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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없이는 의학도 없다”

의학 대중화 운동 벌이는 세계 최대 연구소 미국립보건원 NIH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30분을 달리면 전형적인 미 동부의 평범한 한 소읍을 만난다.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시(市). 이곳에는 3억 미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미 보건부 산하 기관들이 밀집해 있다. 우리에겐 NIH와 FDA로 익히 알려져 있는 미국립보건원과 미식약청도 바로 여기에 있다.

NIH는 인류의 질병퇴치와 건강증진을 목표로 설립된 연구기관으로 국립암연구소(NCI), 국립인간게놈연구소(NHGRI) 등 27개의 부속 연구소와 기관을 거느린다. 지금도 9600여명이 넘는 의학자와 생화학자, 생명공학자들이 이곳 40만평 부지에 들어선 80여개 건물에서 인간 생명의 비밀을 푸는데 여념이 없다.

그렇다고 NIH가 과학자들만의 ‘성역’은 결코 아니다. 일반 미 국민은 물론 낯선 이방인에게까지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턱 없는 NIH.’ 이것은 9.11 이전까지 NIH가 지향해온 오랜 운영 방침이다.
 

NIH 핵심 책임자들의 사무실이 밀집해있는 섀넌관. 건물번호 1번이다.


질병 극복에 매스미디어 적극 활용

상당수의 미국민은 ‘보건’(Health)이란 단어를 볼 때마다 ‘NIH’를 떠올린다. NIH가 이처럼 국민들에게 깊게 각인된 것은 오랜 대중화의 노력 때문이다. ‘대중과 호흡하는 의학’이란 NIH의 정책 방향이 잘 드러난 부분이 바로 홍보 방식이다.

모든 연구결과를 제때 신속하게 공개하는 것은 NIH의 오랜 홍보스타일이다. NIH 언론 홍보팀은 주당 평균 12건 이상의 보도 자료를 작성해 배포한다. 단체장의 치적이나 행사 소개를 위주로 하는 한국과 달리 보건원 산하 27개 연구소가 매일 쏟아내는 각종 연구결과와 통계조사가 주된 내용이다. 또한 출입기자와 담당 연구원들이 직접 만나 질의하는 간담회도 주당 서너 차례씩 열린다. NIH의 발표 자료가 미치는 파급력이 큰 만큼 정확한 보도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NIH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의학 생명공학계에 미치는 파급력은 매우 크다. NIH의 한해 연구비 예산은 270억달러(약30조원). 154억달러를 쓰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1.75배, 7조7868억원의 예산이 책정된 우리나라 정부 전체 연구개발비의 4배에 달하는 액수다. 이렇게 천문학적 연구비를 사용하는 세계적인 연구소인 만큼 매주 공개되는 보도자료의 질은 웬만한 연구보고서 저리가라다.

AFP, AP, 로이터 등 세계 주요 통신사와 과학잡지들이 언제나 NIH의 보도문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위성과 라디오를 이용한 홍보 방식은 NIH의 저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현재 NIH는 위성과 라디오를 통해 원내에서 열리는 각종 세미나와 발표, 행사 실황을 송출할 수 있는 자체 시설을 갖추고 있다. 미국 내 각 방송사와 언론사들은 이렇게 송출한 방송을 생방송하거나 녹화해 방영한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나쳐빌딩에서는 ‘암말기 환자 안락한 죽음’을 주제로 일반 대상의 강연이 전국에 방송되던 중이었다. TV를 이용한 전략은 ‘매스미디어 종주국’ 미국에서 꽤 높은 홍보 효과를 거두고 있다.

NIH 전체 홍보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마크 스턴씨는 “연구 결과가 나오는 즉시 공개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관한 기초적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NIH의 사명”이라고 설명한다.

700만건 자료 모두 일반에 공개

NIH 소속 기관 중 대중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곳은 세계 의학의 보고 미국립의학도서관(NLM)이다. 핵공격에 견딜 수 있게 지어진 NLM에는 의학, 생물학, 물리학, 생명공학을 망라한 약 700만건 이상의 책과 마이크로필름, 사진이 보관돼 있다. 마치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을 연상케 하는 NLM은 의사와 의학연구자, 학생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된다. NIH측도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시설과 연결되는 셔틀을 운영하는 등 열람객의 편의를 적극 돕고 있다. 도서관이 개방되는 오전 9시만 되면 자료를 열람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이 도서관의 역할은 단순히 자료 보관과 제공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도서관측은 인터넷 서비스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다. 사실 NIH는 이미 1960년대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의학 정보의 전산화에 힘써왔다. 컴퓨터를 이용한 의학 지식의 소통에 일찍부터 눈 떴던 것이다.

