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미국 뉴욕 경찰은 날로 늘어나는 마약 범죄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결국 경찰 수뇌부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은 ‘마약과의 전쟁’. 수개월에 걸친 경찰의 대대적인 소탕으로 뉴욕의 마약 범죄는 종지부를 찍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얼마 뒤 뉴욕 경찰은 더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소탕 작전으로 마약 유통량이 줄어들면서 마약의 가격 상승을 초래했고 높은 이윤에 눈이 먼 갱단들이 더 대범한 수법의 범죄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결국 마약 관련 범죄는 도시 전체로 번져나갔고 경찰의 야심찬 소탕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첨단 수사기법과 물리력을 동원한 뉴욕 경찰의 초강수가 부메랑이 돼서 돌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사회학자들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분야는 물론 자연과학자들에게까지 화두를 던졌다. 오랜 연구 끝에 연구자들은 ‘복잡계’(complexity)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발 금융쇼크도 나비효과
중국 베이징 하늘을 나는 나비의 날개 짓이 뉴욕에 폭풍우를 몰고 오듯, 누군가 새로 나온 위성DMB폰을 산 것 때문에 TV시장 판도가 바뀔 수 있을까. 언뜻 불가능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전혀 엉뚱한 얘기만도 아니다. 적어도 복잡계 연구자들에겐 그렇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는데만 한정해왔던 복잡계 연구가 최근 기업과 인문학 연구자들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복잡한 기업 환경이나 변화무쌍한 사회를 분석하는 틀로 자연과학의 범주였던 복잡계 이론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과학 외에 복잡계 연구가 가장 활발한 쪽은 경제학과 경영학 분야다.
지난해 초 발생한 ‘한국발’ 국제 금융쇼크는 복잡계 현상의 전형적 사례다. 사태는 2005년 2월 18일 한국은행이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 외환보유고의 투자 대상 통화 다변화 계획을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로이터와 JP모건 등 주요 외신과 투자평가사들이 이 계획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불과 사나흘 사이에 세계 금융시장은 크게 요동쳤다. 한국의 통화 다변화정책이 주요 달러화 보유국인 일본, 중국, 태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전 세계 금융시장으로 타전되면서 달러화 가치가 동반 급락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쌍둥이 적자, 유로화 위상 강화,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고 증대라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한 나라 정책의 미시적 요동이 증폭되면서 금융시장 혼란이라는 거시적 변화를 불러일으킨 전형적인 나비효과 모델로 설명된다.
TV산업의 발전사도 복잡계 현상 가운데 하나다. 1926년 처음 흑백화면 방송이 시작된지 불과 한 세기만에 지금은 DMB방송이니 DTV방송이니 하는 TV홍수 시대가 됐다. 한동안 TV는 흑백TV가 시장을 지배하는 듯 보였지만 컬러TV가 나오고 컬러방송시간이 늘면서 미디어시장이 급격히 팽창했다. 흑백이 밀려나고 컬러TV가 시장을 주도한 뒤에도 같은 현상은 반복된다. 이번엔 컬러브라운관과 PDP, LCD가 경쟁하기 시작한 것. 때마침 고선명(HD)TV라는 새로운 방송도 출현했다. 이들 사례도 안정기와 혼돈기, 급변기를 거쳐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는 복잡계의 진화과정과 유사한 점이 많다.
또 한 번의 대~ 한민국 가능할까
이런 이유로 복잡계 연구에 대한 기업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점차 복잡해지는 경영환경과 시장 변화에 대응하는데는 ‘큰’ 이론보다는 ‘작은’ 이론의 종합을 이용한 전략이 좀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1987년 미국 거대 금융기업인 씨티그룹은 세계적인 복잡계 연구소인 산타페연구소에 거액의 연구기금을 투자해 주식시장 변동 예측모델을 연구하게 한 바 있다. 1984년 설립된 산타페연구소가 불과 20여년 만에 세계적인 두뇌집단으로 성장한 것은 바로 기업의 이같은 전폭적인 후원 덕분이다. 자연과학 분야 외에 경영과 경제 분야에서 복잡계 연구가 활발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복잡계 연구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다. 금융이 발달한 영국과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도 팔을 걷어붙였다.
