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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벗어나 논문 쓰는 고등학생들

한국과학영재학교를 가다

올해 첫 졸업생을 낸 햇병아리 학교에서 3학년 138명이 전원 KAIST를 비롯한 명문대에 합격했다. 세상을 놀라게 한 그 주인공은 지난 7월 부산과학고에서 교명이 바뀐 부산 당감동의 한국과학영재학교. 한 해에 100명이 넘는 KAIST 합격자를 낸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2000년 영재교육진흥법이 극회를 통과한지 3년 만에 국내 유일의 과학영재학교로 설립된 한국과학영재학교는 이제 어엿한 과학도를 길러내며 주목받고 있다. ‘첨단 연구 장비를 갖춘 대학 연구소 같은 고등학교’의 독특한 영재교육 시스템을 소개한다.
 

부산 당감동에 위치한 한국과학영재학교 전경. 가운데가 본관과  탐구관이며 오른쪽 위 흰 건무링 각종 실험실이 마련된 창조관, 그 아래가 기숙사다. 왼쪽은 학생회가 있는 예지관.


오전 11시. 여느 학교라면 한창 수업 중이어야 할 시간에 교정 곳곳을 거니는 학생들이 눈에 띈다. 손에 노트를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학생과 외국인 교사, 본관 뒤 중앙광장 계단에 앉아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두 여학생···. 궁금증을 접어둔 채 강의실이 있는 복도에 들어서니 그야말로 ‘썰렁’하다. 수업 듣는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나?

궁금증은 교장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야 풀렸다. 한국과학영재학교 문정오 교장은 “우리 학교 학생들은 6~8명이 한 반을 이뤄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듣고 학점을 받는다”며 “수업은 강의가 아니라 연구 과제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소개했다. 학교를 안내한 김기순 기획과장도 “학생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거나 수업이 없는 시간엔 틈틈이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학교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설명했다. 교실에 수십 명이 들어차 교사의 설명을 듣는 광경은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학교는 창조관, 탐구관, 기숙사 등 11개 건물이 깔끔하게 조경된 교정 안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연구공원 같은 인상이다. 특히 창조관은 자기공명영상장치(NMR), 전자현미경(SEM, TEM) 등 60억원대에 이르는 첨단 과학기자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렌즈 지름 200mm 굴절 천체망원경이 설치된 천문대까지 마련돼 있어 웬만한 대학 연구동 못지않다.
 

지난 5월 열린 교내행사 'SAF'(Science Academy Festival)에서 학생들이 조별로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도미노를 쌓고 있다.


대학처럼 학점 따고 졸업 논문 쓴다

한국과학영재학교 학생들에겐 수능 시험의 압박이 없다. 특기자 전형이나 수시 모집으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항공대 등에 진학하거나 외국 명문대로 유학을 떠나기 때문이다. 입시 공부에서 해방된 학생들은 고교 과정을 1년 만에 끝내고 심화 과목을 듣거나 ‘R&E’(Research & Education) 지도교수와 함께 연구 논문을 쓴다. 생물학만 해도 생물학실험, 분자생물학, 유전자의 이해, 생리학, 세포생물학, 생화학 등 대학 전공 수준의 과목이 11개나 된다.

학점제로 운영되는 교과과정도 색다르다. 170학점을 이수하면 졸업할 수 있고 마지막 학기엔 졸업 논문을 쓴다. 한 반은 대개 6~8명으로 6명 이상 신청하면 과목이 개설되며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 학생들은 국어 등 일부를 제외한 전 과목에서 영어원서 교재를 사용한다. 당구, 수영, 골프, 검도 등 다양한 스포츠 과목까지 마련돼 있다.

최근 KAIST에 합격한 3학년 구자현(16)군은 식물 추출물에서 항균성 물질을 찾는 주제로 졸업논문을 쓰고 있다.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자유 시간이 많아 좋아하는 공부를 깊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학교의 장점”이라며 “앞으로 화학과에 진학해 제약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

역시 KAIST에 합격한 3학년 이찬형(18)군은 “수능 시험을 안 쳐서 좋다”고 말한다. 물리나 화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그는 “서로 관심사가 비슷하고 말이 통하는 친구들이 많다”며 학교생활에 만족했다.

