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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로 정신병 치료

정신부열증에 도전하는 사이버 정신의학

20대 정신분열병 환자 박 모씨가 병원을 찾았다. 발병한지 3년째인 그는 한때 평범한 학생이었다. 비교적 병세가 약한 편이지만 발병 후 그는 말 수와 의욕이 부쩍 줄고 주의를 제대로 기울이지 못한다. 방안에 틀어박힌 지 이미 오래.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하다.

병원을 찾은 박씨에게 의사는 약물치료 대신 가상현실을 이용한 사회적응훈련을 권한다.

사이버정신분열증클리닉에 들어선 박씨는 머리에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HMD)를 썼다. 말 그대로 머리에 쓰는 모니터다. 눈앞에는 곧 3차원 입체 영상이 펼쳐진다.

모니터를 통해 박씨의 행동을 주시하던 의사가 사회성이 떨어져 대화에 쉽게 끼지 못하는 그를 위해 상황을 설정했다. 첫번째 관문은 가상공간 속 인물(아바타)에게 접근해 말을 걸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훈련이다.

박씨가 ‘걷기’ 버튼을 누르자 가상공간 속 인물에게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갔다. 지나치게 다가가자 장치에서 “너무 다가가면 서로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박씨가 뒷걸음질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 “상대방과 시선을 마주치며 대화하기에 적당한 거리”라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제 ‘말하기’를 시도해야 할 때. 하지만 대인기피증이 있는 박씨가 ‘말하기’ 버튼을 누르기를 주저하자 아바타가 말을 걸기 위해 다가왔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과제가 시작된다. 의자가 하나 남았을 때 자리가 비어있는지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을 찾는 시험이다.

확인 절차 없이 박씨가 무턱대고 앉자 가상공간 속 자리 주인인 아바타가 등장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를 선택하자 다른 아바타들이 어색해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주어진 상황을 해결할 적절한 답을 고를 경우 다음 과제로 넘어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틀린 답이 불러올 상황을 화면에 띄우는 것이다. 이같은 경험을 반복하면서 환자는 스스로 자기 행동을 교정하는 방법을 배운다.

모니터를 통해 의사는 시시각각 변하는 박씨의 반응을 분석한다. 중요한 자료로 남았다. ‘걷기’와 ‘말하기’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흐른 시간은 환자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시간을 측정하면 상황을 해결하려는 환자 태도가 얼마나 적극적인지 평가할 수 있다.

연세대 정신건강병원 김재진 교수는 “사이버치료 기법은 지금까지 공포증 환자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적용돼 왔지만 정신분열증 같은 난치정신병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이같은 치료기법은 세계에서 처음” 이라고 강조한다.
 

치료실과 함께 있는 모니터링실. 치료받는 동안 환자의 모든 행동과 말은 시시각각 기록된다. 이 자료들은 훈련이 끝난 뒤 환자에게 제공돼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분석하는데 쓰인다.


떠오르는 첨단 정신의학

정신분열병은 여러 정신 질환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파괴적인 병으로 불린다. 병을 앓고 있는 환자수도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정신병학회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의 1%가 이 병을 앓거나 경험한 적이 있을 정도.

환청이나 망상 같은 심각한 증상 외에도 의욕이 급감하는 무기력증과 말 수가 적어지는 무언증상이 있으면 일단 정신분열로 의심해봐야 한다. 사람 사귀기를 기피하고 주의력이 산만한 것도 의심해 볼만한 근거다.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정신분열병은 심리적 요인으로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실제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뇌 발달 장애가 주된 발병요인”이라고 설명한다.

태아기나 초기 유년기에 뇌 발달과정에서 생긴 이상이 훗날 발현하는 생물학적 병이라는 얘기다. 지능이나 교육 수준, 부모의 양육태도, 성격 등은 무관하다는 게 권 교수의 설명이다.

정신분열병 치료는 그만큼 어렵다. 지금까지 치료에는 항정신병약물이 주로 사용돼 왔다. 약물을 복용하지 않고 완쾌됐다면 정신분열병이 아니었다고 말할 정도. 이들 약물은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을 억제해 각종 증상을 억제한다. 문제는 치료에 가장 효과가 있는 이들 약물이 다른 신경전달물질에도 작용해 신체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다는데 있다.

치료 효과를 부인하는 일부 환자의 약물 복용 거부도 약물 치료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정신분열병을 앓는 대다수 환자들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고 인정하더라도 약효를 부정한다. 치료 시기는 그만큼 늦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약물치료를 보완하는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가상현실을 정신병 치료에 이용하는 방안이었다. 펜티엄급 컴퓨터와 가상현실을 표현하는 그래픽카드,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와 센서가 약물과 의사 상담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처음 도입된 가상현실기술은 처음에는 ‘공포증’(phobia)과 같은 비교적 증상이 가벼운 질병 치료에 이용됐다.