도서관이 운영하는 대표적인 인터넷 서비스 ‘펍메드’(PubMed)는 세계 보건 의학의 지식 창고로서 NIH의 역할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현재 1200만건 이상의 각종 의학문서와 4000종 이상의 저널이 이 서비스를 통해 전문가와 일반인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연간 조회 건수만 5억여회, 한해 2500만명 이상이 이 서비스를 이용해 최신 의학 연구정보를 얻고 있다.

서비스를 관장하는 도서관 지하 컴퓨터실의 모니터는 ‘펍메드’의 인기를 잘 나타낸다. 기자가 방문한 동안에도 15초간 평균 클릭 회수만 4974회, 하루평균 541만7420건의 접속 회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편 펍메드가 전문가를 위한 서비스라면 ‘메드라인플러스’는 일반인에게 제공되는 정보서비스다. 도서관측은 매일매일 건강과 생활에 관한 최신 의학 정보를 알기 쉬운 용어로 풀이해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펍메드의 독특한 운영철학을 마련한 사람은 클린턴 행정부 당시 NIH 수장이던 해롤드 바머스 박사였다.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저널을 비롯해 모든 의학정보를 온라인에서 열람할 수 있게 하자고 주장했다. 누구나 새로운 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하자는 취지였던 것이다.

도서관 홍보를 맡은 마들린 맬라니씨는 “인터넷 서비스 덕분에 도서관을 찾는 열람객 수가 최근 급격히 줄었지만 온라인 방문객을 합하면 오히려 폭발적으로 증가한 셈”이라고 말한다. 2007년께면 현재의 부족한 공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 번째 도서관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대중 속으로 파고든 의학

NIH 연구진에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모든 과정이 연구 대상이다. 국립정신보건연구소(NIMH) 우울증분석연구팀의 책임자인 후세이니 만지 박사는 수년째 독특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한차례씩 열리는 이 프로그램의 정식 명칭은 ‘리얼 맨, 리얼 디프레션’. 우리말로 ‘남자는 진짜 우울하다’ 쯤으로 해석하면 될까.

최근 미국 성인의 우울증은 단순한 개인의 정신 건강 문제에서 벗어나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후세이니 만지 박사의 프로그램은 강인한 근육과 신체를 암묵적으로 강요받는 미국 성인 남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15~65세 사이의 각계각층의 성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를 조사한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남성이 여성보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여성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해야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이를 악용한 상업화가 평범한 미국 남성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만지 박사는 “일반인을 모아서 조사해본 결과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를 얻었다”면서 “그들의 적극적 참여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연구”라고 말한다.

만지 박사가 운영하는 진단 프로그램이 주목받는 이유는 조사에 참가하는 일반인을 단순한 연구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데 있다. 진단프로그램을 통해 연구자들은 향후 두뇌연구에 필요한 근거자료를, 참가자들은 그때까지 몰랐던 자신의 정신상태를 알게 된다. 과학자와 연구자들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모델과도 같은 셈이다.

NIMH 소속 한국인 과학자 김동규 박사는 “NIH에서는 이같은 집단진단 프로그램 외에도 일반인의 참여하는 연구 프로그램이 상당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 여성 사망률의 9%를 차지하는 심장계 질환과 심근경색, 청각장애, 불면증 등 현대인이 겪는 각종 질병의 원인과 문제점을 일반인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이들 소속 과학자들의 몫이다.

NIH가 사랑받는 또 하나 이유는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보건원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인 의학연구센터(CRC)에는 현재 연구와 치료목적의 병상 242여개가 마련돼 있다.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난치병 환자들은 누구나 소정의 심사를 통과하면 이 병동에 머무를 수 있다. 환자는 원하는 만큼 치료받을 수 있으며 치료 과정에서 얻은 결과는 다시 전 세계 의료기관에 공개된다.

