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집안에서 냉장고, 에어컨, 텔레비전, 컴퓨터 등 가전제품이 있는 장소는 다른 곳보다 더 덥다. 가전제품이 작동하는데 필요한 전기에너지의 일부가 열에너지로 바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릎에 노트북 컴퓨터를 놓고 작업을 하다보면 컴퓨터에서 나오는 열기가 점차 무릎에 전해진다. 이 열은 전기에너지의 손실이다. 가전제품은 효율이 높을수록 열이 적게 발생한다.
그렇다면 열로 인한 손실 없이 전류가 흐를 수 있는 물체는 없을까. 바로 20세기 초 처음 발견된 초전도체다. 초전도체는 특정 온도 이하에서 열의 원인인 전기저항이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 놀라운 물질은 손바닥만한 슈퍼컴퓨터, 초고속 자기부상열차, 휴대용 심장진단장비 등에 쓰일 수 있다.
하지만 발견 당시에 초전도 현상은 영하 270℃ 근처의 매우 낮은 온도에서만 나타나 어려움이 많았다. 그뒤 과학자들은 영하 248℃보다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 현상이 나타나는 고온 초전도체를 개발하려고 노력해왔다. 포항공대 물리학과 이성익 교수가 이끄는 초전도연구단에서는 우리 힘으로 이붕소마그네슘(MgB₂)이라는 새로운 초전도체의 박막과 결정을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새로운 신비 풀어낸 BCS 이론
1911년 네덜란드의 오네스가 영하 269℃의 수은에서 전기저항이 사라지는 초전도 현상을 발견했지만 40년 이상 아무도 이 현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슈뢰딩거, 디랙, 파울리 등 당시의 세계적 천재들도 못 풀었다. 물리학에서 초전도 현상은 새로운 신비였다.
이 신비는 1957년 미국의 물리학자 바딘, 쿠퍼, 그리고 슈리퍼가 자신들의 이름 첫글자를 따서 붙인 BCS이론으로 풀어냈다. 보통 도체의 경우 제멋대로 운동하는 자유전자는 서로 충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전기저항이 생긴다. 하지만 절대온도 0K(영하 273℃) 부근에서는 모든 전자들이 둘씩 쌍(쿠퍼쌍)을 이룬 채 움직여 저항이 사라지는 초전도 현상이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BCS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전도체가 등장했다. 과학자들은 영하 248℃보다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 현상을 나타내는 물질을 속속 개발했다. 이른바 고온 초전도체이다. 아직까지 과학자들은 어떤 물질이 예상보다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 현상을 보이는지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초전도연구단이 제작한 이붕소마그네슘은 영하 234℃에서 전기저항이 없어진다. 이 교수는 “전류를 많이 흘릴 수 있는 게 이붕소마그네슘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초전도체에 전류를 많이 흘릴 수 있으면 강력한 자석을 만들어 센 자기장을 생성시킬 수 있다.
연구단은 또 이붕소마그네슘에 성질이 서로 다른 쿠퍼쌍 2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 이 교수는 “초전도체에서 새로 발견된 이 현상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초전도체의 새로운 신비를 푸는데 도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 부산 40 분 만에 주파
저항이 없는 초전도체를 전선으로 만들면 대용량의 전기를 멀리 송전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지름 1cm인 이붕소마그네슘 초전도전선은 한 가닥이면 하루 동안 서울 시내에서 쓰는 전류를 보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초전도체로 만든 슈퍼컴퓨터는 발생하는 열을 냉각하는 장비가 필요 없어 손바닥 크기로 작아질 수 있다.
초전도체는 주위에 자석이 있을 때 자석에서 나오는 자기장도 밀쳐낸다. 작은 영구자석이 초전도체 위에 붕 뜨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다. 또 초전도체 도선으로 전자석을 만들면 보통 자석보다 수천 배 강한 자석을 만들 수 있어 초전도 자기부상열차가 가능하다. 열차는 바닥의 초전도 전자석이 레일에 깔려 있는 전자석을 밀어내기 때문에 공중에 떠서 시속 550km로 나아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직선거리로 40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KTX가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바꿔놓은 데서 한 걸음 더 나가는 교통혁명이 일어나는 셈이다.
초전도체는 이미 실생활에서 만날 수 있다. 병원에서 신체 내부를 촬영해 질병을 진단하는 MRI(자기공명영상장치)가 초전도체를 이용한 장비다. 초전도 전선에 강한 전류를 흘려 만든 강력한 전자석을 이용하면 뇌에 상처를 내지 않고도 뇌의 내부구조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 MRI는 뇌, 근육 등 X선으로 잘 안 나타나는 부위를 영상으로 찍어 선명하게 보여주는 게 장점이다.
