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파멸시킨 것은 겨울이었다. 우리는 날씨의 희생양이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했다. 그 해 엘니뇨 현상이 나타났다.
1912년 대형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침몰했다. 그 해 대서양에는 엘니뇨 영향으로 보통때 보다 빙산이 많았다.
몇 년 전부터 기상이변에는 ‘엘니뇨’라는 설명이 꼭 따라다녔다. 겨울에 유난히 추워도, 유난히 따뜻해도 엘니뇨 때문이었다. 여기에 지구온난화 같은 이유들이 기상이변의 ‘공범’으로 덧붙여지곤 했다.
하지만 이유를 불문하고 기상이변은 ‘이변’일 뿐, 쓰나미가 동남아시아를 휩쓸고 카트리나가 미국을 뒤흔들어도 동북아시아 한쪽 끝 한반도에 사는 내 일상생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최근 전라도 지역에 기상관측 사상 최대의 폭설이 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청난 양의 눈에 고속도로가 막히고 비닐하우스가 주저앉자 당장 차로 어떻게 이동할지, 농산물 가격이 오르지는 않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최근 몇 년 간 한반도에는 기상이변이 되풀이되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뚜렷했던 삼한사온의 겨울철 날씨 패턴은 사라진지 오래다. 언제부턴가 여름철에는 비만 오면 시간당 수백mm씩 집중호우가 쏟아진다. 그렇다면 일시적인 ‘기상이변’이 아니라 장기적인 ‘기후변화’라고 해석해야하지 않을까.
과학동아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2000년 이후 한반도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표적인 기후변화 조짐 5가지를 선정했다.
(도움말 주신 분 : 기상청 기후연구실 권원태 실장, 서울대 지구환경시스템과학부 김경렬 교수,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오재호 교수, 한중대기연구소센터 정용승 소장)
1. 한강에서 스케이트 못 탄다
올 겨울 여성의 패션 아이콘은 미니스커트다. 시내 중심가에는 다리를 드러낸 미니스커트로 한껏 멋을 낸 여성들이 쉽게 눈에 띈다. ‘춥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이내 ‘건물에 난방도 잘 되고 옛날보단 덜 춥지’라며 ‘남 걱정’을 털어낸다.
실제로 한국의 겨울은 따뜻해졌다. 기상청 권원태 실장은 “1월 평균 기온이 0.9℃가량 상승했다”고 밝혔다. 기상청 기후연구표에 따르면 1971~2000년의 연평균 기온이 1961~1990년에 비해 0.1~0.5℃ 올라갔다. 무엇보다 겨울철 온도 상승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김경렬 교수는 “더 이상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없게 된 것이 상징적”이라고 말했다. 서울에 사람과 건물,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도시의 열섬효과가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겨울이 따뜻해지는 바람에 한강에 얼음이 얼지 않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 네덜란드도 비슷한 상황이다. 16, 17세기 회화 작품에는 네덜란드의 운하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이 곧잘 등장한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네덜란드 관광의 필수 코스 중 하나가 운하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 관광 코스는 사라졌다. 더 이상 운하가 얼지 않기 때문이다.
권원태 실장은 “이런 현상은 겨울이 짧아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봄에 해당하는 3, 4월에 기온이 유독 높았다. 권 실장은 “봄철 이상고온은 여름이 길어지고 겨울이 짧아지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설명했다.
봄이 일찍 시작되면 여름도 덩달아 일찍 시작되지만 대신 여름이 늦게 끝나면서 봄, 가을은 상대적으로 짧아지고 겨울도 짧아진다. 권 실장은 “한국은 지난 80년 동안 겨울이 4달에서 3달로 줄었다”고 밝혔다.
