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서는 나를 ‘미스터 코리아’(Mr. Korea)라고 부릅니다.”
스위스의 명문 로잔공대(EPFL)의 얀 안데스 만손 교수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그의 아내는 한국계 미국인. 덕분에 한국 여성의 파워를 실감하고 있다며 농담도 던진다.
만손 교수의 한국 사랑은 아내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스위스와 한국의 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국토 면적이 작고 천연 자원이 부족해 교육과 연구 분야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집중해왔다. 이 점은 한국도 마찬가지. 그러나 아직까지 유럽에서는 아시아로 진출하는 관문으로 중국이나 인도를 점찍은 나라들이 많다.
“유럽은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한국을 선택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과 유럽은 산업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과제에 당면해 있기 때문이죠. 세계 여러 기업들의 생산설비가 중국같이 인건비가 싼 나라로 넘어가고 있어요. 따라서 한국이나 유럽은 모두 신물질 개발 같은 기초 연구나 완제품 제조 같은 기술 혁신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만손 교수는 최근 한국과의 과학기술 협력에 발 벗고 나섰다.
만손 교수는 현재 한국의 과학기술부와 스위스의 과학기술교육부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한·스위스 과학기술협력’의 스위스측 공식 창구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측 공식 창구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조영호 교수가 맡고 있다.
두 나라는 지난 1995년 첫 회의 개최 이후 상호 관심 분야의 협력 방안을 계속해서 논의해왔다. 특히 나노, 바이오, IT 기술 분야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새로운 융합 연구 프로젝트를 발굴해낸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같은 계획을 위한 실무회의인 ‘제5차 한·스위스 과학기술 라운드테이블’이 오는 4월 4~6일 서울에서 열린다. 이에 따라 만손 교수를 비롯한 스위스의 과학기술 전문가 9명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2011년 사이언스 시티 완공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립국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과학기술 분야에도 여러 나라들에게 제한 없이 문을 열어 놓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취리히공대(ETH). 1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취리히공대는 교수진의 60% 이상, 학생의 25% 이상이 외국인이다. 현재 다른 나라와 함께 진행되고 있는 연구 프로젝트가 자그마치 8000건에 달한다.
취리히공대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바텀-업’(bottom-up) 방식으로 수많은 연구 프로젝트를 총괄한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연구자들이 여러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학교가 이를 모아 하나의 큰 주제를 가진 연구과제로 통합한다. 구체화된 연구과제에 재정을 지원하는 것은 연방정부의 몫.
최근 취리히공대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학교에서 약 8km 떨어진 홍게르베르그 지역에 전체 면적 60만~70만m2의 ‘사이언스 시티’(Science City)가 들어서고 있는 것. 취리히공대가 야심차게 준비 중인 이 제2의 캠퍼스에는 생명과학, 정보과학, 건축공학 분야를 중심으로 학교 건물뿐 아니라 연구시설과 기업들이 들어올 예정이다. 여기서는 24시간 자유롭게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다.
결국 사이언스 시티는 KAIST를 비롯한 여러 연구소들이 모여 있는 한국의 대덕연구단지와 비슷할 것 같다.
“대덕연구단지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과학기술 관련 기관이 집중돼 있는 점은 사이언스 시티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시티는 ‘사고(思考) 문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취리히공대 게르하르트 슈미트 부총장의 설명이다. 사이언스 시티에는 기숙사와 아파트, 편의시설, 오락시설도 마련돼 연구진뿐 아니라 일반 주민도 살 수 있는 주거공간으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그리고 주민들이 연구소 안으로 들어와 과학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문의나 제안을 할 수 있게 된다. 즉 연구진과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과학기술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포부다.
사이언스 시티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고, 기업의 생산설비가 들어오지 못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시도다. 단 기업의 기초연구실이나 응용설비는 수용할 수 있다. 취리히공대를 졸업한 어스 홀즐 구글 부회장도 최근 “사무실을 사이언스 시티로 이전할 것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현재 구글의 유럽 본부는 취리히에 있다.
