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는 어떻게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 아름다운 색과 향기를 만들까.’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가 키우던 장미를 보면서 가진 어린왕자의 의문. 그가 진한 장미향기에 흠쩍 빠져들수록 의문은 더 커갔다. 그러나 그의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저 별은 어디서 왔을까.’ 밤마다 하늘을 수놓은 별들은 이렇게 어린왕자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갈수록 커가는 생명과 우주의 기원에 대한 궁금증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던 학창시절에 어린왕자의 어깨에서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 앞에서 말을 잘하지 못할 정도로 숫기가 없는 탓에 그의 날개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인간은 만몰의 원자
‘인간 = 만몰의 원자.’ 서울대 화학부 김희준(58) 교수가 자연과학의 세계 강의를 시작하며 칠판에 쓴 글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을 잘못 쓴 건 아닐까. 김 교수는 사람의 평균 체중이 60kg이라는 점과 몸의 대부분이 물이라는 가정을 통해 사람이 1만 몰(mole, 6x${10}^{23}$개 입자)의 원자로 이뤄져 있음을 추론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몇 개의 원자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라고 질문을 하면 근육의 단백질을 기준으로 삼아 애를 먹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단백질은 아주 복잡해서 원자수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물은 수소 2개와 산소 1개로 이뤄져 있어 간단하죠.”
물은 3개의 원자로 이뤄져 있으며 1몰의 원자량이 18g이다. 따라서 원자 1개의 1몰 원자량은 6g이 된다. 이에 따라 1만몰의 원자는 6만g. 사람 체중 60kg이므로 사람은 1만몰의 원자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나를 물로 보지마’라는 TV 광고카피가 있다. 그런데 김 교수는 광고카피와 반대로 사람을 물로 보면서 앞에서 제시한 강의와 같이 더 쉽고 재미있는 과학적 아이디어를 찾아낸다. ‘어떻게 하면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하는 김 교수는 TV와 같은 생활 주변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2002년 서울대는 김 교수의 일반화학 수업을 우수강의로 선정해 CD 1000개를 제작했다. 특정 강의를 우수강의로 선정해 이를 CD로 제작한 경우는 김 교수 강의가 처음이었다. 이 강의 CD는 서울대 강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수와 강사, 미래의 강연자인 대학원생에게 제공됐다.
명강의로 정평이 나면서 김 교수 생활은 더욱 바빠졌다. 연구 외에 각종 기관과 단체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기 때문. 그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과학기술 앰배서더 강연, 미리 듣는 대학강의, 방송사 특강 등을 통해 과학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김 교수는 원래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수줍음 많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미국 유학시절 우연히 프래밍햄주립대학에서 진행된 평생교육 강의를 맡게 된 것이 큰 전환점이 됐다. 40대 이상의 중년 미국인이 주 대상이었다.
원자♡원자= 분자
“나이 많은 분들에게 보통 방식으로 강의해서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사물을 다양하게 보는 시각을 강의에 적용했어요. 할머니들도 강의를 좋아하고 잘 따라오는 것을 보고 교수법에 자신이 생겼습니다.”
김 교수는 안정적인 원소로 알려진 아르곤을 귀족에 비유한다. 또 원자, 양성자, 쿼크로 이어지는 원자 구조를 설명할 때는 벗기면 속에 더 작은 인형이 계속 나오는 러시아 인형을 예로 든다. 원자끼리 서로 전자를 공유하며 결합하는 현상을 남녀 사이의 결혼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1977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물리화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생물학과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전공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물리학과의 한 콜로퀴엄에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의 흥미로운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저술한 ‘최초의 3분’이란 책을 바탕으로 우주와 물질의 기원을 재미있게 풀어낸 명강이었죠.”
어린시절 장미와 별을 보며 키워왔던 생명과 우주의 기원에 대한 탐구가 이때부터 본격화됐다고 김 교수는 회고했다.
우주와 생명을 중심에 두고 강연을 진행하는 김 교수는 ‘재미있는 화학여행’ ‘자연과학의 세계’ ‘과학으로 수학보기’ 등 다양한 개론서를 저술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과학적 호기심과 깊이 있는 사고력 키우기에 기여하고 있다. 그의 현재 목표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심화된 과학교육을 실현하는 일이다.
“물리 화학 생물 등 여러 분야를 연결해서 과학을 가르치면 누구나 흥미로워하며 좋아하게 마련이죠. 하지만 현재 교재나 교육체계는 그렇지 못해 과학이 재미없게 인식되고 있어요. 적절한 자료와 교습법을 하루빨리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자연은 넓고 흥미로운 현상과 원리로 가득합니다. 사실을 배우는데 그치지 말고 자연의 원리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다각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또 관심 주제에 대해 끝까지 질문하고 답을 찾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김 교수가 스스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시절은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 때.
“3학년에 들어서자 목표를 세우고 도전했습니다. 1년동안 열심히 하니까 어느새 목표가 달성됐더군요.”
그는 경기고 졸업생 480명 중에서 금메달을 받고 졸업했다. 금메달은 수석을 뜻한다. 또 본고사 입시에서 서울대 문리대 수석으로 입학했다.
최근 김 교수는 단백질 관련 질병과 세포 생명현상에 대한 질량조사분석 방법을 이용한 연구에 한창이다. 또한 올해 열리는 화학올림피아드 학술위원장으로도 바쁘게 보내고 있다. 김 교수는 1997년 귀국한 후 영재교육센터를 통해 인연을 맺었던 50명의 학생중 10여명이 화학올림피아드에 입상하는 등 화학올림피아드와는 인연이 깊다.
생명과 우주의 기원이라는 날개를 단 어린왕자는 오늘도 사람들이 과학의 세계에서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인도하기에 바쁘다.
청소년에게
'왜 그럴까' 탐구하다보면 자연을 깊이 있게 알아가게 된다. 책은 '왜'라는 호기심을 풀어주는 좋은 안내자다. 좋은 책을 선정해서 완전히 이해해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칼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자연은 하나이고 물리, 화학, 생물의 구분이 없다. 과학여행을 즐기려면 자연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