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로 위협적인 전염병을 막을 수 있을까? 지난 2003년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세계를 위협했을 때 ‘김치가 사스를 막는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난해 3월 한 국내 전자회사는 김치 추출물을 필터에 추가해 조류 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를 막는 에어컨을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물론 김치는 좋은 식품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다. 김치가 면역 기능을 높여줄 수는 있지만, 외부의 병원체와 직접 싸우는 것은 우리 몸의 면역계다. 조류 인플루엔자나 구제역 병원체가 우리나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면 검역 과정이 필수다.
소독약 뿌린 카펫이 구제역 예방
검역은 사람과 동식물에 병원체나 유해균이 없는지 검사하고 격리시켜 국내 생태계와 국민 건강을 지킨다는 점에서 면역계와 비슷하다. 많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여름철, 대한민국 면역계의 최전선에 있는 인천국제공항은 과연 제 기능을 다하고 있을까.
공항에 도착한 기자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하 검역원)에서 발급받은 임시 출입증과 표찰을 목에 걸고 출국심사대를 벗어나 잠깐 ‘출국’했다. 승객들이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가장 먼저 찾았다.
한국에 도착한 승객들을 환영하는 듯 붉은 카펫이 깔려 있다. 하지만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승객들의 신발을 소독하기 위한 도구다. 외국에서 축사나 도축장 등을 방문했다 입국한 승객들의 신발에 묻은 흙에 전염병을 일으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소독약을 뿌린 카펫 위로 걸으면 구제역, 조류 인플루엔자, 돼지 콜레라, 브루셀라 병원체 등이 대부분 소독된다. 소독약에 든 황산칼륨, 인산나트륨 등의 무기염 성분이 산화제로 작용해 바이러스와 세균의 세포막을 공격하고, 구연산, 사과산 등의 유기산 성분이 산성도를 낮춰 병원체를 죽인다.
소독약은 카펫의 처음 부분과 6~7 발자국 떨어진 가운데 부분에만 뿌려져 있다. 신발이 소독약에 젖어 바닥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소독 효과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2시간 마다 소독약을 계속 뿌린다. 인천국제공항을 비롯해 국내 공항, 항구 등 전국 230여 곳에 이런 소독 카펫이 있다.
외국에서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다. 프랑스에서는 소독약을 뿌린 카펫을 쓰는 한편 외국에서 들어오는 차량의 타이어에도 소독약을 뿌리고 있다. 소독약을 섞은 건초 더미 위로 자동차를 지나가게 하는 방법도 쓴다. 사람 신발 뿐 아니라 ‘자동차 신발’에도 병원체가 묻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든든한 ‘몰래 검역’
입국장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검역은 우리가 모르는 새 진행된다. 먼저 복도에 설치된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해 입국하는 승객들의 체열을 조사한다. 사스나 콜레라 같은 전염병에 걸리면 신체는 외부의 병원체와 싸우는 과정에서 많은 열을 낸다. 이 점을 이용하면 질병 여부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발열 의심 환자로 판단되면 혈액 검사나 면봉으로 상피조직을 채취해 바이러스를 확인하는 등 추가 정밀 검사를 받게 된다.
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짐을 찾은 뒤엔 반입이 금지된 식품을 갖고 있는지 확인한다. 모든 승객을 대상으로 X선 카메라나 탐지견을 이용해 찾아낸다.
고기나 유제품 등 동물성 식품은 국내로 반입할 수 있는 품목이 제한돼 있다. 통조림, 병조림, 레토르트 식품, 유가공품 중 멸균, 살균, 발효처리된 것만 국내로 반입이 허가된다. 이런 규정이 필요한 이유는 외국에서 들어오는 전염병 가운데 사람들이 들고 오는 고기에 묻어 유입되는 경우가 매년 약 16%나 되기 때문이다. 식물류 역시 대부분의 과일과 과수묘목, 분재, 흙이 묻어있는 식물 등은 금지 품목이다.
