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전자가 연출하는 은은한 광택
아름다운 백색의 광택을 가진 은. 현대 생활공간에서 흔히 보는 철(스테인리스 스틸)이 갖는 차가운 느낌에 비하면 은은 따뜻하고 귀족적인 품위를 발산한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전통적으로 은으로 만든 식탁용구(cutlery, 포크, 나이프 등을 총칭)와 식기(食器)를 귀히 여겼다.
물체가 색을 띠는 것은 그 색에 해당하는 파장의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은을 포함한 대부분의 금속은 원자 안에 있는 자유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여러 파장의 빛을 흡수했다가 다시 방출하는데 이때 여러 가지 색깔이 섞이면서 백색 광택을 나타낸다.
은은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고대 유적에서 발견될 만큼 인류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다. 16세기 들어 남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방대한 양의 은이 유입되면서 은을 사용한 공예품 제작이 활발해졌다.
원소기호 ‘Ag’인 은은 라틴어 ‘argentum’에서 따온 것으로 프랑스어 ‘argent’도 여기서 유래했다. 영어의 ‘silver’도 은을 뜻하는 아시리아어 ‘sarpu’에서 온 말이다.
전 세계에 매장된 은은 27만톤이고 폴란드가 5만1000톤으로 가장 많다. 그 뒤로 멕시코가 3만7000톤이다. 하지만 연간 생산량은 멕시코가 2852톤으로 1위다. 우리나라에 매장된 은은 약 7152톤. 은은 주로 귀금속으로 사용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산업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2004년 한해 전 세계에서 1만400톤이 산업용으로 사용됐는데 이 중 전자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손목시계 전원용 산화은전지, 스위치, 전자회로의 연결회로, 자동차 뒤 유리의 성에 제거용 열선 등에 쓰인다.
1g 으로 1800m 늘인다
귀금속의 하나인 은은 양이 제한돼 있어 가격이 비싸다. 은을 작은 크기의 정교한 공예품에 사용하는 이유다. 서양에서는 은을 다루는 작가를 ‘실버스미스’(silversmith)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현대에 와서 ‘금속공예가’(metalsmith)와 같은 뜻으로 통용된다.
은은 금속 공예가가 가장 선호하는 재료 중 하나다. 모든 금속 중에서 가공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굳기(단단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철보다 부드럽지만 알루미늄이나 구리보다는 단단하기 때문에 가공하기에 좋고 마모되지도 않아 단단한 형태를 유지한다.
은은 두께 0.3㎛의 은박으로 만들 수 있으며, 1g의 은으로 1800m의 선을 뽑을 수 있다. 이것은 금속 중 금 다음으로 연성이 큰 것이다. 이렇게 전성과 연성이 뛰어난 까닭은 은 원자들이 금속결합을 하기 때문이다.
금속 결합은 금속 원자들이 서로 잡아당겨 금속 결정을 이루는 화학결합이다. 금속 결정에서는 금속의 양이온이 결정격자의 한 곳에 자리잡고 최외각 전자(자유전자)가 격자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결정을 결합시킨다.
외부에서 힘을 줘서 늘리거나 펴는 경우에도 결정격자에 있는 이온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다. 또 이온들 사이에 자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이온들 사이의 반발력이 생기지 않아 쪼개지지 않고 쉽게 펴지고 늘어난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순은은 순금처럼 너무 무르기 때문에 모양이 찌그러지기 쉽다. 또 표면 광택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이런 단점을 보완한 것이 은 92.5%, 구리 7.25%를 섞은 스털링실버(sterling silver)다. 우리말로 정은(正銀)인 스털링실버는 단단하면서 가공성이 좋아 금속 공예가들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재료다.
12세기 경 독일의 이스털링(Esterling) 지역에서 유래한 92.5% 은합금은 유럽지역에서 은제 식탁 용구 재료로 애용됐다. 스털링실버 외에 95%의 은도 금속공예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그밖에 은은 치과용 합금으로 사용되는 은-팔라듐 합금을 비롯해 용접재료로 쓰는 은과 구리, 아연, 카드뮴 합금도 있다.
가공이 끝난 은은 아름답고 품위 있는 색과 광택을 발산할 뿐 아니라 철이나 구리처럼 공기나 습기에 쉽게 녹슬지 않는 장점도 있다. 은은 전자 하나를 잃어버리는데 에너지가 많이 들어 쉽게 산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도 색깔이 변하는 경우가 생긴다. 은수저를 계란 노른자에 대면 색이 변하는데 이것은 노른자의 황 성분 때문이다.
은은 산성 수용액이 있을 때 황과 쉽게 결합한다. 예를 들어 연탄가스가 발생하는 집의 은수저가 검게 변하는 것은 연탄가스에 포함돼 있는 황화수소(H2S)가 공기를 산성으로 만들면 은이 산화돼 황화은(Ag2S)을 만들어 검게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색은 표면이 부식되거나 상하는 것이 아니므로 닦아주기만 하면 쉽게 원상복구 된다.
은은 화학적으로 안정해 부식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금속 중에서 전기저항이 가장 낮고 쉽게 마모되지 않아 스위치에 사용한다. 컴퓨터 키보드나 리모컨 버튼의 뒷면에는 은 분말이 들어있는 멤브레인 스위치가 있다. 탄소분말과 은 분말이 혼합된 은 페이스트 필름으로 구성된 리모컨을 누르면 두 판이 서로 접촉하면서 전류가 흐른다. 이런 스위치는 전류를 적게 소모하면서 2000만번 이상 작동할 수 있다.
조합과 주조로 탄생
은 재료를 가공하는 방식은 크게 조합방식과 주조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조합(fabrication)은 금속판을 부분적으로 붙여가면서 형태를 만드는 것이고, 주조는 미리 만든 형틀(거푸집)에 쇳물을 녹여 부어 하나의 형태를 만드는 방식이다. 전자는 작품 하나를 만드는 경우에, 후자는 대량생산에 사용한다.
조합방식에서 각 부분의 형태를 만드는데도 여러 기법이 있다. 금속의 일부분을 서로 붙여주는 방법으로는 가스연료를 사용하는 땜(soldering)과 용접(welding)이 있다. 은 재료끼리는 은의 표면을 녹여 서로 붙이는 용접을 사용하고, 은과 다른 재료를 붙일 때는 재료가 녹기 직전까지 가열해 재료 각각의 표면 결정을 붙이는 땜 방법을 이용한다.
전해주조는 은공예에서 특히 많이 사용한다. 전해주조는 금속이 전기분해되는 성질을 이용한 기법으로 도금(鍍金, eletroplating)과 같은 원리다. 하나의 형태 위에 금속의 얇은 막을 입히는 것이 도금이라면, 전해주조는 금속을 두껍게 입히는 것이다. 전해주조는 거의 모든 종류의 모델에 적용할 수 있다. 전해주조가 끝난 후 원래 모델은 금속형태에서 빼낼 수도 있다. 이 기법은 19세기 중엽 개발된 이래 20세기 장신구 산업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