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 유럽에서 데려온 말이 조금 전에 주…, 죽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도대체 원인이 무엇이더냐?”
“독이 있는 허브를 계속 먹어서인 것 같습니다.”
1271년 아버지, 삼촌과 함께 이탈리아 베니스를 떠난 마르코 폴로는 중국 원나라를 여행하던 중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벼슬을 받아 변방지역의 관리가 됐다.
폴로가 유럽에서 데려온 말은 그곳에서 주변에 널리 분포해 있는 허브를 먹었는데, 허브에 포함된 독성분 때문에 발굽이 빠져버렸다. 그 말이 결국에는 죽고 만 것이다.
“거 참 이상한 일이 아니냐? 이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동물들은 독성 허브를 계속 먹고도 아무 탈 없이 잘 사는데 말이다.”
폴로는 동방 여러 나라를 여행한 체험담을 기록한 ‘동방견문록’에 이 일화를 기록했다. 현대에 와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유럽에서 온 폴로의 말은 당시 그가 벼슬을 하던 원나라 변방지역의 토양에 다량 함유된 셀레늄(Se)에 중독된 것이었다.
이처럼 미량의 원소가 생물의 건강이나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분야가 바로 ‘메디컬 지질학’이다. 마르코 폴로의 이 체험담은 메디컬 지질학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셈이다.
메디컬 지질학(Medical Geology) 또는 지질메디컬 과학(Geomedical Science)은 인간과 동식물의 건강과 지질학적 요인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 지리적 분포에 따른 환경적 요인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내는 분야다.
원소 부족하거나 넘치면 질병 생겨
메디컬 지질학은 서양의 경우 기원전 히포크라테스로부터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질병에 적합한 치료제를 연구하려면 환자가 사는 지역에서 마시는 물의 품질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건강과 사는 곳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믿음이 오래전부터 서양에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양에서도 질병을 치료하는 광물이나 암석인 광물생약에 대한 관심이 일찍부터 있었다. 중국 진·한 시대의 ‘신농본초경’, 우리나라의 ‘본초강목’과 ‘동의보감’ 같은 저서에는 수십∼수백종의 광물생약이 제시돼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의 메디컬 지질학에 대한 관심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무기질 원소가 미량이나마 인간과 포유동물의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 사례가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고립된 내륙 지역인 알프스 지방의 기록이다. 이 지역의 토양과 물에는 요오드(I) 성분이 적다. 그래서 알프스 지방에 사는 사람과 포유동물의 경우 다른 지방보다 체내에 요오드 성분이 부족해 갑상선종이나 신체의 발육이 부진해지는 크레틴(Cretin)병이 많이 생겼다. 미국의 한 학자는 1만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이 요오드 부족에 의한 크레틴병에 걸려 멸종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소(F)를 포함한 지하수의 광물질은 화강암 같은 주변 암석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불소 성분이 적정량 함유된 지하수를 오래 마신 지역의 주민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치아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초반 음용수 내의 불소와 충치 관련성을 규명한 이 같은 결과에 따라 1945년 미국 뉴욕주와 캐나다 온타리오주를 시작으로 많은 나라에서 음용수에 인위적으로 불소화 처리를 하게 됐다. 현재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권장에 따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62개국에서 수돗물의 불소화를 시행해 충치 예방에 효과를 거두고 있다.
광물이나 토양에 함유돼 있는 셀레늄은 전립선암 같은 질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입증되면서 선진국에서 1990년 중반 들어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한 무기질이다. 그 전까지는 셀레늄을 과잉 섭취한 말과 소가 발굽이 빠지거나, 적게 섭취한 양과 염소가 심장 근육에 이상이 생기는 심근증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는 정도였다.
