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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형 남자는 바람둥이?

혈액형 성격학, 과학적 근거 없다

 

B형 남자는 바람둥이?


친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
“회사 남자 동료가 소개팅에 나갔대. 한창 좋은 분위기에서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나 봐. 자기는 B형이라고 말했지. 그런데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지더니 결국 흐지부지 됐대. 요즘 B형 남자는 괴팍하거나 바람둥이라며 여자들이 싫어한다는 거야.”

지난 10월말 경영정보지 ‘월간CEO’의 조사 결과.
“국내 100대 기업 대표이사 93명의 혈액형을 조사한 결과 B형이 가장 많은 36명으로 38.7%를 차지했으며, A형이 24.7%, O형이 23.7%였다. 시대 변혁기에는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B형이 경영 전면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혈액형과 성격을 연관짓는 이야기가 화제다. 가수 김현정이 ‘B형 남자’라는 가요를 부른데 이어 이동건과 한지혜 주연의 영화 ‘B형 남자친구’도 내년초 개봉될 예정이다. 노랫말을 보면 B형 남자는 ‘여자를 잘 알고 표현을 잘 하지만 예민하며 욱하는 성격에 황당한 사고방식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 ‘B형 남자친구’ 의 주연배우인 한지혜(왼쪽)와 이동건. 영화는 ‘사랑마저도 제멋대로인 변덕쟁이 기분파 B형 남자와 그를 사랑하게 된 소심한 A형 여자와의 좌충우돌 로맨틱 코미디’ 로 묘사된다.


혈액형은 정말 성격을 좌우할까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결정된다는 ‘혈액형 성격학’은 이제 심심풀이로 보는 사주팔자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서점에는 혈액형과 성격을 연관짓는 수십 가지의 책이 나와 있다. 최근 대전 농협은 공제보험 담당 직원을 모집하며 “O형과 B형만 지원하라”는 공고를 냈다가 누리꾼(네티즌)이 격렬하게 항의하는 등 파문을 일으켰다. 농협이 혈액형을 제한한 이유는 ‘다른 혈액형은 추진력이 없다’는 것이다. 케이블방송에서는 혈액형 다이어트, 혈액형 공부방법에 대한 프로그램이 나왔다.

혈액형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01년이다. 당시 수혈을 할 때 피가 엉겨 붙으며 죽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칼 란트슈타이너는 혈액에 A, B, O형이 있다는 것과 서로 맞지 않는 혈액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로써 수혈에 일대 혁신이 이뤄졌고 그는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혈액형 성격학은 1927년 일본의 다케지 후루카와라는 철학 강사가 처음으로 주장했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 1970년대 일본 저널리스트 노미 마사히코가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을 쓰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1980년대에는 그의 아들 노미 도시타카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는 수십만 건의 데이터를 분석해 과학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정말 B형 남자는 제멋대로 구는 바람둥이에 O형은 사교적일까.

연세대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는 “영국에서 혈액형과 성격과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연구가 있었는데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심리학계에서는 혈액형 성격학을 별자리 성격학처럼 말도 안되는 가정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왜 혈액형 성격학이 이처럼 붐을 이룰까. 연세대 의대 김현옥 교수는 “혈액형 성격학이 인기가 있는 곳은 한국과 일본이 거의 유일하다”며 “혈액형이 상업주의에 이용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인관계가 매우 중요한 두 나라에서 사람들은 세상을 쉽게 분류하는 원리를 찾으려 하는데 혈액형은 매우 좋은 수단이다. 설령 틀리더라도 백지 상태인 것보다 덜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를 자칭 ‘혈액형 전문가’들이 이용하고 기업이 다시 마케팅 수단으로 바꾸고 있다. 김 교수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혈액형 비즈니스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혈액형 성격학이 지금처럼 널리 퍼지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충족적 예언’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B형이 제멋대로인 성격이라고 정의된다고 하자. B형인 사람은 무심코 제멋대로인 행동을 저지른 뒤 “내가 B형이 맞구나”라며 계속 그 행동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보며 혈액형 성격학이 맞다고 생각한다. 서은국 교수는 “혈액형 성격학을 굳게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동 중 잘 맞지 않는 행동은 무시하기 때문에 계속 그 믿음을 유지한다”며 “일종의 편견이나 선입관 효과”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혈액형이란 무엇일까. 핏줄 속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에는 설탕과 비슷한 당분 물질이 사슬처럼 붙어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 혈액형이 결정된다. A사슬(아세틸 갈락토사민)을 가진 사람은 A형, B사슬(갈락토스)을 가진 사람은 B형, A와 B사슬을 모두 가진 사람은 AB형,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O형인 것이다.

적혈구에 붙은 당분이 혈액형 결정
 

혈액형은 수혈에 매우 중요하다. AB형은 모든 혈액형의 피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O형은 모든 혈액형에 피를 줄 수 있다. ABO혈액형이 처음 발견된 것도 수혈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것에서 시작됐다.


