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물었다.
“아빠는 치매를 연구하시잖아요. 치매는 왜 생기는 거에요?”
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뇌질환의 원인을 밝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마침 새로운 생명공학 기술인 ‘맞춤형 유전자 분리기술’에 흠뻑 빠져 있던 필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딸에게 이 기술에 대해 들려줬다.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31억 개 문자의 비밀 벗기다
인간의 몸은 약 100조개의 세포로 구성돼 있고, 세포의 핵에는 실타래처럼 얽힌 염색체 23쌍이 자리잡고 있다. 염색체의 내부에 있는 유전자에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관련된 모든 종류의 정보가 담겨 있다. 이들 유전자는 생로병사라는 말 그대로 인간의 탄생부터 병에 걸리고 늙어 사망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생리현상을 조절하고 통제한다.
생명과학은 1980년대 중반 재조합(recombinant) DNA를 비롯한 유전공학기술, 1990년대 후반 유전자와 단백질의 발현양상을 측정하는 DNA칩, 단백질칩의 개발로 이어지며 획기적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생명현상, 특히 인간질병에 대한 체계적 기능 연구는 2000년대에 이르러 인간게놈 지도가 완성되고 인간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밝혀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03년 4월 15일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6개국의 컨소시엄인 인간게놈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팀은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사실상 완성했다고 발표했다. 13년간에 걸친 국제 공동연구 끝에 인류는 드디어 인체의 생명 통제 비밀을 담은, 31억 개의 문자로 이뤄진 유전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이로써 1953년 4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인간의 DNA 구조를 밝힌지 50년 만에 인체 생명설계도의 기본 도안이 완성됐다. 또한 몇몇 하등동물의 게놈 분석도 속속 마무리되고 있다.
분명히 21세기의 생명과학 연구는 이런 모든 DNA 서열자료들 안에 있는 유전자와 그 기능들을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게놈 정보 덕분에 이제는 유전자의 기능을 좀더 총제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됐다. 즉 뇌의 기능, 뇌질환을 일으키거나 억제하는 유전자 등을 게놈 차원에서 발견해내는 게 가능해졌다.
뇌 속 단백질이 치매의 원인
기존의 뇌 연구가 각 연구실을 중심으로 연구자들이 관심 있는 분야에서 그들이 보유한 유전자들의 기능을 개별적으로 밝혀내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인간게놈 정보를 이용해 많은 유전자 중에서 뇌기능이나 뇌질환에 작용하는 특정 유전자를 찾아낼 수 있게 됐다. 이것이 바로 맞춤형 유전자 분리기술이다.
치매, 헌팅턴병, 파킨슨병, 허혈, 간질 등 많은 뇌질환은 대부분 원인이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뇌질환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다. 지금까지 뇌질환의 원인을 밝히는 연구가 수월하지 않았던 것은 인간게놈 수준에서 접근하는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연구 방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뇌질환 원인 연구의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기에 앞서 대표적 뇌질환인 치매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새로운 연구 방법에서 언급할 ‘질병모델세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치매는 65세 이상의 노인에게서 주로 발생하는 노인병이다. 최근 급속하게 고령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치매는 심각한 사회성 질환이 되고 있다. 80세 이상의 노인 가운데 30%에 가까운 사람이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치매 환자는 가족이 항시 돌봐줘야 하기 때문에 사회경제에도 미치는 부담이 매우 커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치료제나 예방약이 전무한 상태다. 따라서 치매의 원인을 밝히고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집안 내력으로 유전돼 걸리는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90%를 차지하는 노인성 치매의 원인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치매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중 대뇌피질에서 발견되는 ‘신경섬유응집체’(NFT)가 주요한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신경섬유응집체에는 ‘타우’(Tau)라 불리는 단백질이 쌍나선형 사상체(PHF)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타우가 치매의 원인으로 작용하리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타우가 신경섬유응집체를 형성하기 위해 어떻게 변하고 뭉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신경섬유응집체가 형성되는 경로를 밝히고 이를 차단한다면 치매를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 바로 이때 맞춤형 유전자 분리기술이 사용된다.
3만5000개 유전자에서 범인 찾아내기
먼저 인간게놈 분석으로 밝혀진 유전자 3만5000개를 모두 모은다. 이때 이들 유전자가 인간세포에서 발현되도록 특정 운반체(vector)에 조합해야 한다.
한편에서는 치매, 헌팅턴병, 파킨슨병 등의 뇌질환에 걸린 세포를 배양해 ‘질병모델세포’를 만든다. 이 과정에는 다양한 디자인과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치매의 경우 타우 단백질에 형광물질을 붙인 다음 세포에 발현시켜 쌍나선형 사상체 구조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치매의 질병모델세포다.