최근 사회적으로 관심을 끄는 메디컬 지질학의 주요 연구는 발칸 지방의 석탄(갈탄)과 신장병에 걸린 마을 주민 간의 연관성 규명, 비소와 카드늄 등 유해물질이 포함된 황사로 인해 인간생활에 야기된 변화 규명, 노후된 전력 장비에서 방출되는 미세 입자와 폐암과의 연관성 규명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황사 연구가 사회·경제적으로 큰 관심사로 여겨지고 있다. 최근 중국의 공업화 급진전에 따라 과거보다 오염물질이 더 많이 포함된 황사가 우리나라에 날아들 것으로 예상되면서 황사 성분에 대한 메디컬 지질학적 연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중독성 금속 다시 보기
산업화에 따른 인간생활의 발전과 함께 지구에는 유해물질이 점점 증가해왔다. 그 결과 자연적으로 균형을 유지해온 92개 원소들의 부존 함량이 턱없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많아지는 등 불균형이 초래됐다. 인간활동 뿐만 아니라 화산폭발 같은 현상 역시 수십억t의 마그마와 수천만t의 아황산가스, 수년 간 지구의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에어로졸을 만들어 내며 자연환경의 균형을 깬다.
이렇게 생긴 환경적 불균형은 인간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줬다. 미네랄 성분의 균형이 깨지면서 장기적으로 특정 지역에 고립돼 식생활을 해결해온 인간의 건강에 그 영향이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광물질에서 나온 칼슘(Ca), 마그네슘(Mg), 철(Fe), 구리(Cu), 아연(Zn)은 동식물의 생존에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과다하게 섭취했을 때는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비소(As), 카드뮴(Cd), 납(Pb), 알루미늄(Al)과 같은 원소는 인간에게는 치명적인데 비해 다른 동식물에게는 비교적 영향을 적게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메디컬 지질학 연구를 통해 비소와 같은 중독성 금속에 대해 새로운 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자연상태에서 철산화물로부터 방출돼 지하수로 유입되는 비소는 맹독성 물질로 간주돼왔다. 그러나 최근 적절한 양을 섭취하는 것은 건강에 이롭다는 보고가 나왔다. 특히 혈액암 치료에 유익하다고 알려졌으며, 수면장애, 결핵, 피부병 치료제나 건강보조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비소는 기생생물에 의한 질병이나 백혈병 등의 치료제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유익성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광산개발지역에서 비소에 의한 지하수 또는 토양 오염은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중금속 중독을 일으키는 등 여전히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하다.
메디컬 지질학은 이처럼 지구환경의 구성물질이 인간에게 이롭거나 해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의학과 접목 가능한 환경기술(ET)로서 메디컬 지질학 연구는 앞으로 크게 활성화될 것이다.
메디컬 지질학은 병리학, 유행병학, 보건학, 생물생태학, 독성학, 인문·사회과학과의 협동 연구가 요구되는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영역이기에 대형연구개발사업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메디컬 지질학의 선구자들
1996년 결성된 국제지구과학연합(IUGS) 내에는 ‘국제 메디컬 지질학 실무그룹’이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 그룹에는 50개국의 300여 과학자들이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 지질조사소(USGS)의 핀켈만 박사, 국방병리연구소(AFIP)의 센티노와 물릭 박사, 스웨덴 지질조사소(GSS)의 셀리너스 박사 같은 학자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제 메디컬 지질학 실무그룹은 국제연합(UN) 전문기구인 유네스코(UNESCO) 주관으로 2000년부터 5년 간 추진되고 있는 국제 지질학대비 연구 프로젝트(IGCP)를 통해 중금속이 인간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중점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지난 2003년 말 호주 캔버라에서는 국제 지질학대비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건강과 환경’이라는 메디컬 지질학 단기강좌가 열리기도 했다. 이 강좌에서는 철의 독성과 철이 인간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됐으며, 환경건강, 건강병리, 지구화학, 중금속 연구에 관해 의·약학, 생물학, 지질학 학자들 간 활발한 정보교류가 이뤄지기도 했다.
국내의 경우 외국에 비해 메디컬 지질학이라는 개념이 아직은 생소하다. 그러나 몇몇 연구팀들이 단위 연구실 규모로 활발하게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특히 폐광산 지역을 대상으로 비소와 같은 중금속 오염 방지와 복원 관련 연구가 활발하다. 광주과학기술원 김경웅 교수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이평구 박사팀, 서울대 전효택 교수와 세명대 정명채 교수팀, 고려대 윤성택 교수팀 등이 지속적으로 이 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 부경대 박맹언 교수팀은 90년대 중반 이래로 철을 함유하는 광물을 광물생약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