최근 들어 복잡계 연구 주제는 사회 전범위로 확대되는 추세다. 거리응원이나 촛불시위 같은 사회문화 현상도 얼마든지 복잡계로 해석 가능하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원 윤순봉 부사장은 ‘2002년 월드컵기간의 거리응원전’에 주목한다. 경기 기간 내내 거리에 넘쳐났던 붉은 물결은 아직도 대다수 국민들 뇌리에 남아있다. 그 정점에 서있던 붉은 악마의 탄생과 성장도 복잡계 법칙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96년 PC통신 회원 중심의 소수로 시작한 붉은악마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다시 거리응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나비효과 모델로 설명된다.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인 2002년 초는 IMF사태와 정치스캔들로 사회적 혼란이 극도로 치닫고 있던 때였다. 변화와 혼란을 겪고 있던 국민들에게 월드컵 첫 경기에서 거둔 첫 승리는 일종의 기폭제가 됐다. 폴란드전에 이어 미국전과 포르투갈전을 거치면서 붉은 악마의 응원과 대표팀의 선전은 사회적 분위기를 상승시켰고 응원열기는 전국으로 확대됐다. 남녀노소 누구나 거리로 뛰쳐나간 것(공진화)이 월드컵 4강 진입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해석이다.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그동안 과격한 이미지로 각인된 빨간색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탈바꿈한 현상 또한 거리응원에서 얻은 결과다. 무질서와 변화를 가져오는 긍정적 되먹임 현상(피드백)이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부정적 되먹임을 상쇄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 윤 부사장은 “일개 통신동호회 모임이 대표팀의 선전과 응원열기의 고조, 인터넷 기술과 상호작용하면서 거리 전체로 확대된 전형적인 복잡계 변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2004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폭풍의 눈이었던 촛불시위와 황 교수 사태 초기에 일어난 난자기증운동 현상도 붉은 악마 신드롬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서울산업대 민병원 교수도 “냉전 종식 후 혼란스러워진 국제 정치와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복잡계 이론을 도입하는 추세”라고 말한다. 뉴욕 경찰의 마약 소탕 작전도 문제의 원인만 제거하면 된다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여러 요인들의 상호관계와 작용을 살펴 갱단의 움직임을 가늠하는 ‘시스템 사고’로 대응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복잡계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국내연구는 아직 걸음마
이처럼 복잡계 연구의 쓰임새는 꽤 광범위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경제나 경영 분야를 제외하고는 정치나 사회문화 현상을 바라보는 분석틀로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최근 들어 학계에서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대두되고는 있지만 지금껏 유사 학문간 연구자들의 공동 연구가 고작이었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전 분야를 망라한 학제간 연구는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경제연구원 윤영수 연구원은 “미국과 영국, 일본에서는 1980년대부터 사회나 경제, 정치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세계를 분석하기 위한 노력들을 계속해 왔다”고 말한다.
국내 복잡계 연구가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 삼성경제연구소가 복잡계 네트워크를 출범시키면서 시작됐다.
지난 2002년 7월 한 워크숍에서 윤 연구원, KAIST 정하웅 교수, 포항공대 김승환 교수가 만났을 때 세 사람은 복잡계의 가능성에 대해 이미 충분히 공감하고 있던 터였다. 세 사람은 주저 없이 ‘복잡계 경제연구회’란 모임을 만들고 매달 정기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모임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복잡계 연구에 관심이 높았던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 부사장도 흔쾌히 지원을 약속했다.
복잡계에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정작 연구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아 포기했던 연구자들을 찾아 1년을 보냈다. 그동안 틈틈이 복잡계 연구 현황과 과제를 정리한 책 ‘복잡계 개론’도 펴냈다. 지난해 11월에는 그간의 연구를 정리하고 다른 연구자들이 연구에 참고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공식 사이트도 문을 열었다. 이에 발맞춰 복잡계 연구자들과 기업인들이 연구 내용을 교류하는 정기 포럼도 열고 있다. 반응은 예상외로 뜨거웠다.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포럼 참석자 가운데 3분의 1은 기업체의 경영전략가들로 채워진다. 그만큼 기업의 관심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윤 연구원은 “복잡계 연구 네트워크는 그동안 미비했던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분야의 학제간 연구를 활성화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면서 “자료 축적이 끝나는 올 상반기 중 본격적인 연구네트워크로 정식 출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2년 6월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드러난 복잡계 현상
붉은 악마 신드롬은 안정기에서 공명현상과 끌개, 분기점, 되먹임, 프랙탈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복잡계 사례다. 월드컵 본선 진출 사상 첫 승리인 폴란드전 결과는 이후 16강, 8강, 4강 진출에 기폭제로 작용했다.
●공명상황 : 다수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이 활발한 상태
●끌개 : 안정한 계에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요인
●분기점 : 갑작스럽고 질적인 변화
●프랙탈 : 자신과 유사한 특징을 반복해 발생시킴
●긍정되먹임 :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순환고리
복잡계 : 수많은 독립적인 존재, 또는 현상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전혀 새로운 거시적인 특성이나 질서를 보이는 현상. 흔히 ‘창발현상’(emergence)이 일어나는 계로 정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