대방에게 전송됐다.
모든 것을 칩 하나에
이것은 유비쿼터스 사회를 가상으로 그린 것이지만 그리 먼 미래의 이야기는 아니다. KAIST 전자전산학과 반도체시스템연구실의 유회준 교수는 “안경처럼 쓰고, 손목에 차거나 허리에 두르는 ‘입는 컴퓨터’(wearable computer)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컴퓨터는 사용법을 배운 사람만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래에는 그냥 옷을 입듯 누구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인간친화적인 컴퓨터’가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1998년 영국 레딩대 케빈 워릭 교수는 자신의 팔에 전자칩을 이식해 스스로 ‘사이보그’가 됐다. 이후 그가 건물에 들어서면 컴퓨터가 켜지고 모니터에는 자신의 홈페이지 창이 저절로 열렸다. 일반인은 아직 접해보지 못한 ‘유비쿼터스 세상’이지만 유 교수는 그것을 “장난감 수준”이라고 말한다. 몸 안에 넣는 칩의 성능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우선은 머리와 손, 몸 사이에 전선을 주렁주렁 걸치지 않고도 전기 신호를 기기로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즉 입는 컴퓨터가 실용화되려면 현재 데스크탑 수준의 전기기판이나 메모리, 전자칩 등이 훨씬 작아져야 한다. 컴퓨터의 성능이 우수해도 무게가 많이 나가면 옷에 붙이거나 몸에 넣기 어렵다.
유 교수는 하나의 칩에 모든 기능을 담는 ‘시스템온칩’(SoC, System-on-a-Chip) 기술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2003년 개발한 휴대전화용 3차원 게임칩 ‘RAMP(RAM+Procesor)-Ⅳ’는 손톱만한 크기(11x11mm)지만 3차원 그래픽 기술과 메모리, 중앙처리장치(CPU), 아날로그 저전력제어기 등을 모두 담았다. 기존에는 휴대전화로 TV를 시청할 경우 2시간이면 전원이 바닥났지만 이 칩을 이용하면 TV보다 에너지 소모가 큰 게임을 하더라도 4시간은 사용할 수 있다. 분산된 장치를 통합해 전력소모를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칩의 크기를 줄이고 전력효율을 높였지만 입는 컴퓨터로 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유 교수는 “입는 컴퓨터는 크게 3가지 발전 단계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1단계는 옷 주머니에 컴퓨터를 얇게 넣는 것이다. 2단계는 전선과 칩을 옷감과 함께 직조하는 수준이다. 3단계는 섬유 자체를 전류가 통하게 제어할 수 있는 반도체로 만든다. 즉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야 입는 컴퓨터가 피부처럼 느껴질 수 있다. 현재의 기술은 아직 1단계다.
몸으로 주고 받는 인체통신기술
연구팀은 올해 2월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에서 전선 대신 사람의 몸을 이용해 고속으로 MP3 파일을 전송하는 ‘인체통신기술’을 발표했다. 몸 안에 전류가 흐르면 위험하지만 인체를 매질로 전파를 전송하는 것은 감전의 우려가 없다. 기지국에서 휴대전화에 전파를 쏴도 공기 중에 전류가 흐르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또 사람과 사람이 맨손으로 접촉만 해도 기기에 저장돼 있던 데이터를 다른 기기로 옮길 수 있다.
유 교수의 목표는 단순히 입는 컴퓨터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인간중심의 시스템을 위한 칩’ 그리고 ‘지능형 유비쿼터스 시스템’의 설계다. 한마디로 사용자의 의도를 알아내고 사용자의 편의를 배려하는 ‘똘똘한 칩’을 만드는 것이다. 현재 반도체시스템 연구실에는 박사후 연구원 1명과 박사과정 10명, 석사과정 6명의 학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