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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전화기 vs 음성전화기

성공하려면 가격, 기술, 마케팅 삼박자 맞아야

얼마 전 미국 최대의 장거리 전화회사 AT&T가 한 통신업체에 인수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AT&T는 1876년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 의해 전신이 설립된 후 1947년 벨연구소의 과학자들이 트랜지스터를 발명하고, 1970년에는 국제 장거리 전화 서비스를 시작하는 등 130년 동안 통신업계의 선두를 지켰다. AT&T의 몰락을 예고한 것은 아니겠지만 공교롭게도 이미 30여년 전 AT&T는 통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실패를 기록한 적이 있었다. 바로 화상전화기였다.

1964년 뉴욕 세계박람회장 AT&T 전시관 앞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관람객들이 AT&T 벨연구소가 내놓은 새로운 발명품인 화상전화기를 직접 시험하려고 모여들었던 것이다. 화상전화기는 일반 음성전화기에 5인치 크기의 화면이 달린 타원형이었다. 관람객들은 박람회장의 화상전화기로 디즈니랜드에 있는 벨연구소 연구원들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AT&T는 박람회 후 곧 뉴욕과 시카고, 워싱턴 간 화상전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첫 화상통화는 워싱턴에 있는 영부인 존슨 여사와 뉴욕에 있는 벨연구소의 우드 박사 사이에서 이뤄졌다. 이후 각 도시에는 3분 통화에 16~27달러의 요금을 내고 사용할 수 있는 화상전화 부스가 설치됐다.

첫 화상전화 서비스는 AT&T사의 기대와 달리 사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6개월이 지나도록 미국을 통틀어 설치된 화상전화기는 71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AT&T는 시기가 좀 지체될 뿐이지 곧 음성통신 시대가 사라지고 화상통신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믿음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한 과학저술가는 “화상전화기의 등장으로 거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붐비는 가게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없으며, 교통 정체도 사라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1968년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화상전화기가 일반 전화기를 대체하는 미래를 보여줬다. 벨연구소의 책임자였던 쥴리우스 몰나는 화상전화기로 상대방의 얼굴 표정을 직접 볼 수 있어 서로 더욱 친밀해지고, 결과적으로 화상통신이 통신 자체를 더 인간적으로 변모시킬 것이라고 설파했다.

화상전화기에 대한 이런 기대감들로 AT&T는 화상전화 상용화에 5백만 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했다. 1970년 드디어 피츠버그에서 가정용 화상전화 서비스가 시작됐다. AT&T는 1980년이 되면 화상전화 서비스 가입자가 12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벨연구소에서도 1969년 5월 연구소지 ‘Record’를 화상전화 특집호로 꾸며 화상전화의 장밋빛 미래를 예언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록 피츠버그에서 화상전화기는 겨우 32대가 팔렸을 뿐이었다. 시카고에서는 사정이 나아 1973년에 화상전화 서비스 가입자 수가 435명에 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츠버그에서의 실패로 1973년 AT&T는 두 번째 화상전화기 모델 상용화 계획을 포기했다. 결국 뉴욕 박람회장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화상전화기는 그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1978년 무렵에는 화상전화기를 보기 위해 뉴욕의 벨연구소를 방문해야만 했다.

공학자들은 AT&T의 화상전화기가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나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화상전화기가 실패한 것은 표면적으로 기술과 비용에서 일반 전화기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70년 피츠버그에 설치된 화상전화기는 화상 신호 송신, 수신과 음성 신호용으로 세 개의 회선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 가정에는 음성 신호용 회선 하나만 설치돼 있었다. 화상전화기를 사용하려면 연간 1200달러의 회선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는 가구당 평균 연간 수입이 9800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소비자들에게 매우 큰 돈이었다.

또 화상 신호 전송에는 100만Hz 대역폭이 필요한데, 이는 당시 일반 전화의 음성 신호에 할애되던 대역폭의 330배를 초과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화상전화기에서 화면의 동작이 매끄럽게 재현될 수 없었다. 지금과 같은 비디오 압축 기술이 결여돼 있었던 것이다.

화상전화가 서로의 친밀감을 높여줄 것이라는 예측도 맞지 않았다. 소비자들은 화상통화로 인해 화면이 노출되면 서로의 은밀한 대화가 방해받는다고 느꼈다. 계속해서 상대와 눈을 맞추는 것도 불편했다. 음성통화가 주는 이점을 화상통화가 빼앗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이다. 1990년 AT&T는 새로운 비디오 압축 기술을 이용해 다시 한번 비디오폰을 내놓았지만 역시 시장 공략에는 실패했다.

최근에는 화상전화기의 실패 원인을 AT&T의 마케팅 전략 실패로 설명하기도 한다. AT&T는 음성통신에서 화상통신으로 옮겨 가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상전화의 특징에 맞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지 않았다. 화상전화기를 음성전화기의 대체품으로 여겼고, 소비자들은 앞선 기술을 좇아 자연히 시대의 변화에 조응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때문에 AT&T는 초기 화상전화 서비스 가입자들이 어떤 이유로 화상전화를 이용하는지, 이들이 일반 음성전화 이용자들과 어떻게 다른지 살피지 않았다. AT&T의 기술 중심주의와 화상전화의 기능에 대한 제한적 상상이 화상전화기의 수명을 단축시켰던 것이다.

2005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희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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