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전쟁은 생존을 위한 싸움이 될 것이다.’ 2004년 2월 미국 국방부의 비밀보고서인 ‘펜타곤 리포트’는 이렇게 단언했다. 종교나 이념, 국가의 위신처럼 ‘형이상학적인’ 이유가 아니다. 인간의 가장 ‘형이하학적인’ 욕구인 먹고 살기 위해 서로 치고 박고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미래’라고 표현했지만 보고서가 예측한 시기는 불과 20년 뒤다. 온갖 첨단 기술이 인간을 왕처럼 떠받들며 고상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줄 그 때, 물 한 모금 더 마시겠다고 싸운다는 이 시나리오가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펜타곤 리포트가 내세운 근거는 기후변화다. 더 이상 테러는 전쟁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보고서 작성에 직접 참여한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글로벌 비즈니스 네트워크’ 연구소의 더그 랜달은 “기후변화는 총을 겨눌 상대가 없는 적”이라고 표현했다. 테러범에게는 총이라도 겨누겠지만 기후변화는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
테러보다 기후변화가 무섭네
펜타곤 리포트에 따르면 2010~2020년에 유럽에는 이상저온 현상이 닥칠 것이라고 한다. 연평균 기온이 매년 3.3℃씩 떨어져 영국은 시베리아처럼 건조하고 추워지며, 네덜란드에는 대형 폭풍이 강타해 헤이그가 완전히 침수된다. 중국은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동남아시아에는 폭동이 발생해 시끄러울 것이며, 가뭄과 기근, 물 부족에 시달리던 인류는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게 된다. 결국 기후변화로 인해 전세계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이 보고서의 주장이다.
최근 조짐이 심상치 않다. 2003년 유럽과 인도의 폭염으로 2만2500여명이 사망했다. 2004년 동남아시아에서는 쓰나미가 23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2005년 미국 남동부에는 시속 180km의 초대형 허리케인이 강타해 뉴올리언스가 쑥밭이 됐다. ‘기후변화가 적’이라는 시나리오가 점점 현실이 돼가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을 겪으며 1980년대에는 구 소련이 적의 상징이었다. 1990년대 이 적이 테러로 바뀌었다. 2000년대 이 적은 기후변화가 됐다.
이런 변화는 헐리우드의 재난영화 주제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1990년대 지진이나 화산폭발, 소행성 충돌 등의 주제를 다루던 영화는 2004년 여름 지구온난화를 다룬 영화 ‘투모로우’를 기점으로 재난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자국의 이익을 제일 먼저 챙기는 각국 정상들도 이제 세계회의에서 머리를 맞대고 기후변화를 논의한다. 기후변화에 관한 한 ‘남 일이 내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인도네시아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 등은 쓰나미와 지진, 카트리나 같은 자연재해를 ‘새로운 적’으로 표현하며 “테러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지적했다.
날씨 정복해야 전쟁에서 이긴다
그렇다면 기후변화라는 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를 위해 등장한 것이 전지구관측시스템(GEOSS, Global Earth Observation System of Systems)이다. 우선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기후변화를 감시라도 해야 한다는데 세계가 동의한 것. 하루만 일찍 카트리나의 진행 방향과 세기를 예측했더라도 그렇게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GEOSS의 필요성은 2002년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의’(WSSD)에서 처음 제기됐다. 이듬해 6월 프랑스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서 구체화됐고, 같은 해 7월 미국에서 제 1차 지구관측정상회의(EOS)와 제 1차 지구관측그룹회의(GEO)가 열리면서 GEOSS 구축은 급물살을 탔다. 그리고 2004년 4월 마침내 GEOSS 10년 이행계획 기본문서가 채택됐다.
GEOSS는 육해공을 망라한 날씨 센서와 항공기, 위성 등을 통해 얻은 데이터를 중앙 네트워크에서 통합한다. 관측시스템을 모두 새로 만드는 것은 아니고 기존의 관측시스템을 기반으로 각종 기후변화를 예측하게 된다. 나라별 관측시스템을 공유해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는 것이 GEOSS의 기본적인 계획이다.
GEOSS가 관측하게 될 범위는 매우 넓다. 바닷물의 온도, 대기 중 수증기의 양, 얼음의 두께부터 농경지 지형 모양, 토양의 수분 함량 등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관측 대상이다.
이런 데이터를 종합해 GEOSS는 앞으로 몇 달 동안 날씨가 어떻게 변할지, 조류독감이나 미국에서 현재 발생하고 있는 뇌염의 일종인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가 언제 발병할지 등을 예측하게 된다.
최근 한국도 이런 움직임에 발맞춰 발빠른 대응을 하고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9위로 기후변화의 제1 원인인 지구온난화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모르는 체 할 수 없는 일. 게다가 최근 폭설과 집중호우 등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이상 조짐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지난해 8월 정부는 재해, 보건의료, 에너지 자원, 기후, 수자원, 생태계, 우주 등 12개에 걸쳐 GEOSS 관측분야를 선정했다. 9월에는 기상청에 GEO 한국사무국을 열고 GEOSS 활동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계획대로라면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GEOSS가 가동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웃나라 일본은 지난해 초 일본을 먹여 살릴 미래 10대 국가 기간 기술의 하나로 지구 규모의 통합관측 감시 시스템을 포함시켰고, 2015년까지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다.
기후변화가 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이 적을 먼저 예견하고 대처하는 나라가 ‘전쟁의 승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