2. 말라리아가 풍토병이라니
한반도는 지금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겨울철 평균 기온이 상승하면서 한국이 더워지고 있다. 전문가들 중에는 한국이 아열대기후로 옮겨가고 있다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기상학적으로 월평균 기온이 10℃ 이하인 기간이 4개월 미만이면 아열대기후로 정의한다. 기상청 권원태 실장은 “한국은 11월이 변수”라고 설명했다. 11월 평균 기온이 10℃ 이상인지, 이하인지에 따라 아열대기후에 포함이 되기도, 안되기도 한다.
문제는 따뜻해진 겨울로 인해 한국에 열대질병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립보건연구원 질병매개곤충팀 신이현 박사는 “말라리아가 한국에 토착화되는 추세”라고 밝혔다. 열대기후에서 흔히 나타나는 전염병인 말라리아가 한국의 ‘풍토병’이 되고 있다는 것. 보건 체계가 미비했던 1950년대에는 말라리아가 한국의 풍토병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말라리아는 소멸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1993년경부터 급격하게 발병률이 높아지더니 최근에는 매년 평균 1000명 가량이 말라리아에 걸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신이현 박사는 “말라리아는 기온과 관련이 많다”며 “토착화 개념에 논란이 있지만 최근 계속해서 높은 발병률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원인은 도시화로 인해 아파트 지하 등 어두운 공간에서 서식하는 특정한 모기 종이 증가한 것. 모기가 월동하면서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을 확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생태계도 병충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 예로 미국 알래스카 지역에 발달한 전나무 숲은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한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예전에 싸락눈이 내리던 날씨에 함박눈이 내렸고, 이로 인해 나무에 눈이 많이 쌓여 나뭇가지가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 여기에 따뜻한 날씨 덕에 살아남은 병충해가 나뭇가지의 부러진 부분에 침투해 결국 나무를 죽이게 된 것이다.
3. 폭우와 가뭄의 양극화
비가 ‘좋아하는’ 지역이 있는 걸까. 여름철 엄청나게 쏟아 붓는 집중호우는 꼭 작년에 내린 곳에 올해 또 내린다.
부경대 오재호 교수는 “평지보다는 산지, 저기압이 잘 지나가는 지역이 비가 좋아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경기 북부, 충정도의 태안반도 부근, 동해안 그리고 제주도가 대표적인 집중호우 지역이다.
집중호우는 지면이 가열되면서 대기의 온도가 상승해 대류운동이 커지면서 발생한다. 기온이 올라가다보니 공기 중에 수증기가 많아지고 이로 인해 비를 뿌리는 뭉게구름도 커진다. 보통 뭉게구름을 반지름이 10km 정도인 원통으로 볼 때 2000만톤 정도의 비를 뿌릴 수 있다. 이 때 뭉게구름이 여러 지역을 지나가면서 비를 뿌리면 소나기가 되고, 어느 한 지역에만 뿌리면 집중호우가 된다.
오재호 교수는 “최근 뭉게구름의 크기가 계속 커지고 있다”면서 “해마다 집중호우 기록이 갱신되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전반적으로 기온이 높아지면서 여름이 길어진 탓에 집중호우 지역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 기상청 권원태 실장은 “지형학적으로 볼 때 해안가보다는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내륙 지방이 집중호우가 빈번한 경향이 있지만 언제, 어느 지역에 집중호우가 내릴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상당히 어렵다”고 밝혔다.
강수량이 여름에만 집중되는 것도 문제다. 여름에는 집중호우로 홍수가 나면서도 겨울에는 가뭄이 든다. 오재호 교수는 “가뭄은 대기 대순환의 변동에 따른 것”이라며 “나무를 마르게 하는 등 생태계를 파괴시킨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한국과 강수량이 비슷하지만 일년 동안 비가 골고루 오는 편이다. 반면 한국은 장마철에 강수량이 집중돼 있다. 결과적으로 다른 철은 가물게 된다. 가뭄은 홍수처럼 그 피해가 확연히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가뭄을‘소리 없이 다가온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가뭄에 대한 면역체계가 약하다고 우려한다.
