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딱딱한 숫자와 씨름하고 있는 사이에도 수학은 인간의 삶 속 깊이 파고 들었다. 구름이나 꽃잎, 벽지 무늬나 놀이 속에도 수학의 원리가 숨어 있으니 말이다. 그런 현상을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들 가운데 한 부류는 아마도 미술가들인 듯하다.
르네상스시대 화가 알베르티는 자신의 저서 회화론에서 ‘화가의 기본은 기하학’이라고 강조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의 그림은 원근법과 대칭이란 수학 개념을 세기의 명화로 풀어낸다. 17세기 정물화가 리나르는 자신의 작품 ‘조개껍데기’에서 자연이 만든 완벽한 피보나치수열을 보여줬다.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왕년의 스타 메릴린 먼로의 얼굴을 반복해 배열한 작품 ‘100개의 메릴린’은 행렬 2개를 연산하는 원리가 잘 드러나 있다.
사물의 근원, 수와 도형
8월말까지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미술과 수학의 교감전’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 속에 숨어있는 수학적 원리를 찾아 떠나는 기획전이다. 숫자와 도형 같은 수학적 이미지와 원리를 미술 작품에 접목한 신학철, 김봉태, 김지혜, 신치현 등 국내작가 24명의 작품 51점이 이번 전시회에 소개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과 수학박사 김흥규(서울광신고 교사)씨를 만나 작품 속에 숨겨진 수학 얘기를 들었다. 수학과 미술은 어떤 접합점이 있을까. 이명옥 관장은 “수학은 시공간, 수, 관계 등에 관한 인간의 인식을 숫자와 도형으로 표현 한다는 점에서 미술과 유사한 점이 많다”며 “이미 오래전부터 수학은 미를 판단하는 기준이 돼왔다”고 설명한다. 숫자와 도형은 우리가 세계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숫자는 사물의 다양성을 정리해주는 기능을 발휘한다.
민중미술화가로 잘 알려진 신학철의 작품 ‘숫자놀이’는 그런 숫자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신씨는 0, 2, 8 등 여러가지 숫자형태를 캔버스에 실로 꿰어 작품을 완성했다. 얼핏 보기에 이 작품은 숫자를 길게 연속적으로 늘어놓은 듯하지만 묘한 규칙성이 발견된다. 0으로 시작된 숫자가 0 형태가 두 개 모인 8로 나뉘고 다시 두 개를 상징하는 숫자 2와 이를 역으로 점대칭한 모양(2를 뒤집은 형태)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흥규 박사는 “숫자의 수리적인 특성과 기하학적인 형태를 모두 작품 속에 녹여낸 작품으로 ‘사물의 기본은 수’라는 개념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김 박사는 사물을 이해하는 또 다른 기준을 ‘도형’에서 찾는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정오각형에 대각선을 그려 별 모양의 도형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배지로 사용했다. 또 육각형은 해바라기와 벌집 모양에서 눈송이에 이르기까지 자연 현상 전반에서 나타난다.
김봉태가 단순한 선과 면을 이어 만든 ‘윈도우’와 송중덕이 칠교판을 응용해 만든 작품 ‘추억의 공간’, 타원과 원뿔 등 각종 도형이 등장하는 ‘이미지-노스텔지아’는 도형이 보여주는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래전부터 미술가들은 사각형을 삼각형이나 육각형보다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도형으로 인식해왔다. 김봉태는 화려한 면과 선을 통해 정사각형의 이런 특성을 부각하면서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송중덕 역시 피보나치수열을 따르는 삼각형 조각 7개로 된 칠교판을 차례로 이어 새로운 형태를 창조했다. 타원과 삼각뿔, 삼각형으로 그린 또 다른 작품 역시 세 도형 간에 뗄 수 없는 연속성을 보여준다. 옆에서 삼각뿔을 보면 삼각형이고 이를 다시 비스듬히 자르면 타원이 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규칙과 부분이 주는 절대미
정승운의 작품 ‘무제’ 속엔 ‘숲’과 ‘집’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숲과 집이란 문자가 한번 나타나면 다음번엔 두 번씩 나타난다. 그 다음 번엔 세 번씩, 다시 그 다음엔 다섯 번이 나타난다. 이들 숫자 사이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두 문자의 묘한 규칙성을 따라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규칙이 발견된다. ‘1, 2, 3, 5, 8, 13, 21, 34, 55…’. 바로 13세기 이탈리아 수학자 피보나치가 토끼 한쌍의 번식력을 빗대 만든 ‘피보나치수열’이다. 연속한 두 항의 합이 바로 다음 항이 된다는 이 수열은 당시 그가 인구수를 계산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피보나치수열의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자주 발견된다. 사각형 한 변의 길이가 피보나치수열을 따르면 등각나선이 만들어진다. 등각나선이란 나선 위 임의의 점에서 그은 접선과 접점까지 반지름이 이루는 각이 모두 같은 도형을 뜻한다.이 문양은 주로 조개나 소라, 고동 같은 딱딱한 껍데기를 가진 패각류에서 자주 나타난다. 나선형을 띠는 동물들은 성장하면서도 껍질 모양과 비율을 그대로 유지함을 엿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피보나치수열을 따르는 이웃한 두 수는 황금비(0.618)로 수렴한다.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은 가로, 세로의 길이비가 황금비인 직사각형이 보기에 안정적이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마술가 조르쥬 쇠라의 그림 규격은 모두 황금사각형의 비율을 따르고 있을 정도다.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미술가 몬드리안의 작품에서도 역시 같은 원리가 발견된다.
