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현의 가야금은 청아하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국악기로 꼽힌다. 손끝의 미세한 움직임을 타고 도는 단아한 소리와 아름다운 선율은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왠지 모를 향수를 안겨준다. 조용한 음악당 안을 흐르는 가야금 산조의 가락만큼 격조와 감동을 동시에 전해주는 것은 그리 흔치 않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악인들과 국악팬들 사이엔 큰 불만이 있었다. ‘우리소리에 맞는 제대로 된 공연장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공연장에서 울리는 가야금 소리를 좀더 생생히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란 생각이 건축가와 공학자들을 만나게 했다.
우리소리 맞는 국악당 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통 국악당을 짓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다. 지금까지 공연장들은 대부분 서양 음악의 기준에 맞춰 지어졌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이미 오래전 악기의 음향적인 특성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공연장 용도에 맞는 과학적인 음향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중요한 음향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잔향시간이다. 가령 공연장 규모나 공연 내용에 따라 설계자는 그에 맞는 잔향시간을 설정한다. 예를 들어 공연장 체적이 약1만m3에 좌석이 1천석인 경우 서양음악 기준에서 잔향시간 범위는 1.3-2.1초 사이다. 또 연극의 경우 1.2초, 영화 음향은 1.1초, 연사의 강연 소리는 1.0 초에 기준을 맞춘다.
사실 이런 기준은 오랜 세월에 걸친 실험과 관객을 대상으로 한 선호도 조사,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확정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에 소재한 ‘무지크페어아인잘’(Musikvereinssaal)은 서양건축음향 이론을 가장 잘 따른 현존 최고의 음악당으로 극찬을 받는다. 이 음악당은 객석에서의 잔향시간이 약 2.0초에 달하는 직사각의 박스형 건축물이다.
최근까지 국내 음악 공연장들은 이런 서양음악 기준에 맞춰 지었다. 심지어 기존 국악전문 공연장들까지도 서양악의 음향 기준을 그대로 쓰거나 부분적으로 보완해 지어졌다. 국악기 소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해 생긴 일이었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2002년부터 국악 음원의 성질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연구는 국악기 소리가 어느 방향으로 퍼지는지, 음의 높낮이에 따라 크기와 음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아보는 기초 조사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연구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우리악기는 그 종류만큼이나 소리 성질도 형형색색이기 때문이다. 현악기만 봐도 가야금은 손으로 줄을 뜯어서 소리를 내지만 거문고는 술대로, 해금은 활로 문질러야 한다. 악기마다 소리를 내는 방법과 소리의 성질이 각기 다른 것이다. 제대로 된 국악당을 짓기 위해서는 이런 기초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했다.
충북대와 KAIST 공동연구팀은 우선 가야금과 대금, 장고, 판소리와 창 등 대표적인 5개 음원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연구팀은 먼저 음향 특성을 조사하기 위해 ‘무향실’(無響室)을 설치했다. 일반적으로 마이크에 직접 도달한 소리만 이용하는 음향실험은 이처럼 소리가 반사되지 않는 조건에서 실시된다. 벽과 천장에 소리가 반사되면 원음에 대한 정보가 왜곡된다. 이를 막기 위해 무향실 내부의 천장과 주벽, 바닥 모두 소리를 흡수하도록(잔향시간이 0초) 특수 처리했다. 또 음원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진행하는 소리의 성질을 감안해 마이크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악기를 중심으로 수직과 수평면에 약 10°간격으로 일정하게 마이크를 설치한 것이다.
연주자 주위로 10° 간격으로 총 36개의 마이크가 설치됐다. 또 수직으로 0-90° 사이를 10° 간격으로 총 10개의 마이크를 설치했다.이런 실험 환경은 좀더 원음에 가까운 소리로 음향 성분을 분석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항이다.
장비 설치를 마친 연구팀은 곧바로 주파수를 올려가면서 악기별 소리 측정에 들어갔다. 실험에서는 7옥타브(1백25Hz-8kHz) 중 악기가 내는 소리 범위와 일치하는 5개의 주파수를 골라 사용했다.
주파수를 조정하자 악기마다 독특한 성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악과 관악, 타악까지 각각의 소리는 높낮이에 따라 진행하는 방향이 달랐다.