초전도체의 응용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초전도 특수장치를 이용하면 하루 동안 서울에서 사용하는 전기를 저장할 수 있고, 바닷물에 자기장을 걸어주고 전류를 흘리면 바닷물이 뒤로 밀려나 스크루 없이 전진하는 잠수함도 가능하다.
초전도체 박막 최초 개발
초전도연구단은 2001년 이붕소마그네슘 박막을 최초로 만들어 미국의 ‘사이언스’에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반도체 박막이 반도체 소자를 만드는데 중요하듯이 초전도 박막은 초전도 소자를 제작하는데 필수재료다. 이 교수는 “초전도 박막을 무선통신용으로 활용할 계획”이라며 “일반 전화보다 100배 높은 주파수 영역에서 무선통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입자수를 100배 늘릴 수 있고 직진성이 좋아 신호처리 속도가 100배 이상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인체의 미세한 자기장을 측정해 심장마비 여부를 즉시 알아낼 수 있는 휴대용 진단장비를 개발하는데 관심이 많다. 그는 “현재 심장마비를 제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며 “휴대용 심장진단장비가 개발되면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단은 스트론튬과 란탄이 포함된 구리산화층을 연속적으로 붙인 초전도체 단일상(다른 불순물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깨끗한 상태)을 최초로 개발했다. 보통 고온 초전도체가 양전하를 가진 ‘양공’(hole)으로 구성된데 비해 연구단이 개발한 초전도체는 음전하를 띠는 전자로 구성된 점이 특징이다. 이 물질은 영하 230℃에서 초전도 현상을 일으킨다.
초전도체가 바꿀 미래는 상상을 초월한다. 머지않아 초전도체 덕분에 서울 시내 전기를 전선 한 가닥으로 송전하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40분 만에 주파하며 지금보다 100배 이상 빠른 무선통신이 가능하지 않을까. 초전도연구단은 이 즐거운 상상에 커다란 획을 그을 것이다.
10년 만에 세계 선두그룹으로-이성익 교수
“심오한 이론적 배경을 담고 있으면서 새로운 것이 숨어 있어요.” 이성익 교수가 말하는 초전도의 매력이다. 그는 1987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고온 초전도체를 발견한 그룹에 박사후연구원으로 참여하면서 초전도에 빠지게 됐다.
이 교수는 귀국한 뒤 한국의 초전도 연구그룹을 ‘창립’했다. 그는 1987년 포항공대 물리학과 교수로 임용됐으며 1997년부터 창의적 연구진흥사업단인 초전도연구단의 단장을 맡았다. 초전도연구단은 9년간 매년 6, 7억원을 지원받으며 순수 국내 기술로 초전도 불모지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이 교수는 “10년 전 무명이던 우리 연구단이 이제 세계 초전도 연구분야에서 선두 그룹이 됐다”고 자랑했다. 그는 올해 초전도 분야의 업적으로 제10회 한국과학상을 받았으며, 지난 7월 10일~14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초전도학회(M²S-HTSC)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이붕소마그네슘에 대한 초청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 교수팀은 특히 세계 최초로 이붕소마그네슘의 박막과 결정을 제조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박막 제조장치와 초고압 신물질 제조장치도 함께 개발했다. 어떤 물질의 초전도 성질을 알려면 그 물질의 순수한 결정이 필요하다.
연구단은 스위스, 일본과 함께 이붕소마그네슘 결정을 만들 수 있는 세계 3대 그룹 중 하나다. 이 교수는 “스트론튬과 란탄이 포함된 구리산화층을 연속적으로 붙인 초전도체 단일상은 우리 연구단만 제조할 수 있다”며 “우리만의 시료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창의단이 설립된 이래 그동안 초전도와 관련된 연구성과로 ‘사이언스’에 1편,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15편, ‘어플라이드 피직스 레터스’에 7편 등이 발표됐다. 이 교수는 “최근 5년간 발표한 대표적 논문 10편은 편당 인용횟수가 90회에 이를 것”이라며 “특히 사이언스 논문은 인용횟수가 300회 가량 된다”고 말했다.
초전도연구단은 올해 6월부터 2단계에 진입한 5개 사업단 가운데 하나로 뽑혔다. 앞으로 5년간 매년 5억원 가량의 지원을 받는다. 이 교수는 “초전도 연구와 관련된 장비가 효율적으로 설치돼 운용 중”이라며 “이 장비를 충분히 활용해 개발된 초전도체의 성질을 확인하고 그 응용 가능성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초전도체의 기업화를 위해 기업과 함께 노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에도 초전도 전선을 만드는 회사가 건립됐다. 한국에 초전도산업이 태동할 시기도 머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