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9일 서울 테헤란로에 자리한 산업기술재단이 주최한 인터넷종량제 토론회에 네티즌의 관심이 집중됐다. ‘인터넷 종량제’란 말 그대로 인터넷 사용시간과 데이터 전송량에 따라 요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뜻한다. ‘월 얼마’인 인터넷 정액제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온라인 사업자, 학계 및 소비자단체 관계자들은 KT와 하나로텔레콤이 추진하는 ‘새 인증제’로 최근 다시 촉발된 인터넷종량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패널로 참석한 사이버문화연구소 민경배 박사는 “종량제 논의는 단순한 요금인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사용 행태에 맞춰 다양한 요금제를 제시하는 ‘소비자 주권운동’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녹색소비자연대 전응휘 정책위원은 “일부 네티즌의 과도한 망사용은 다른 이용자의 인터넷 사용을 방해할 수 있지만 기술적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며 “종량제는 신규서비스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소비자에게 비용을 전가하려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하지만 이날 자리에는 당사자인 KT 관계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토론회 진행자로 나선 시사평론가 정관용 씨는 세미나 시작에 앞서 “인터넷 종량제 논의의 당사자인 KT측에 수차례 요청을 했으나 ‘참석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현재 KT측은 당분간 종량제를 공론화하지 않는다는 입장. KT 홍보팀은 일체의 입장 표명을 유보하고 있다. 정확한 입장은 오는 8월로 예정된 KT 사장 선임 후에나 나올 것으로 보인다.
각자 이유있는 찬반시각
이같은 인터넷종량제 논란이 처음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말. 일부 통신사업자들이 수익성을 문제로 종량제 도입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2003년 6월 한국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정액제의 한계를 지적한 ‘초고속인터넷서비스를 활용한 수익창출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요금체계를 요구하는 통신업체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수익악화, 불법복제 등으로 인한 트래픽 증가와 과다사용, 온라인상에서 저작권 보호의 어려움이 사업자가 내건 이유였다.
상위 5%의 사용자가 전체 데이터 전송(유통)량의 50%를 차지하고 있어 대부분의 가입자에게는 정액제가 오히려 불평등하는 것. 또한 종량제가 시행되면 파일교환서비스(P2P)를 통한 음란물이나 불법복제물 유통 등 불필요한 인터넷 사용이 줄어들어 업체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무제한 발송되는 스팸메일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통신업체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이런 사업자들의 구상은 처음부터 암초에 부딪혔다. 현재 인터넷 상에는 KT와 하나로텔레콤 등 통신사업자의 종량제 추진에 반대하는 운동이 조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일부 네티즌들은 KT가 계획대로 인터넷종량제를 시행할 경우 KT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엔펀’ ‘노KT’ ‘비씨파크’ 등의 사이트에서는 KT가 제공하는 전화와 휴대전화, 포털서비스를 모조리 해지하자는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인터넷종량제에 반대하는 ‘1000만명 서명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이들 반대측 입장은 분명하다. 종량제를 도입하면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활용도가 떨어져 인터넷 산업과 문화가 퇴보할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이다.
상명대 컴퓨터공학과 배경율 교수는 “네트워크 트래픽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과금체계로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방식”이라고 말한다. 배 교수는 또 “사용량이 많은 수도권의 경우 KT망 외에도 두루넷이나 지역케이블망, 한전과 서울시가 운영 중인 전용 통신선로가 많다며 이들을 공동 운영하는 방안이 있다”고 제시한다. 결국 KT가 주장하는 회선 부족 현상은 KT망에 한해 적용되는 말이라는 얘기다.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임종인 원장은 “종량제가 도입되면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의 인터넷 접근권이 제한받아 ‘민주적 전자정부’추진에 역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전응휘 위원도 “댓글달기, 온라인토론 등 온라인 참여문화를 크게 위축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뿐만 아니라 인터넷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거의 모든 산업의 경제 부담도 커질 것이라고 반대론자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이 때문에 다른 나라들도 정액제와 종량제를 병행 시행하는 사례가 많다. 지난해 5월 한국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30개 나라 가운데 15개국이 정액제, 9개국이 종량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종량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9개국 중 7개국은 정액제와 종량제를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정액제 없이 종량제만 실시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부정적 이미지 개선해야
무엇보다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는 대상은 네티즌. 토론회와 동시에 커뮤니티 사이트 엔펀에 개설된 토론방에서 한 네티즌은 “종량제가 실시된다면 현재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들이 유료화되지 않겠느냐”고 우려했다.
실제 현재 온라인 공간에는 종량제 실시 후 웹 환경을 패러디한 게시물이 활발하게 올라오고 있다. 그림이나 플래시가 빠지고 글자로만 된 배너광고 사례와 ‘텍스트 기반 커뮤니티’‘패킷 다단계 절약방법’ ‘EBS 수능 동영상 방송 중단’ 등 종량제 실시가 가져올 여파를 비꼬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패킷 계량 프로그램을 설치해 자신의 정보 사용량을 체크해 보는 네티즌들도 있다. 이에 대해 배 교수는 “종량제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부정적 의미를 바라보는 네티즌의 심리를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종량제 문제가 해결되려면 KT가 설비투자 수요 및 초고속인터넷 수익성 전망 등의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요금체계 다양화를 통한 과금시스템 개선에 시급히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네트워크 전문업체 디오넷 정택진 선임연구원도 “통신 품질향상, 스팸억제 등 순기능이 있는 종량제의 장점을 살리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만 신규설비 투자 재원이나 비용 부담 전가를 목적으로 한 종량제는 반대한다”고 말한다. 적게 쓰는 사용자들에게는 염가의 요금을 부과하고 다양한 사업 개발을 통해 수익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네티즌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최근 인터넷 접속시 아이디와 같은 비밀번호를 입력해 인증 받는 ‘새 인증제’를 놓고 일각에서 ‘인터넷 종량제 수순 밟기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현재 kt와 하나로텔레콤측은 단순히 사용자 관리용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이용시간과 정보량 측정이 가능해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 종량제 논란 주요 일지>;
2005년 4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인터넷 종량제 도입 관련 질의
2005년 4월 정치권과 네티즌, 인터넷종량제 반대에 따라 KT와 정면 충돌
2005년 4월 KT, “인터넷종량제, 결정 안됐다” 입장 후퇴
2005년 4월 정통부, 논란 확산에 따라 신중론 표명
2005년 3월 네티즌, 종량제 시행반대 KT 불매 운동 선언
2005년 3월 KT, 2007년부터 종량제 도입 표명
2005년 3월 인터넷종량제 시행을 위한 ‘신인증 프로젝트’ 재논의로 네티즌 논란 다시 촉발
2005년 3월 KT 주주총회에서 “종량제 실시에 대해 정부와 사업자간에 교감” 발언
2005년 3월 정통부 장관, 인터넷종량제 도입 의사 밝힘
2005년 1월 통신사업자 초고속인터넷종량제를 위한 새 인증시스템 수주경쟁 돌입
2004년 12월 KT 초고속인터넷 종량제 시행 계획 발표
2004년 5월 네티즌 1000만명 반대 서명운동
2004년 1월 KT, 정액제와 종량제를 결합한 부분정액제에 대한 의견 발표
2002년 말 인터넷서비스 제공사업자, 초고속인터넷 종량제 도입 처음 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