특히 가야금 소리는 서양음의 ‘라’와 ‘시’ ‘도’에 해당하는 4백-5백Hz대역에서 가장 크게 울렸다. 사람이 대화하는 주파수와 같은 높이다. 실험결과 가야금의 소리의 높낮이에 따라 소리가 퍼져나가는 방향도 크게 바뀐다. 낮은 음(2백50Hz)이 연주될 때는 지향성이 거의 없지만, 연주자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는 소리가 퍼지지 않는다. 그러나 5백Hz 이상에서는 소리가 주로 앞쪽과 뒤쪽으로, 그보다 높은 1kHz에서는 좌우로 잘 울려 나갔다. 수직 방향의 가야금 소리는 낮은음(저주파수)에서는 특정 방향으로 지향성이 없지만 주파수가 올라가면서 앞뒤로 잘 퍼져 나갔다. 이런 성질은 밑면의 울림 구멍을 통해 소리가 바닥면을 따라 퍼져 나가는 가야금의 독특한 구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대금의 경우 가야금과 달리 정면 중심에서 약간 비스듬한 방향(40-60°)으로 소리가 잘 뻗어 나갔다. 수직방향으로는 앞쪽과 뒤쪽을 제외하면 소리가 비교적 잘 퍼져 나갔다. 특히 대금 소리가 최대 음압을 갖는 방향은 음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구멍(지공)이 뚫려있는 위쪽(80-1백°)방향이다. 결과적으로 대금 소리는 앞쪽과 위쪽으로 더 잘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통 국악의 정수 판소리와 창도 독특한 음향 성질을 드러냈다. 몸짓과 노래, 말을 섞어가며 엮어나가는 판소리는 서양 오페라 창법과 전혀 다른 특성을 보인다. 멀리까지 소리를 전달하는데 치중하는 서양 창법과 달리 판소리의 노랫가락은 소리꾼의 전방 아래쪽에서 가장 잘 들린다. 하지만 음높이가 올라갈수록 위쪽 방향으로 음압이 커졌다. 대부분의 소리꾼들이 높은 소리를 내기 위해 머리를 위쪽(0-30°)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정 실험은 국악 공연 녹음시 마이크를 어느 방향에 설치해야 할지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청감 실험 통해 설계 기초 잡아
이렇게 녹음된 소리는 기초 설계 작업을 위한 청감실험용 음원으로 사용됐다. 청감실험을 위해 우선 무향실에서 녹음한 소리를 변형할 필요가 있었다. 가상 공연장을 3차원 그래픽으로 제작한 뒤 녹음한 음원과 가상 음원의 충격 음원을 합성했다. 여러 상황을 설정하기 위해 잔향시간도 0.6에서 1.4초까지 0.2초 단위로 구분해 재녹음했다. 또 최적의 환경을 판별하기 위해 소리의 깨끗함과 세기, 현장감을 조금씩 바꿔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작된 실험 음원을 실험 참가자들에게 들려주고 만족도를 물었다. 참가자들은 전문국악인이 25명, 서양음악인 20명, 음향전문가 5명 등 모두 50명으로 구성됐다. 국악인 뿐만 아니라 다른 전문가들을 실험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들리는 소리에 대한 좀더 일반적인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국악인과 서양음악인이 듣는 소리 기준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이를 기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문 음향기술자의 ‘조언’도 필요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음향조건이 다른 음원 2개를 서로 비교하는 실험을 수차례 반복한 결과 대체로 잔향시간이 1.0-1.1초 일때 ‘가장 듣기 좋았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소리의 퍼짐이나 반사, 울림이 적절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국악인과 서양음악인들이 서로 다른 잔향시간에 호감을 더 가졌다는 점이다. 국악인은 일관성이 있게 1.0-1.1초대를 선호한 반면 서양음악인은 그 편차가 심하고 좀더 긴 잔향시간을 선호한 것이다. 동일한 음향에 대한 반응이라도 서양음악과 국악은 이처럼 달랐다.
실험에서 얻은 결과는 곧바로 국악당 설계에 적용됐다. 그 결과물이 바로 올 11월 착공에 들어가는 부산국립국악원이다. 국내 최초로 국악음원연구 결과를 토대로 시공된 국악전용공연장인 셈이다. 부산국악원은 2개의 전문 공연장과 야외 공연장을 갖추게 된다. 공연장은 대공연장과 소공연장으로 나뉘며 연주 규모에 따라 다른 설계 기준을 갖고 있다.
부산국악원이 기존 공연장과 비교해서 가장 다른점은 잔향시간의 범위다. 다목적 공연장의 잔향시간은 평균 1.4-1.5초로 너무 길고 기존의 국악당은 0.6초 안팎으로 너무 짧다. 반면 부산국악당은 대공연장의 경우 잔향시간을 1.1초, 소공연장은 1.0초로 잡고 있다. 두 공연장의 잔향시간이 다른 까닭은 체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공간 규모에 맞게 잔향시간은 얼마든지 재조정될 수 있다.
설계자들은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확산면을 두어 소리를 고르게 반사하도록 했다. 특히 음의 체류 시간이 긴 객석 뒷벽과 후반부 옆 벽면은 과감하게 소리를 흡수하게 만들었다.
무대에서 가까운 곳부터 먼 쪽까지 소리를 고르게 보내기 위해 실내 마감재의 설치방식도 바꿨다. 먼쪽은 소리를 흡수하는 흡음재를, 가까운 쪽엔 소리를 반사하는 반사재를 붙이던 기존 공법 대신 이들 재료를 번갈아 배치했다.
