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가을, 손바닥 프린트가 찍혀있는 거대한 현수막이 드리워진 이곳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다. 오늘 밤은 인기 재즈밴드 O-Square의 공연이 있는 날이다. 잠시 후 시작될 공연을 앞두고 사람들은 저마다 손목에 튜브를 하나씩 차고, 빨대를 꽂아 음료수를 마시며 긴장을 푼다.
관객들의 입장이 끝나고, 서부영화에서나 봄직한 손잡이 없는 출입문 위로 커튼이 쳐지면서 무대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열광적인 함성과 함께 5명의 O-Square 멤버가 두팔을 번쩍 들고 힘차게 손바닥을 흔들며 등장한다. O-Square는 명성에 걸맞게 시작부터 매혹적인 리듬과 숨막힐 듯한 빠르기로 여러 악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단 그들의 연주에는 멜로디가 없다.
만일 세상 사람의 손가락이 모두 없어진다면 연주회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이올린 목을 짚어가며 연주할 손가락이 사라진 세상. 아마도 O-Square의 공연처럼 기존의 멜로디 악기는 거의 다 사라지고 타악기만이 연주될 것이다. 타악기는 나름대로의 발전을 이뤄 지금보다 더 다양한 소리와 리듬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이상 분산화음을 멋들어지게 연주할 피아노와 기타는 없을 것이고, 가슴을 파고드는 매혹적인 선율의 바이올린 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준 베토벤과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들과도 이별을 해야 한다.
손바닥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다지 열광할만한 스포츠도 없다. 손가락이 없는 야구선수들을 상상해보라. 글러브를 낄 손가락이 없으니 포수는 맨손으로 투수의 공을 받아내야 하고, 외야수는 평범한 플라이볼을 글러브가 아닌 가슴으로 받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한다. 타자는 배트를 움켜잡는 대신 손에 끼우는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고, 투수는 야구공을 감아쥘 손가락이 없어 커브와 슬라이더는커녕 직구를 던지려면 돌팔매라도 손목에 달아야 할 것이다.
손꼽아 숫자세기
손가락이 없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상상하고 있노라면, 손가락이 있음으로 해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손가락은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우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숫자의 개념은 알고 보면 손가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문명이 시작되고 난 이후 유럽, 동북아시아, 아랍 문명은 모두 10진법을 사용했다. 이는 손가락의 개수가 10개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우리말에서 수를 나타내는 표현의 어원을 살펴보면 손가락과 숫자, 그리고 10진법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우리말에 ‘다섯’은 손가락을 하나 둘 꼽아가다가 모두 ‘닫았다’는 말에서 온 것이고, ‘일곱’은 3(닐)이 굽어있다(곱)는 말이다. 즉 3개의 손가락이 굽어있다는 뜻. ‘여덟’은 열에 둘이 못 미친다는 것이고, ‘아홉’은 열(아)에 하나(홉)가 못 미친다는 뜻이다. 그리고 ‘열’은 굽었던 손가락이 모두 열렸다는 뜻이다.