우리 몸 안에 있는 특정 효소가 이 물질을 만들어 적혈구 표면에 붙이는데 어떤 효소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개인마다 혈액형이 결정된다. 이 사슬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로 혈액형 유전자는 인간의 9번 염색체의 끝부분에 있다. 염기 1026개로 이뤄진 혈액형 유전자는 사람의 유전자 중 중간 크기의 유전자다. 특히 A형과 B형은 서로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지만 이중 7개의 염기서열이 서로 다르다. O형은 이 유전자가 고장나 있어 해당 효소를 만들지 못한다. 만일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짓는다면 혹시 혈액형 유전자가 성격 유전자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올해초 ‘피는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펴낸 울산의대 권석운 교수는 “성격의 많은 부분이 유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격 유전자와 혈액형 유전자를 연관짓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강조했다. 권 교수는 “성격 유전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많지 않고 만에 하나 혈액형 유전자와 성격 유전자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일부 성격에만 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성격은 환경이나 양육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혈액형은 환경과는 무관해 성격을 혈액형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지적이다. 혈액형은 100% 유전이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성격을 단지 4개의 혈액형으로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혈액형이 A, B, O, AB형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MN형, P형, 루이스형 등 수십 종류의 혈액형을 갖고 있다. 이들은 수혈에는 상관없지만 DNA검사법이 없던 예전에는 친자식과 범인을 찾는데 이용되곤 했다. 다들 적혈구 표면에 붙어 있는 당 사슬에 따라 결정된다. 이중 유독 ABO 혈액형만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

미생물도 혈액형이 있다

과학자들은 혈액형이 질병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말한다.

1980년대 후반 연구결과 O형인 사람들은 콜레라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AB형은 거의 콜레라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이 병에 저항성이 강했고 다음이 B형, A형 순서였다.

반면 O형은 말라리아에 대한 저항성이 좀더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 O형은 성병에 덜 걸리고 다양한 암에 걸릴 확률도 약간 낮은 것으로 보인다.

영국 과학저술가 매트 리들리는 그의 저서 ‘게놈’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이 대부분 O형인 것은 특별한 진화적 압력 때문에 A형과 B형 유전자가 소멸됐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그가 지목한 진화적 압력은 ‘성병’이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이전에 북부 아메리카에서 발견된 뼈에서 같은 시대 유럽에는 없었던 성병의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 과학적으로 논란이 많아 단정하기 어렵다.

인종마다 혈액형의 분포는 조금씩 다르다. 한국인 중 가장 많은 혈액형은 A형으로 모두 34%다. 다음으로O형(28%), B형(27%), AB형(11%) 순서다. 일본인은 A형이 38%로 더 많지만 나머지 혈액형의 순서는 같다. 중국인은 O형이 42%로 가장 많지만 북경 지역 중국인은 B형이 32%로 최고다.

반면 영국인은 O형이 47%, 프랑스인은 A형이 47%로 가장 많다. 유럽인은 동양인보다 B형과 AB형이 매우 적은 편이다. 유럽에서는 ‘B형 남자’가 살기 어려운 어떤 원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대아산병원 혈액은행에 따르면 한국인 중 가장 많은 A형은 위암과 관상동맥 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다른 혈액형보다 다소 높고 O형은 십이지장궤양에 더 잘 걸린다. 왜 혈액형에 따라 잘 걸리는 병이 있는 걸까.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특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의 세포에 더 잘 침입할 가능성이 있다.

A혈액형을 가진 사람은 피 속에 β항체를 갖고 있다. B형은 α항체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A형과 B형의 피를 섞으면 α항체가 적혈구에 붙어 있는 B사슬과 결합하고, β항체가 A사슬과 결합해 피가 엉겨버린다. 이것이 A형과 B형이 서로 수혈할 수 없는 이유다.

울산대 의대 권석운 교수는 “사람의 피와 미생물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며 “미생물 중에는 사람과 똑같은 혈액형을 갖고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B형의 피에 침입한 A형 미생물을 생각해 보자. 피 속에 자신을 공격하는 항체가 가득 들어 있다면 이 속에서는 살아 남기 힘들다. 반면 A형의 피 속에서는 생존 확률이 좀더 높아져 병을 더 잘 일으킬 것이다.

동물도 다양한 혈액형을 갖고 있다. 특히 개는 사람의 A, B형과 매우 비슷한 혈액형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애완견은 수술을 할 때 다른 개로부터 수혈을 받곤 하는데 이때 혈액형을 맞춰야 한다.

최근 영국 과학계에서는 사람에게 4가지 혈액형이 골고루 있는 것은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한 방어를 균형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나왔다. O형은 바이러스 질병에 강하고 A, B형은 세균 질병에 더 강한데 두 가지 질병에 모두 방어하기 위해 인류는 4가지 혈액형을 골고루 유지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혈액형의 진짜 역할이 밝혀진다면 혈액형은 성격이 아니라 자신이 잘 걸릴 질병에 대비하는데 쓰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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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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