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공기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진공에 대한 관심과 맞닿아 있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연이 진공 상태를 싫어하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 아무 것도 없는 완전히 텅 빈 공간 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1643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토리첼리는 실험으로 진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토리첼리는 긴 유리관에 수은을 채우고 수은이 담긴 그릇 위에 그 유리관을 뒤집어 세운 다음 유리관의 수은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관찰했다.
유리관의 수은은 대기압과 평형이 되는 위치까지 내려갔다. 결국 유리관에서 수은이 내려가고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은 공기가 없는 완전히 빈 공간인 진공이었다.
토리첼리가 진공을 만들어 냈지만 여전히 자연 상태에는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토리첼리가 진공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믿는 사람들조차 자연에는 빈 공간을 채우려는 경향이 있어 진공은 흔하지도 않고 불안정하다고 믿으며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 중에는 영국의 화학자 보일도 있었다. 보일은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공기의 탄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처음으로 공기가 빈 공간을 채우려는 경향을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은 17세기 독일의 물리학자 폰 게리케일 것이다. 그는 아귀가 잘 맞는 두 개의 청동 반구를 만들었다. 두 개의 반구를 붙여놓고 끓는 물의 증기를 이용해서 반구 속의 공기를 빼낸 후 다시 냉각시켜 진공을 얻었다.
이 때 두 개의 반구를 양쪽에서 말로 끌어 떼어보려고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맞붙은 반구 바깥에서 공기가 미는 힘이 두 개의 반구가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힘이라고 추측했지만 공기의 팽창력을 분명하게 증명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일은 공기의 탄성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실험을 고안했다. 자신의 조수였던 로버트 훅과 함께 만든 기구는 비교적 간단했다.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은 ‘J’형 유리관을 준비해 짧은 쪽 끝을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막았다. 그리고 유리관에 1인치 단위로 종이를 붙여 눈금을 표시했다. 유리관의 열린 끝으로 수은을 넣으면서 유리관을 가끔 기울여 막힌 쪽의 공기가 눌리지 않도록 공기를 통하게 했다.
보일과 훅은 유리관에 어느 정도 수은이 차고 막힌 끝부분의 공기가 바깥과 격리되더라도 그 압력이 바깥 공기와 같아지면 유리관을 고정하고 수은을 더 부었다. 유리관에서 막힌 끝부분에 있는 공기의 부피가 원래 부피의 절반가량이 될 때까지 수은을 계속 채웠다. 이 때 더 채워 넣은 수은의 양을 쟀더니 유리관에 표시한 눈금으로 29인치였다.
이번에는 J형 유리관을 더 큰 유리관에 넣고 큰 유리관의 공기를 뺐다. 그랬더니 작은 유리관 안의 공기가 용수철처럼 수은을 밀어내 수은이 분수처럼 작은 유리관에서 큰 유리관으로 뿜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실험은 공기의 탄성이 빈 공간으로 공기가 이동하는 힘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현재 그 유명한 ‘보일의 법칙’으로 알려진 결과를 이 실험을 하다가 부수적으로 얻었다는 점이다.
보일과 훅은 추가한 수은의 무게와 유리관에서 막힌 끝부분의 공기의 부피 변화를 관찰해서 기록했다. 그들은 그 기록을 토대로 일정한 온도에서 공기의 부피와 압력이 반비례한다는 규칙성을 발견했다. 바로 그 규칙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보일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보일의 법칙을 발견한 보일과 훅은 온도의 변화에 따른 부피의 변화도 관찰해 보려고 실험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들은 상온에서 실험을 했다. 온도를 낮추기 위해 젖은 천으로 유리관을 싸매고 유리관 속의 변화를 관찰했지만 약간 부피가 줄어든 것 같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의미 있는 가설을 세울만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유리관에서 막혀있는 끝부분을 조심스럽게 촛불을 사용해 가열했을 때는 젖은 천으로 냉각을 시켰을 때보다는 눈에 띄게 공기의 부피가 늘어나는 것을 관찰했다. 하지만 결국 온도와 공기의 부피 사이에서 규칙적인 관계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위의 실험은 기체에 대기압보다 높은 압력을 가하면서 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압력을 줄여가면서 실험을 하면 어떻게 될까? 기체의 부피가 늘어나면 압력은 줄어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보일은 조금 다른 실험 장치를 고안했다.