대학에서 고등학교 학점을 따도 된다. 지난 9월 포항공대에 합격한 3학년생들은 이미 포항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그런데 과제가 너무 많아 보여 안타까웠던 문정오 교장이 교수들에게 전화해 “학생들의 과제를 좀 줄여 달라”고 요청했더니 오히려 학생들이 “과제 줄이지 마세요, 더 할 수 있어요”라고 말린 적도 있었다고. 이쯤 되면 이들에겐 공부가 ‘짐’이 아니라 즐거움인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과학기술 지도자라면 영어는 필수. 학생들은 토플(TOEFL)시험은 물론 ‘테크니컬 라이팅’(technical writing)이란 과목에서 영어 논문 작성법을 배운다. 학생들에겐 재학 중 해외 수학여행이나 미국 명문대 실험실 등을 찾아가 배우는 기회가 주어진다. 현재 세계영재학회를 통해 영국, 태국, 호주 등 6개국 11개 외국학교와 교류가 진행 중이다. 학교를 둘러 본 외국 교사들은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이다. 한국과학영재학교처럼 정부가 체계적·조직적으로 지원하는 영재교육 시스템이 자국엔 없기 때문이라고.

대학교수·외국인 박사가 직접 가르친다

한국과학영재학교에는 정규 교사 44명을 포함해 KAIST에서 파견된 전임 교수 12명, 외국 초빙 교수 2명, 계약직 전임 교수 17명, 원어민 교사 3명, 테크니션 등 총 86명이 409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절반 이상이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출신 이학박사로 물리를 가르치는 유리 바쉬카토프 교수는 “한국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은 깊은 지식을 요구하는 어려운 질문을 자주 한다”며 “러시아에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훌륭한 시설이 거의 없다”고 밝혔다.

안정훈 교수는 생물학을 매주 10시간 가르친다. KAIST 영재교육원에서 이 학교로 부임해 온 그는 수업 부담이 적은 대신 학생들 논문 지도나 수업 준비, 연구 등으로 늘 바쁘다.

“우리 학생들은 과제에 대한 집착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가 특히 강합니다. 어떤 문제든 주어지면 풀어내고 말죠. 고3이면 석사과정 학생들처럼 혼자서도 실험할 수 있습니다.”문 교장은 이렇게 뛰어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해서도 계속 영재성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본관 4층의 도서관 풍경. 학생들은 이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자유롭게 공부한다.


다재다능한 과학영재 육성이 목표

지난 11월 첫째 주 한국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은 가을 학예전을 열었다. 올해 주제는 패널 토론, 마술 공연, 오케스트라 협연, 영화 촬영 등이었다. 학생들은 영재성 뒤에 숨은 ‘끼’를 맘껏 풀어냈다. 마술 초빙 강사의 시범을 한 번 보고 그대로 재현하고, 1주일 만에 오케스트라 화음을 맞출 정도. 학예전을 지켜본 교사들은 “수학·과학에서만 뛰어난 학생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학교도 학생들의 특별 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최근 새로 세워진 예지관에는 학생회실, 세미나실을 비롯해 사물놀이실, 오케스트라실, 심지어 노래방과 당구장까지 갖춰져 있다. 사물놀이실 한쪽에서 눈에 띈 것은 이불과 베개. 김기순 기획과장은 “학교 곳곳에서 밤새 공부나 특별활동을 하느라 학생들이 두고 간 침구나 간이침대를 발견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한국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의 지능지수(IQ)는 평균 145다. 17:1의 높은 경쟁을 뚫고 선발된 학생들이라 문 교장은 “갑자기 성적이 떨어지면 교사가 가르치는 것이 학생에게 맞지 않는지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학습지도와 함께 인성교육도 병행해 개성이 뚜렷한 학생들이 서로 돕고 공부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한국과학영재학교는 입학년도를 기준으로 학년을 구분한다. 이번 03학번 143명 가운데 5학기 만에 졸업한 학생은 14명. 이들은 이미 합격한 대학 연구실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실험을 하고 있다. 한국과학영재학교 졸업생들에 대한 대학의 평가도 매우 호의적이다. 문 교장은 “우리 학생들은 자신이 연구할 주제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갖고 대학에 진학한다”며 “교수들이 학생들의 적응 능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한다”고 전했다. 문 교장은 앞으로 학생들이 열정과 비전을 지닌 과학기술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불가능(impossible)에 사이점(’) 하나만 붙이면 가능(I’m possible)이 됩니다. 불가능한 문제는 없다는 열정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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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박창민
  • 이상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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