시간의 초와 분에서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는 60진법 역시 손가락이 만들어낸 숫자 체계다.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사용되던 60진법은 손가락이 세마디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이라크, 터키, 인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아직도 60진법의 계산을 손을 이용해 하고 있다. 사람들은 손바닥을 펴고 엄지로 나머지 손가락의 마디를 짚어서 수를 세는데, 오른손의 엄지로 같은 손의 나머지 네 손가락의 마디를 모두 짚으면 12가 된다. 이 과정을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가며 5번 반복하게 되면, 총 60(=5×12)이라는 숫자를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손은 수학의 발달에 결정적인 교량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기수로 흔히 사용하고 있는 10, 12, 60이라는 숫자는, 우리의 손가락이 10개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됐고, 사람들은 손을 이용해 물건의 수량을 측정했다. 손동작은 이렇게 해서 기호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다시 음성으로 표현됐다. 사람들이 손동작과 음성 기호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게 되면서 숫자는 손가락을 벗어날 수 있었고, 문자로써의 숫자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된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손가락이 없었다면 분명 수를 인식하는 체계가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손가락이 없는 인류에게 10은 더이상 정상적인 사람의 손가락 개수를 나타내는 표현이 될 수 없고, 손가락의 마디를 꼽으며 12라는 숫자를 셀 수도 없다. 손가락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수의 개념이 발명될 수는 있었을까? 손가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인류 공통의 진법 체계인 10진법이 없었다면, 아마도 인도에서 발견된 0이 아랍으로, 다시 유럽으로 흘러가는 수학의 역사는 없었을 테다. 그리고 인류는 지금과 같은 견고한 수학의 상아탑을 쌓아 올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손가락
신경 생리학자인 프랭크 윌슨 교수는 그의 저서 ‘더 핸드’에서 손은 뇌의 계획과 프로그램에 따라 단순히 수동적으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뇌를 발달시키는 중요한 기관이라고 말한다. 적극적으로 집어 들고, 찌르고, 쥐어짜고, 만져보고, 배우고, 구별하고, 밀치면서 터득한 손의 감각이 뇌의 정교한 신경망을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인체 각 부위의 기능을 관장하는 부분을 뇌 위에 펼쳐 지도를 만들면, 뇌의 핵심 부분인 운동중추 사령실 면적의 30%가 손에 해당한다. 사령실의 크기는 운동의 정밀도와 복잡성에 따라 정해지는데, 손가락이 얼마나 정교한 정보 처리를 요구하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손과 손가락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이러한 신경 조직의 결합은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형태로 주어져 있지 않고, 서서히 형성돼간다. 긴꼬리원숭이의 경우 생후 6개월경부터 손동작이 정교해지면서, 다른 원숭이의 털에 붙은 이를 잡아주는 일종의 사회적 행위인 털 손질을 할 수 있다. 이는 긴꼬리원숭이의 대뇌피질의 운동뉴런 경로가 처음에는 약하게 형성돼 있다가 생후 6개월부터 발달하면서 그 결합이 점차 강해지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아기는 생후 몇달동안 손가락을 따로따로 움직이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장을 하면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모들이 아기와 함께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도리도리 잼잼 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또한 독일 콘스탄트대 토마스 엘베르트 박사는 1998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점자판독자들의 뇌가 손가락이 보내는 정보를 통해 스스로를 개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러개의 손가락이 보내는 정보를 뇌가 하나의 메시지로 통합시키는 과정에서 뇌의 재구성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류 문명 발전의 밑바탕인 언어 또한 손과 매우 밀접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도 있다. 손을 이용한 제스처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시각언어가 아니라, 어휘 기억장치의 문을 여는 열쇠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손가락은 단지 없으면 불편한 도구가 아닌, 인류에게 그들만의 특성을 부여해준 아주 특별한 기관이다. 손을 제2의 뇌라고 부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벙어리장갑을 낀 젊은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보면 귀엽고 순수해 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동시에 둔하고 어수룩한, 조금은 멍청해 보인다는 느낌 또한 갖는다. 벙어리장갑은 그 이름처럼 벙어리를 닮았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아무 말 없이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는 힘없는 벙어리를 닮았다. 나의 뜻에 대항하고 반박할 수단을 잃어버린 벙어리는 경계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기에, 긴장을 풀고 편안함을 느껴도 되는 존재다. 벙어리장갑은 말을 잃은 벙어리처럼, 우리에게서 손가락의 존재를 감춰버린다. 어쩌면 벙어리장갑에서 느껴지는 순수함과 어수룩함은, 우리가 무의식 속에서 손가락의 힘을 이미 깨닫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손을 들어 손가락을 바라보자. 혹시 음악과 스포츠를 만들어내고, 수학과 언어를 발전시켰으며, 지금도 우리의 뇌를 변화시키고 있을 자그마한 10개의 손가락이 가진 거대한 힘이 보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