그는 백조의 날개 깃대 굵기 정도 되는 가는 유리관을 준비했다. 그리고 유리관에 종이를 붙여 1인치 단위로 표시했다. 그런 다음 유리관에 1인치 가량의 공기를 넣은 채 밀랍으로 봉했다. 이 유리관에 열을 가하면 공기가 팽창하면서 밀랍이 밀려나는데 공기가 팽창한 상태에서 냉각시켜 밀랍을 굳히면 유리관 안의 공기 밀도는 낮아진다.
이런 방법으로 유리관 안의 공기 부피를 2배로 늘렸더니 공기의 압력이 대기압의 절반 정도로 낮아진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물론 실험에서 약간의 오차가 발견됐는데, 보일은 이 오차가 수은에 포함돼 있던 공기와 유리관 안에 남아있던 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보일은 자신의 실험 결과를 일반적인 법칙으로 확장하는데 조심스러웠다. 그는 압력이 아주 세지면 공기가 자신이 관찰한 것과 같은 양상을 띨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19세기 말에 가서야 얻을 수 있었다.
프랑스 물리학자인 에밀 아마갓은 1879년에서 1882년 사이에 기체를 갖고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이를 통해 대기압보다 압력이 400배 높아지면 기체가 보일의 법칙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을 관찰했다.
아마갓은 기체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입자나 분자로 이뤄져 있다면 아무리 센 압력을 가해도 입자의 부피보다 작은 부피로 줄어들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아마갓은 기체의 부피에서 입자 또는 분자가 차지하고 있는 부피를 뺀 부피가 기체의 진짜 부피라고 할 수 있고 그 부피는 보일의 법칙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체의 부피가 분자의 부피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면 여전히 보일의 법칙은 압력과 기체의 부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보일은
1627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로버트 보일은 14명이나 되는 대가족의 막내였다. 아일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콕의 백작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유복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여덟살에 사립학교 이튼에서 4년간 공부한 뒤 스위제네바로 옮겨 수학을 배웠다. 그곳에서 보일은 평생 과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벼락이 심하게 치던 날 벼락이 자신을 비껴간 것이 신이 자신에게 준 사명을 다하도록 보호해 준 것이라고 생각한 보일은 자연의 비밀을 밝혀 신의 영광을 증명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시민혁명이일어나면서 영국으로 돌아온 보일은 당시 사귄사무엘 하틀립을 통해 의학에 눈을 떴다. 보일은 화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처음으로 화학에 관심을 가진 것도 약을 만들기 위한 시도와 관련이 크다.
재ㆍ현ㆍ실ㆍ험
지금은 중학교 1학년만 되면 보일의 법칙을 배운다. 그리고 보일의 법칙을 실험으로 재현하는 것도 아주 간단하다. 주사기, 고무마개, 앉은뱅이저울, 그래프용지, 그리고 바세린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보일이 처음 실험결과를 발표했을 때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당시 유명한 철학자였던 토마스 홉스는 실험과학이 자연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철학의 제 1원리를 위배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빈 공간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일이 진공을 만들 때 공기를 빼내는 과정에서 미세한 공기가 그 속으로 빠르게 빨려들어간다고 설명했다. 보일이 만든 진공 속에서 촛불이 꺼지고 새가죽는 것은 그 공간이 비었기 때문이 아니라 미세한 공기가 그 공간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었다. 홉스의‘리바이어던’과 국가 권력에 대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많지만 진공에 대한 그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아 홉스의 주장은 그냥 묻혀버렸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