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는 약속시간에 늦었을 때 어떻게 연락했는지 까마득하다. 만약 컴퓨터가 없다면 숙제나 업무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만 해도 난감하다. 휴대전화나 컴퓨터 같은 전기전자제품이 필수인 시대다.
그런데 최근 전자제품에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포함돼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문제의 물질은 전자제품을 제조할 때 첨가하는 난연제 성분. 종이에 불을 붙이면 쉽게 타지만 난연제를 넣은 전자제품은 불이 잘 붙지 않는다. 난연제가 불에 타지 않고 열에 잘 견디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컴퓨터 외장재, 휴대전화 케이스, 노트북 배터리 등에 대부분 난연제 성분이 들어있다. 환경전문가들은 난연제가 전자제품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공기에 배출돼 사람이나 동물에게 신경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발암물질 다이옥신과 구조 비슷
여러가지 난연제 가운데 전기전자제품에는 브롬(Br)원소를 갖고 있는 브롬 난연제가 많이 사용된다. 불에 타려면 산소가 필요한데, 브롬은 연소 중에 산소가 반응하지 못하도록 방해해 제품이 잘 타지 않게 한다. 이 같은 난연 효과는 브롬보다 요오드(I)가 더 좋지만, 요오드는 제품에 첨가하기가 어렵다.
브롬 난연제는 1920년대부터 플라스틱, 건축재, 형광등, 소화기 등에 쓰였다. 그 후 전자제품 회사들도 1970년대부터 컴퓨터나 휴대전화 등에 브롬 난연제를 첨가하기 시작했다. 브롬 난연제는 그 종류만 해도 수백 가지에 달한다. 그 중 폴리브롬화바이페닐(PBB)과 폴리브롬화디페닐에테르(PBDE)가 가장 난연 효과가 뛰어나고 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물질들이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과 화학구조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 특히 PBDE가 다이옥신과 가장 유사하다. 산업공정이나 쓰레기 소각공정 중에 발생하는 다이옥신은 호흡기를 통해 인체에 들어가 신경계와 내분비계에 교란을 일으키거나 암을 발병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은 동물실험 결과 브롬 난연제가 다이옥신처럼 생식이나 신경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 유독물질과 질병 등록청(ATSDR)의 연구팀은 브롬 난연제가 인간 태아의 뇌에도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일부 전기전자제품 회사들은 브롬 난연제가 제품 밖으로는 배출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환경전문가들은 주로 전자제품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브롬 난연제가 미세한 먼지 형태로 대기에 배출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인의 혈액과 모유에서 브롬 난연제 성분이 검출됐다. 스웨덴의 전자제품 재활용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혈액에서 브롬 난연제가 검출됐다는 보고도 있다. 최근 일본 소각장에서도 브롬 난연제가 검출됐다.
게다가 최근에는 청정지역으로 알려진 북극마저 브롬 난연제에 노출된 상황이다. 노르웨이 극지연구소 독성연구팀이 지난해 북극흰갈매기와 북극곰에서 브롬 난연제 성분을 발견한 것. 연구팀을 이끈 윙 가브리엘슨 박사는 “브롬 난연제 성분이 바람이나 해류를 타고 오염원에서 멀리 떨어진 북극까지 전달됐을 것”이라며 “이는 브롬 난연제가 빨리 분해되지 않고 체내에 축적돼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증거”라고 경고했다.
브롬 난연제 전자제품 수출 난항
이에 유럽연합(EU)은 2003년 ‘특정 유해물질 사용제한 지침’(RoHS)을 공포했다. 전기전자제품을 제조할 때 유해물질 첨가를 본격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한 것. 유럽연합이 지정한 유해물질은 브롬 난연제인 PBB와 PBDE, 중금속인 수은(Hg), 납(Pb), 카드뮴(Cd), 크롬(Cr)의 6가지다.