그리스 여신상을 표현한 신치현의 작품 ‘비너스’도 이런 황금분할의 원칙을 잘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점은 고대 그리스 최고의 작품을 과감히 해체한 뒤 적분의 원리를 따라 작품을 재구성한 표현 방식이다. 작가는 흡사 컴퓨터 화소(픽셀) 같은 작은 우드락 조각을 켜켜이 쌓아 새로운 조각품을 완성했다. 작품은 도형을 세분한 뒤 넓이나 부피를 구하고, 다시 그 합을 구한 다음 한없이 세분했을 때 극한값으로 본래 도형의 넓이나 부피를 구하는 ‘구분구적법’을 잘 설명한다.
세상을 구현하는 힘 닮은꼴
구리선을 엮어 나뭇잎 잎맥을 표현한 정광호의 설치작품 ‘잎 42235’는 프랙탈 구조를 보여준다. 부분이 전체를, 전체가 부분을 닮은꼴이 반복된 이 형태 역시 자연 구조와 많이 닮았다.
1975년 IBM 연구원 만델브로트가 처음 사용한 카오스 프랙탈은 ‘불규칙적 형상의 집합’을 일컫는다. 분해와 해체를 반복한 이 형태는 해안선과 산, 혈관, 양치식물의 잎이나 구름에서 발견된다. 프랙탈은 자연계 불규칙성을 분석하고 설명한다. 통상적인 기하학에서 분석하지 않는 영역의 빗장을 푸는 열쇠인 셈이다.
한편 신체 일부분인 혀와 항문, 눈으로 만든 꽃을 반복해서 배열한 이중근의 작품 ‘달콤한 혀’는 도발적인 이미지로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처럼 반복을 소재로 눈을 현혹시킨 미술가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에른스트 에셔다. 그의 작품 ‘폭포 1961’은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다시 도랑을 타고 올라가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림은 90。를 이루는 삼각형들을 평면에 60。처럼 보이게 그려 넣어 기존 원근법을 뒤흔들었다. 그는 평면기하학과 사영기하학의 도형들을 직접 공부하면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한지선의 작품 ‘길’은 상상속 공간의 원근감을 평면에 가까운 부조 위에 극대화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포함해 르네상스 화가들은 2차원 캔버스 위에 3차원을 표현하는 방법을 구하기 위해 골몰했다. 수학적 기법이 이용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 종교가 최우선권을 갖던 중세를 떨치고 인간 중심으로 돌아오면서 인간의 시선에 포착된 형태를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인간의 눈에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까지 직선으로 연결한 뒤 그 사이에 캔버스가 오도록 한다. 3차원 세계에서는 평행한 직선을, 2차원 그림에서는 ‘소실점’이라는 한 점에서 만나는 것처럼 그려야 한다.
이처럼 미술의 원근법과 관련되는 수학은 퐁슬레가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가 제시한 ‘사영(射影)기하학’에서는 그 이전까지 기하학이 다뤘던 공간에 한 점을 첨가하는데 이를 ‘무한원점’이라고 부른다. 무한원점은 서로 평행한 직선들이 공유하는 점으로, 이런 면에서 미술에서의 소실점과 비슷하다. 이번 전시에는 이밖에도 정해덕은 안과 밖 구분이 없는 뫼비우스띠를 형상화한 ‘공간-춤H’을, 조형가 김난주는 나이테에 숫자 바코드를 붙여 시간의 흐름과 수의 관계를 형상화한 작품 ‘N880’을 출품했다.
미술과 접점찾기
최근 수학과 미술의 접점을 찾는 시도가 부쩍 늘고 있다. 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과 김흥규 박사가 최근 펴낸 ‘명화속 신기한 수학 이야기’(시공아트)는 미술사에 등장하는 국내외 명화 속에서 수학적 요소를 찾아내고 작품을 통해 수학을 얘기한다. 책은 독일 최고의 르네상스화가 뒤러 작품 ‘멜랑콜리아 1’과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에서 공통적으로 마방진의 개념을 짚어낸다.
또한 보티첼리와 라파엘로의 작품은 아름다운 인체의 황금비례와 원근법의 교과서라고 말한다. 한편 지난 7월17일까지 김종영 미술관에서는 ‘오늘의 작가’를 수상한 김주현씨의 개인전 ‘확장형 조각’전이 열렸다. 작가는 “나무막대 함석판을 규칙적으로 이으면 그 형태가 끝점을 연결한 도형처럼 묘한 질서를 드러낸다”며 수학과 미술의 접점을 설명한다. 이밖에 10억분의 1, 나노를 주제로 한 중견화가 홍정희씨의 개인전도 최근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