잔향시간을 1.0-1.2초에 묶어두기 위한 아이디어는 실제 공연장 설계도 곳곳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공연장의 경우 7백10석 규모로 모든 장르의 국악을 공연할 수 있는 무대설비와 시설을 갖췄다. 극장은 지상1층에는 무대가 들어서고 지상 4층에 이르는 객석까지 발코니 1개가 있는 원형 모양이다.
안쪽으로 볼록하기 때문에 소리를 잘 반사시키지는 않는 옆벽에서는 소리가 한쪽에 집중되거나 벽면을 타고 흘러가 버리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시선을 일정한 각도 안으로 모아줄 수 있어 집중력과 현장감을 높이는 데는 그만인 구조이다.
국악기 소리 특성을 살린 구조는 특히 객석의 배치에서도 잘 드러난다. 1층 객석 앞부분부터 뒷부분까지는 경사면으로 이뤄져 관객들은 음원과 직접 마주할 수 있다. 2층에서 4층까지 걸쳐있는 발코니 객석 역시 뒷열까지 계단식 경사를 이루고 있다. 무대를 중심으로 같은 곡률로 배치돼 공연중 시선이 가리는 일이 없도록 설계됐다.
물결모양의 곡면으로 처리된 천장은 우리 소리의 격조를 끌어올리는데 안성맞춤이다. 소리 전달을 좀더 쉽게 하기 위해 반사면 크기도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무대 가까운 쪽에 큰 반사면을 설치해 낮은 음이 충분히 객석에 전달되도록 한 것이다. 객석 뒤쪽으로 갈수록 천장 높이를 차츰 올린다거나 천장 곡률을 조정한 것은 넓은 범위의 소리를 반사시키기 위한 아이디어다.
이밖에 악기에서 나온 소리가 처음 부딪히는 무대주벽과 전면벽, 무대측벽 재료로 소리를 확산시키거나 반사하는 소재를 번갈아 집어넣었다. 또 음원과 가까운 위치인 만큼 낮은 음의 소리가 멀리까지 전달되도록 특수벽을 쌓았다.
우리 소리 느낌 살리는 설계 원칙 세워
부산국악원은 순수 자연음으로 실내 음향을 조절하는 것을 모토로 내세운다. 수용인원에 맞는 공연장 규모를 정하고 국악기 음향의 특성을 고려해 적절한 잔향시간을 유지한다는 목표다.
부산국악원이 밝힌 목표 잔향시간은 대공연장이 1.1초, 소공연장은 1.0초다. 대공연장의 경우 객석 규모가 크고 때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객석이 비었을 때의 잔향시간(1.2초)까지 정해두고 있다. 잔향시간 이외의 다른 음향기준들 역시 이번 연구결과에서 얻은 값을 토대로 세운 것들이다.
한편 착공에 앞서 설계도가 새 기준안에 맞는지 검증이 필요했다. 설계 대로 지었을 때 과연 원하는 소리를 얻을 수 있는지 3차원 음향 실험을 통해 확인 해야만 했다. 사용된 재료들의 특성을 고려해 목표치에 가까운지 검토할 필요도 있었다.
시뮬레이션 실험은 컴퓨터가 만든 가상 무대에서 가상의 소리를 일으켜 그 진행방향을 알아보는 것이다. 보통 소리 진행 방향을 알아내는 방법으로 소리의 궤적인 음선을 추적하는 방법이 애용된다. 가상의 음원에서 나온 3천개의 음선(音線)을 통해 한 공간 안에서 어떻게 반사되고 진행하는지를 모아서 살펴보면 소리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떤 실내 마감재를 사용해야 할지까지도 설계자에게 알려준다. 실제 위상차 때문에 발생하는 소리의 지연 현상도 이런 실험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설계자들은 이런 반복적인 시뮬레이션 실험을 통해 설계 기준에 좀더 가까운 설계도를 얻게 된다. 부분부분 고쳐나가면서 좀더 구체적인 설계도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착공에 앞서 실시하는 시뮬레이션 실험은 이래서 강조되는 것이다.
새 국악당은 2006년경 그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다. 현재 정부는 전주, 부산을 비롯해 전국 광역시도 별로 오는 2010년까지 국악 전용 공연장을 설립한다는 계획이다. 공동 연구팀은 학술진흥재단 지원을 받아 현재 5종의 악기에 불과한 국악음원에 대한 연구를 올해 13종으로 확대해 연구를 진행 중이다. 새롭게 포함된 국악기는 거문고, 해금, 피리, 태평소, 꽹가리, 북, 징 그리고 남자의 판소리다. 이 연구 결과들은 앞으로 건설될 국악당의 음향 설계에 기초 자료가 될 것이 분명하다.
잔향시간
음이 그친 후 소리가 감쇄하면서 원음에 비해 60dB (1천분의 1)이 될 때까지 걸린 시간. 소리 높낮이에 따라 잔향시간이 크게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