현재 유럽연합은 이 물질들의 농도가 각각 일정 수준 이하인 제품만 유럽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는 2006년 하반기부터는 6가지 유해물질이 조금이라도 들어있는 전자제품은 판매를 전면 금지할 예정이다. 브롬 난연제를 넣은 전자제품은 유럽시장 수출이 사실상 막히게 되는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전자제품에 브롬 난연제 성분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를 분석할 수 있는 표준기술조차 마련되지 않은 실정이다.
체내에 축적돼 있는 브롬 난연제는 혈중 농도가 나노그램(ng, 1ng=10-9g) 수준으로 매우 낮은데다 비슷한 구조의 종류가 200가지가 넘기 때문에 분석이 매우 어렵다. 6가지 유해물질 중 중금속은 다양한 분석방법이 개발돼 있지만 브롬 난연제는 세계적으로도 아직 공인된 표준분석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난연제 물질로 대체하자니 브롬 난연제만큼 난연 효과가 뛰어나고 값이 싼 물질을 찾기가 어렵다. 또 브롬 난연제를 첨가할 수 있도록 전자제품 외장재나 부품 등의 물리·화학적 성질을 조절해둔 터라 다른 난연제를 쓰면 그에 맞춰 전자제품의 물성을 변경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전자제품을 수출하려면 규정된 난연 등급을 반드시 갖춰야 하니 난연제를 넣지 않을 수도 없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인 셈.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국내 전자제품 관련 업체들도 수출에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SDI 중앙연구소 분석팀은 이 같은 국제 환경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테스크포스팀을 꾸려 브롬 난연제의 분석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분석팀은 지난 2003년 하반기부터 첨단장비를 확보해 최근 브롬 난연제 분석을 위한 자체 표준기술을 개발했다. 전자제품을 냉동분쇄기로 잘게 부숴 가루로 만든 다음 자동추출장비와 고분해능 질량분석기로 브롬 난연제 성분을 검출해내는 것. 이 방법으로 2004년 부터 자회사 모든 부품의 브롬 난연제를 조사하고 있다.
분석팀은 “이 분석방법이 국제 표준기술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국내외 여러 학회와 관련 기관들을 통해 검증을 받는 중”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안전지대 아냐
분석팀 책임연구원인 유해물질 분석 전문가 김병훈 박사는 올해 1월 국제 환경전문저널(Science of the Total Environment)에 국내 최초로 인체 혈액 중에 있는 브롬 난연제 성분을 분석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김 박사는 포항공대와 공동으로 국내 수도권 폐기물 소각장에서 일하는 근로자와 인근 주민들의 혈액을 채취해 브롬 난연제 농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국내 다른 지역 주민들이나 노르웨이, 스웨덴, 일본 사람들보다 브롬 난연제의 농도가 훨씬 높게 나타났다. 소각장 근로자의 경우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혈중 브롬 난연제 농도가 더 높았다.
연구팀은 또한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개구리에 다이옥신 유사물질을 찾아내는 미생물을 넣어봤다. 이 미생물은 유전공학 기법으로 다이옥신 유사물질로 인해 세포가 손상을 입으면 빛을 발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물고기와 개구리의 체내에서도 미량의 브롬 난연제 성분이 검출됐다고. 우리나라도 브롬 난연제의 안전지대가 아님이 입증된 것이다.
“우리 주변 환경에도 브롬 난연제가 널리 분포해 있습니다. 전자제품 속에 들어있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낮은 농도로 말이죠. 따라서 극미량의 난연제 성분이라도 검출해낼 수 있도록 더 정확한 기술이 개발돼야 합니다.”
김 박사는 이렇게 강조한다. 전자제품 관련 업체들과 환경전문가들의 적극적인 공동 대책이 시급하다.
최근 세계의 눈이 우리나라의 전자제품을 주목하고 있다. 환경친화적으로 전자제품을 생산하고 폐전자제품을 처리하는 기술에도 다시한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