장조림? 안 됩니다
가져온 식품이 있다면 여행자 휴대품 신고서에 자진 신고하자. 세관에서는 무작위 검사를 실시해 신고하지 않은 금지 품목을 적발하면 최고 500만원까지 벌금을 물린다. 물론 벌금은 안 내는 게 제일 좋다. 검역원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진 신고를 권하고 있다. 수하물을 찾는 회전식 레인마다 주인 없는 빈 여행용 가방이 하나씩 있다. 검역원이 승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홍보물을 부착한 가방이다.
오후 4시경, 방글라데시인 여행객 부부가 X선 검사에서 걸렸다. 가방 안에서 포장육처럼 보이는 물건이 발견됐다. 방글라데시는 구제역 발생국이다. 이곳에서 가져온 육류는 캔이나 살균 처리한 제품을 제외한 전 품목이 반입 금지 대상이다. 대기하던 검역 요원이 ‘동물 검역 대상’이란 뜻의 오렌지색 표찰을 가방에 붙이고 부부를 검사대로 안내한다.
“고기는 반입이 안 됩니다.”
“내 고기 아무 해 없어요, 켄차나요.”
“미안합니다. 규정이에요. 그리고 유제품도 안 돼요.”
짐을 하나씩 풀어보던 검역관들이 반입 금지된 식품을 한 보따리 발견했다. 옆에서 보던 검역원 김명수 과장이 “모두 압수 대상”이라고 설명한다. 이 식품들은 검역소 냉동 창고에 보관하다 매주 2번 소각장으로 싣고 가 한꺼번에 폐기 처리한다.
때로는 X선 카메라보다 탐지견이 더 미덥다. 엄격한 훈련을 거쳐 X선 검사에서 잡아내지 못한 축산물까지 찾아낸다.
4시 10분경, 중국 장춘에서 도착한 승객들이 입국해 짐을 찾고 있다. 탐지견 ‘빌리’가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다 한 승객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서더니 그 자리에 앉는다. 고기 냄새를 맡았다는 뜻이다. 역시 검역요원이 오렌지색 표찰을 붙이고 짐을 든 조선족 여인을 검사대로 안내한다.
가방 안에서는 비닐봉지로 포장한 쇠고기 장조림이 발견됐다. 물론 들여올 수 없다. 안타깝지만 역시 압수 처리된다. 김명수 과장은 “탐지견들은 스팸처럼 캔 안에 밀봉된 고기 냄새까지 맡고 잡아낸다”고 설명한다.
현재 26마리의 탐지견이 검역장을 누비고 있다. 1시간 쯤 일을 시킨 뒤엔 후각의 피로를 덜어주기 위해 2~3시간 정도 휴식시간을 준다.
구제역 청정국, 비결은 검역
검역원 안에는 압수된 육류를 보관하는 냉동 창고가 있다. 안을 열어보니 몽골에서 가져온 삶은 고기, 유럽산 햄과 소시지, 중국산 장조림, 미국산 육포 등 대부분 고기 종류다. 김 과장은 “올해 4월까지 7800여건, 20톤이 넘는 육류를 소각했다”고 설명했다.
중국, 몽골 등 주변국들이 계속 구제역과 조류 인플루엔자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이 소동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다. 김치의 공도 크겠지만, 과학적 검역 시스템을 탄탄하게 갖춘 덕분이다. 검역관들은 “당장 성과가 드러나지는 않아도 전염병 피해에서 우리나라가 안전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가축 질병과 검역
구제역(foot-and-mouth disease)이란 소, 돼지, 염소 등의 입과 발굽 주변에 물집이 생기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동물의 배설물이나 공기를 통해 전염되지만 아직까지 사람에 감염된 사례는 없다. 구제역은 치사율이 절반을 넘을 때도 있어 중요한 검역 사항이다. 지난 2000년, 2002년엔 구제역 피해액이 각각 3000억원, 1500억원을 넘었다. 간접 피해액을 합치면 2조원이 넘는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검역 과정에서 구제역이 의심되는 오염물질과 식품을 모두 가려낸 덕분에 지금은 피해사례가 하나도 없다. 2003년부터 1조원 가까운 손실을 입힌 조류 인플루엔자도 2004년 3월 이후 국내에서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