4. 카트리나 같은 태풍이 두렵다
지난 2002년 태풍 ‘루사’는 강릉 지역에 하루 871mm의 비를 퍼부었다. 이듬해 태풍 ‘매미’는 제주에 하루 740mm의 비를 뿌렸다. 반면 2004년과 2005년 한반도에는 이렇다 할 정도로 큰 피해를 준 태풍이 없었다.
부경대 오재호 교수는 “운이 좋았다”고 설명했다. 최근 태풍은 점점 그 세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해수면의 온도 상승과 관련이 있다. 해수면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태풍에 열과 수증기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자 태풍의 세력이 커졌다. 게다가 바다에서 세력을 키운 태풍이 육지에 상륙하면 대개 열과 수증기 공급이 차단돼 세력이 약해지기 마련인데 최근에는 육지의 온도가 높아져 이마저 어렵게 됐다.
태풍권도 북상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대개 열대기후와 온대기후의 경계에서 태풍의 전향점이 형성됐다. 대만 부근에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인해 열대기후 지역이 넓어지다 보니 태풍의 전향점도 북상했다. 기후대가 북상하면서 태풍권도 같이 북상한 셈.
오재호 교수는 “태풍의 경로가 일본 남쪽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인데 작년에는 운이 좋게도 일본 열도를 따라서 움직였기 때문에 한국에 피해가 적었다”며 “만약 한국이 중국이나 미국만큼 땅덩이가 넓었다면 당연히 태풍의 영향권에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올해는 어떨까. 기상청 권원태 실장은 “최근 태풍에 관한 한 한국은 재수가 좋았던 것”이라고 못 박았다. 주변국인 중국에는 2003년 태풍이 12개나 지나갔고, 일본에는 지난해 11개가 들어갔다. 올해 매미와 루사 같은 초강력 태풍이 한꺼번에 한국을 강타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5.대구에는 사과가 없다
‘사과는 대구 사과지예~.’ 이제 이 말도 듣기 어렵게 됐다. 사과 산지의 본고장이었던 대구는 예전의 명성을 잃었다. 대구보다 북쪽에 있는 충주나 원주가 새로운 사과 산지로 떠올랐다.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 서형호 박사는 “사과의 경우 수확기 때 12℃ 정도의 서늘한 기후가 유지돼야 착색이 잘 된다”며 “수확기인 가을, 겨울철 온도가 상승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재배지가 북상했다”고 설명했다.
과실의 품질은 일차적으로 유전적인 요인과 재배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나머지가 기후다. 기후는 과실의 착색 시기를 앞당기거나 당도를 높이는 등 품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름철에 장마가 길면 수분 함량이 높고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해 복숭아가 덜 달다. 사과처럼 착색이 중요한 경우에는 기온이 올라가면 착색이 불리해진다. 때깔 좋은 붉은색이 아니라 푸르스름한 붉은색을 띠게 되는 것.
서형호 박사는 “도시화의 영향으로 경작지가 없어진 것이 큰 이유지만 기온이 올라가면서 사과의 품질이 떨어지다 보니 경쟁력이 떨어졌고 자연스럽게 기온이 낮은 곳을 찾아 재배지가 북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에 적응한 종이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자연선택이 사과에도 그대로 적용된 셈.
아예 시원한 곳을 찾아 평지를 버리고 산에서 사과를 재배하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 경북 의성군 인근에는 해발 250~400m 높이에 사과 과수원이 들어서고 있다. 30℃ 이상 고온이 수십일 지속되면 사과는 성장을 멈추고 이 때부터는 옆으로만 뚱뚱해져서 못생긴 사과가 되기 일쑤라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강원도 영월군에는 예전에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포도밭이 74헥타르(ha)로 급격히 늘었다. 포도 재배 농가만 120여 가구나 된다. 이 역시 전반적으로 기온이 상승하면서 포도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 북상했기 때문이다. 남부 해안지대는 아열대성 기후로, 중부지방은 현재 남해안 지역과 비슷한 기후로 바뀔 경우 사과, 포도 같은 온대 과수의 재배지는 계속 북상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