미국 고등학생들은 누구나 소정의 심사를 거치면 NIH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다. 학생 참여 프로그램은 NIH 내 대표적인 교육 프로그램이다. 보건원 소속 대다수 연구소들은 각기 독특한 학생 참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선발된 학생들은 실험실에서 몇달간 정식 연구원을 돕는 보조 요원으로 일하게 된다. 매년 의대와 생명과학자를 꿈꾸는 수많은 학생들의 신청서가 각지에서 쇄도하지만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세계 의학의 중앙도서관 미국립의학도서관(NLM) 전경. 700만건 이상의 자료를 거대한 방공호 같은 자료실에 소장하고 있다.


일대일 상담으로 의학 영재 키운다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는 미국이지만 실제 참가 학생의 대다수는 중산층 출신이다. 이 때문에 연구소 측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극빈층 출신 학생에게 별도의 참가 기회를 주고 있다. 가난한 유년을 보냈지만 일약 스타로 떠오른 오프라 윈프리처럼 ‘과학계에서도 인생대역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전형적인 미국적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같은 인턴십은 대학과 석사,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NIH의 모든 교육프로그램은 ‘오피스 오브 사이언스 에듀케이션’, 우리말로 과학교육국(OSE)이 관장한다. 과학교육국은 의학보건과 관련한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고 NIH 미니의학교와 과학영화 같은 대중교육 이벤트를 일상적으로 열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미 본토 전역에서 165개 프로그램이 열려 NIH의 연구업적을 알리는데 톡톡히 기여했다.

워싱턴 지역에서 열고 있는 지역 프로그램과 진로상담 프로그램은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NIH 소속 과학자들은 이들 프로그램에 자원봉사자로 참여, 일반인과 직접 만난다. 그 가운데 특히 ‘대중을 위한 의학’ ‘의학영화제’ ‘국립암연구소(NCI) 자원봉사프로그램’ 등은 지역사회 호응이 좋다.

NIH 과학자의 성공 사례를 통해 진로상담을 해주는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라이프 웍스’(Life Works)라는 이 프로그램은 각기 다른 출신 배경을 가진 소속 연구원들의 성공담을 통해 진로를 고민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유용한 진학 정보를 제공한다. 어떻게 직업을 갖게 됐으며 어떤 연구를 하는지, 또 생명공학자로서 목표가 무엇인지를 상세히 설명해줌으로써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의학 생명공학 분야의 수준 높은 진로 가이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인류 보건, 우리 손에

NIH는 ‘공중 보건’이라는 명제 앞에 ‘최고’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연구소다. 그 명성은 NIH가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 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1939년 이래 100명 이상의 생화학자 의학자들이 바로 NIH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수행했다. 지난해 생리의학상수상자인 미국의 리처드 악셀 박사와 화학상 수상자인 어윈 로즈 박사 역시 NIH 연구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그리고 수상자 중 3명은 지금도 NIH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NIH에서 최근 한국 과학자들의 인기는 꽤 높다. 한국 과학자만큼 헌신적으로 일하는 외국인 연구자들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이종욱 박사가 취임한 이후 NIH 내 한국인 연구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취재 당일만 해도 전날 강연차 NIH를 다녀간 이종욱 박사 영향 때문인지 들뜬 분위기였다.

현재 NIH에는 이서구 김성진 박사 등 국내외에 잘 알려진 이름난 과학자들 외에도 정식직원 20여명을 포함해 약 300명의 한국인 학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생물학 생화학 의학 생명공학 등 각 분야에 걸쳐 각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립암연구소(NCI) 임선희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NIH의 밤은 한국 과학자가 지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에요. 건물마다 불 켜진 방에는 적어도 한국인 한명이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들릴 정도니까요. 그만큼 열정과 책임감이 많다고 할 수 있죠.” NIH 한국 과학자회 회장인 박무광 박사(NIDA, 국립약물중독연구소)는 “지금 이곳에서 젊음을 불사르고 있는 한국 과학자 가운데 세계적인 논문을 내놓을 사람이 머지않아 나올 것”이라며 “이들이 한국에 돌아가서 하게 될 일을 한번 기대해볼만 하다”고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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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박근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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