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까 말까, 할까 말까.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을 대신해 관객이 직접 결정을 내린다. 결정에 따라 이야기 전개가 달라지는 영화판 ‘인생극장’이다. 하지만 재미가 없다. 선택을 하는 순간 우리는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이미 절반은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떨까.
공포영화의 한 장면. 숨이 멎는다. 머리카락이 곧추서고, 두 손엔 불끈 힘이 들어간다. 손에 있던 리모컨 센서가 이런 신체반응을 감지한다. 관객이 무서운 장면에서 너무 놀라면 영화는 남녀의 사랑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반대로 관객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영화는 점점 더 잔인하고 무서워진다. 관객의 심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 전개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미디어 및 콘텐츠 연구실의 임창영 교수팀이 그리는 미래형 인터랙티브 영화다.
오감만족 체험동화책
임 교수 연구팀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설계한다. 그러나 연구팀의 목표는 기술개발이 아니다. 기술을 활용한 획기적인 미래형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연구팀이 요즘 개발하고 있는 ‘체험 동화책’(Tangible Inter-active Story Book)이 좋은 예다. 체험 동화책은 기존의 동화책과 캐릭터 인형, 인형을 가지고 놀 수 있는 플레이 보드, 그리고 동화의 배경화면이 입력된 CD롬을 하나로 묶은 에듀테인먼트 상품이다.
아이들은 동화책을 읽은 뒤 그 내용을 컴퓨터 화면 속에서 재현해 볼 수 있다. CD에서 배경화면을 선택한 다음 캐릭터 인형을 플레이 보드 위에서 움직이면 된다. 플레이 보드는 인형의 움직임을 추적해 인형을 컴퓨터 화면에 있는 동화 속 배경화면으로 옮기는 장치다. 아이들이 어떤 화면에서 어떤 인형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줄거리도 바꿀 수 있다.
임 교수는 시각 이미지에만 국한돼 있던 책을 오감을 이용한 체감형 미디어로 변형했다. 획기적인 상품이지만 새로울 것 없는 기술들이 사용됐다.
관건은 아이디어다. 그래서 임 교수는 ‘문화가 있는 과학’을 강조한다.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은 문화콘텐츠기 때문이다. 임 교수의 ‘아이디어’는 명확하다. 볼 수 있는 것이면 만질 수도 있어야 한다. 들을 수 있는 것이면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도 ‘체험 가능한 기술’을 강조한다.
지난 학기에는 석사과정 학생들이 ‘만담 인형’을 만들었다. 정식명칭이 ‘디지털 토이’(Digital Toy)인 만담 인형은 대화하는 작은 로봇이다. 디지털 토이는 컴퓨터에 연결돼 있는데 ‘겨울’이란 주제어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아이, 왜 이렇게 춥니?” “겨울이니까 춥지.” “겨울은 항상 춥기만 하니?”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아직은 컴퓨터에 연결된 인형끼리만 대화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교감형 로봇을 만드는 것이 연구팀의 목표다.
사계절과 낮과 밤 연출하는 거실 벽면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임 교수는 2002년 세계 최대 게임전시회인 E3에 소형 ‘게임라이더’를 출품했다. 방석처럼 깔고 앉는 이 게임보조기는 방석만큼 작지만 대형 자동차 경주용 게임기의 움직임을 그대로 전달한다. 연구팀은 손에 쥐기만 하면 혈압, 혈당 등을 측정해 병원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원격의료진단기기’도 개발했다.
지금까지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으로는 ‘사이버 가든’이 있다. 창문이 없는 아파트 벽면에서는 프로젝터에서 뿜어나온 풍경이 사시사철, 낮과 밤의 시간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이 화면에 가까이 다가서면 화면 주변에 설치된 센서가 작동해 매미는 울음을 그치고 물속을 노닐던 물고기 떼도 흩어진다.
임 교수는 “새로운 발상으로 만들어진 미래형 미디어 작품이 많다는 것이 연구실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연구실에는 현재 2명이 박사과정을, 12명이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