미국의 조지아대와 워싱턴대 공동 연구팀은 비행공포를 갖는 환자를 위한 가상 비행기 실내 환경과 고소공포 치료를 위한 엘리베이터를 개발해 실험했다. 또 대중 연설을 두려워하는 환자와 외상후 후유증을 앓는 전쟁피해자, 거식증 환자 치료를 위한 다양한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이 개발되기도 했다.

단순 가상 체험에서 사이버 역할극까지

한양대 의대 의공학교실 구정훈 연구원은 “가상현실 치료는 환자가 사회에서 겪게 될 다양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치료 효과가 크다”고 강조한다. 실제 이 같은 치료요법의 효과는 임상 결과로 잘 드러나고 있다. 그 중 광장공포증 치료는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광장공포는 넓은 장소나 낯선 공간을 두려워하거나 무엇인가에 갇혔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증상을 뜻한다. 숨가쁨과 심장의 두근거림, 경련과 두려움은 광장공포증 환자들이 호소하는 대표적인 증상. 차안이나 시장, 엘리베이터 등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모든 공간은 환자에게 공포로 다가선다. 환자들도 이 같은 공황상태를 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한양대 의대 의용공학과 김선일 교수팀은 45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광장공포증 치료를 위한 운전 시뮬레이터를 실험했다. 이 가상 환경은 환자가 도심에서 시 외곽으로 운전하면서 겪게 될 각종 상황에 스스로 대처하도록 설계됐다. 반대편 차가 접근하고 교통 체증으로 터널 속에 차가 멈춰서는 등 환자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여러 상황이 반복해서 연출됐다. 치료 결과 치료에 몰두한 환자들은 실제 환경에서처럼 다양한 신체 증상을 호소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불안증상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비슷한 가상 엘리베이터 환경에서 폐쇄공포환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에서도 여러 번 상황에 노출된 환자의 장애척도가 현격히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이런 국내외 연구 결과를 반영하듯 일부 병원들도 가상현실치료장치 도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 중 지난 5월 13일 경기도 광주 연세대 정신건강병원에 문을 연 가상현실클리닉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정신분열 전문치료 클리닉. 이곳에서는 연세대 김재진 교수와 한양대 김인영 교수 공동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가상현실 인성재활시스템이 운영되고 있다.

난치병 중 난치병인 정신분열병은 정교한 치료법이 요구된다. 환자의 빠른 사회 복귀를 위해 제시되고 있는 치료 방법이 바로 사회기술훈련이다. 행동 교정 등 좀더 입체적인 치료를 통해 환자의 빠른 사회 복귀를 돕자는 것이다. 일상에서 맞부딪칠 상황을 설정하고 환자에게 어떤 역할을 통해 스스로 진단하게 하는 소위 ‘역할극’도 이런 치료 방식 중 하나다. 하지만 치료자의 연기력에 따라 치료 효과가 크게 달라지고 다양한 정신질환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은 지금껏 한계로 지적돼 왔다.

새 치료법은 일상에서 맞부딪치는 정교한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기존 사이버치료방법과 많이 다르다. 이에 대해 김재진 교수는 “정신분열증 환자는 자신의 욕구를 설명하고 감정에 대응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미숙해 조직적인 행동 학습이 필요하다”면서 “이번에 개발된 시스템은 치료 여건에 제약받지 않으면서 다양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장치”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환자의 반응에 따라 환경이 바뀌기 때문에 환자 상태에 맞는 단계별 치료가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특히 가상현실 속에서 환자의 행동을 수치로 측정하기 때문에 치료에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정신분열병 환자 16명과 정상인 15명에게 웃거나 화난 표정의 남녀 아바타를 보여주고 다가서는 정도를 측정한 연구팀의 실험 결과는 꽤 흥미롭다. 정상인의 경우 여성 아바타와 웃는 아바타에게 호감을 보인 반면 정신분열병 환자는 모든 아바타에게 동일한 태도를 유지했다. 특히 일부 환자들은 화난 표정의 아바타와 오히려 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밖에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과 방법을 측정하거나 가상의 상황에서 상충되는 문제를 푸는 방법을 평가해 치료에 반영하기도 한다.

치료 효과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특히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의 반응은 꽤 좋다. “(아바타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는 반응에서 “대인관계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의견까지 긍정적으로 답변한 환자가 많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는 방법을 익힐 수 있어 좋았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가상현실이 동원되지만 최료에는 환자와 심리치료복지사의 역할도 비중이 높다.


정서 표현 훈련

정신분열병 환자에게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 여러 가지 상황에서 감정을 표현하고 누그러뜨리는 법을 배운다. 먼저 비교적 편안한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정서 표현 방법을 익힌다. 그 다음 친구와 만났을 때, 직장 생활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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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박근태 기자
  • 사진

    박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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