2003년 처음 제안된 사이언스 시티는 오는 2011년 세계의 과학도를 끌어들일 채비를 갖추고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컴퓨터 마우스도 스위스 작품
취리히공대와 함께 스위스 과학기술을 이끄는 양대 축인 로잔공대도 ‘글로벌’ 대학의 면모를 과시한다. 캠퍼스 안에 자그마치 107개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말이다.
로잔공대는 연방정부에서 재원을 받아 연구 결과가 실질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예를 들어 제31회 아메리카컵 요트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알링기 요트가 바로 로잔공대 선박기술의 작품이다.
컴퓨터에 쓰는 마우스를 처음으로 상업화시켜 유명해진 로지테크도 로잔공대 졸업생들이 창업한 회사다. 올해로 창사 25주년을 맞은 로지테크 역시 글로벌 기업이다. 스위스와 미국에서 동시에 창업했고, 생산설비는 중국에 있다. 지난해 7월 완공한 중국 공장에서는 매달 마우스 1200만개를 생산하고 있다.
로지테크는 지금도 로잔공대와 협력 연구를 진행 중이다. 로지테크의 기술매니저인 피에르 샹은 “마우스를 누를 때 나는 소리를 소비자의 입맛에 맞게 만드는 연구가 한 예”라며 “소비자들은 이 소리에 대한 느낌으로 마우스의 품질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학교뿐 아니라 스위스의 여러 연구소에도 다양한 국적을 가진 과학자들이 모인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유럽 기초과학의 메카로 불리는 CERN은 기술 이전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다국간 협력을 장려하고 있다. 현재 CERN의 정식 회원국은 유럽만 20개국에 달한다.
그러나 CERN은 한국과는 아직 일부 연구에서만 협력하는 관계에 머물러 있다. 이곳의 여러 연구 프로젝트 중 한국인 과학자가 실제로 참여하는 것은 세계 최대 규모의 고에너지 입자검출기를 만드는 CMS 뿐이다. 그 주인공은 노상률 박사와 김진철 박사. 두 박사는 “한·스위스 협력 이후 과학자들의 교류가 더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 입을 모았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는 지난해 상대성이론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아인슈타인 전시관이 있다. 상대성이론을 발표할 당시 아인슈타인이 베른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2의 아인슈타인을 꿈꾼다면 스위스를 주목하라. 스위스는 이제 한국의 과학도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유럽을 통일하는 볼로냐 계획
스위스는 26개 주로 이뤄진 연방제 국가다. 20년 전만 해도 주마다 학기가 시작하는 달이 다를 정도로 교육제도가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교육제도가 서로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니 유럽으로 가고 싶어하던 유학생들은 어느 나라, 어느 대학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이 어려워 미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각 대학별로 다르게 학생들을 평가하다 보니 심지어 다른 대륙에서 유럽의 졸업장을 인정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바로 ‘볼로냐 개혁’이다. 1994년 유럽 29개국의 고등교육 대표자들이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모여 유럽의 교육체계를 나라마다 비교 가능하게 바꾸자는 선언문에 동의한 것. 그 뒤로 유럽 45개국이 이 개혁에 참가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스위스도 교육체계를 표준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성과가 학점제를 도입해 객관적인 평가 기준을 마련한 것. 또 개혁 전에는 학사 학위가 없는 대학이 많았으나 지금은 많은 대학이 학사, 석사, 박사학위 과정을 갖춰가고 있다.
스위스의 공용어는 4가지다. 인구의 70%는 독일어, 20%는 불어, 9%는 이탈리아어, 나머지 1%는 로망슈어를 쓴다. 언어가 다르니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외국인 학생에게는 이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이제 볼로냐 개혁으로 석사과정 이후부터는 강의가 영어로 진행된다.
스위스대학 학장회의의 수잔 오베르마이어 씨는 “올 가을 신학기에는 최초로 모든 학생들이 볼로냐 개혁으로 개편된 새 교육체계로 입학하게 된다”며 “2011년이면 스위스에는 옛 교육체계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