이렇게 만든 질병모델세포를 3만5000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는 세포배양용기에 각각 배양한다. 각 구획에 배양된 질병모델세포에 인간 유전자 3만5000개를 각각 전달한다. 즉 1번 구획에 있는 질병모델세포에는 1번 유전자를, 2번 구획 질병모델세포에는 2번 유전자를, 3번 구획 질병모델세포에는 3번 유전자를 각각 전달하는 것이다.
전달된 유전자가 치매를 회복시키거나 치료하는 기능이 있다면 그 구획에 있는 질병모델세포는 병이 낫게 된다. 질병모델세포에서 양이 부족하거나 기능이 비정상적이었던 유전자가 외부에서 보충됐기 때문이다. 병이 낫는 모습은 현미경으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 뇌질환이 어떤 유전자가 결핍돼 유발됐는지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다양한 배양세포와 동물모델을 이용한 후속연구를 통해 확인하고 검증하는 절차가 남아 있다.
기존 기술과 다른 점
맞춤형 유전자 분리기술은 기존의 방법과 달리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연구실에서 인간유전자 3만5000개 모두를 사용하는 총체적 연구라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연구에 유전자의 일부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수백만에서 수천만 개나 되는 ‘라이브러리’ 개념의 유전자를 이용했다. 그래서 부분적 연구에 그치거나 너무 규모가 커서 시간과 노력이 지나치게 많이 소요됐다.
그러나 연구에 3만5000개 유전자를 직접 이용하면 인간의 전체 게놈을 포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라이브러리 개념과 비교했을 때 실험에 쓰는 유전자 숫자가 1/1000로 줄어 신속하고 효율적이다.
둘째, 3만5000개 중에서 각 유전자의 기능에 따라 연구의 목적에 맞는 ‘맞춤형 유전자’를 분리할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많이 사용해 오던 칩이나 프로테오믹스(Proteomics) 같은 기술은 주로 특정 질병모델에서 유전자나 단백질의 양과 질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다량으로’ 발굴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해 맞춤형 유전자 분리기술은 많은 과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특정 유전자를 각각의 기능에 따라 개별적으로 발굴할 수 있다.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 유전자를 이런 방법으로 신속하게, 개별적으로 발굴할 수 있다는 것은 게놈프로젝트 완성 후 생명과학 분야에서 이룩한 쾌거다. 그리고 로봇 시스템 같은 첨단 연구 장비의 개발로 이 연구는 대부분 자동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기술이 적용되는 연구의 영역도 계속 넓어지고 있다.
기능 잃거나 과해지는 유전자가 질병 원인
각종 뇌질환은 다양한 원인 때문에 일어난다. 노화과정이나 환경 또는 유전적 요소로 인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고, 그 결과 특정 유전자가 기능을 상실하거나 활성화돼 특정 뇌질환을 일으킨다.
질병모델세포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능을 상실한 유전자는 외부에서 넣어준 유전자가 기능을 보완해줘 질병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병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뇌암이다. 암을 억제하는 기능을 지닌 유전자가 기능을 상실하면 뇌암이 발생한다. 또 파킨슨병도 이렇게 발생하는 뇌질환에 해당한다.
특정 유전자에 발생하는 돌연변이가 유전자의 기능을 과다하게 활성화시켜 뇌질환을 유발하리라고 추정된다. 이렇게 발병하는 뇌질환이 바로 치매와 헌팅턴병이다.
이런 경우 유전자를 넣어주기보다는 유전자의 기능을 억제하는 siRNA(짧은 RNA 서열)를 이용한다. siRNA 역시 인간 유전자 3만5000개 각각에 대해 제조할 수 있다. siRNA를 세포 에 넣어주면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할 수 있다. 결국 특정 유전자의 활성이 억제되는 효과를 보이는 것이다. 이같은 원리로 질병모델세포에 3만5000개 유전자 각각에 대한 siRNA를 따로따로 넣어준 다음 병든 세포가 회복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질병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찾을 수 있다.
이밖에도 맞춤형 유전자 분리기술은 세포 노화, 통증을 비롯한 뇌 기능과 관련된 여러 가지유전자를 포함해 다양한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분리할 수 있으며 그 활용 정도가 매우 광범위하다.
이제 전자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손톱만한 칩 위에 3만5000개의 세포배양 구획을 설정하고 여기에 인간 유전자 3만5000개를 실어 완전 자동화한 맞춤형 유전자 분리기술 연구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다. 이 장치가 개발되면 짧은 시간에 수십 개의 연구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뇌질환 연구에 더욱 획기적인 발전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
유전자 라이브러리 :실험에서 얻은 수많은 유전자 조각들을 독자적으로 증식할 수 있는 박테리아 플라스미드에 끼워 넣어 이를 모아놓은 것. 현재 다양한 생물 종의 유전자 라이브러리가 만들어져 있으며 연구자들은 라이브러리를 통해 원하는 유전자를 얻어 실험에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