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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코캄엔지니어링 대표 홍지준

리튬전지시장 제패한 벤처기업가

 

1956 경기 인천 출생 / 1978 서울대 화학교육과 졸업 / 1979-1983 동양나일론 (페트 폴리머 신규사업담당) / 1983-1987 현대전자(반도체 메모리 개발담당) / 1987-1989 리커만 (플라스틱 기계사업) / 1989-현재 (주)코캄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 귀하’.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가 3장이 넘는 장문의 편지를 대통령 앞으로 보낸 지 2주일도 채 안돼 청와대 비서관이 학교로 찾아왔다. “홍지준 학생이 누구지?”

지금은 리튬이온폴리머전지로 세계 시장에 우뚝 선 코캄엔지니어링 홍지준 대표(48)의 당돌한 어린시절 기억이다. 당시 텃밭에 무허가로 집을 지었다는 이유로 구청에서 집을 허물자 이에 분개한 홍 대표는 당장 연필을 들고 대통령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이다.

카멜레온도 울고 갈 변신의 귀재

“아버지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어요. 동생은 전투기 조종사였구요.” 그의 기질은 이런 투사 집안 내력을 이은 것이었다.

애국심도 똑같았다. “아버지나 동생과는 달리 나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지만 언젠가는 우리나라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해왔죠.”

그는 비즈니스맨이 애국하는 길은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피하지 않고 부딪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7년 IMF가 대한민국을 강타해 투자가 줄고 회사들이 문을 닫을 때 그는 거꾸로 전 재산을 투자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리튬폴리머적층기술을 이용한 코캄표 리튬이온폴리머전지였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가 전공을 살려 리튬이온폴리머전지로 승부수를 띄우기까지는 무려 20여년 이상 걸렸다.

“코카콜라 페트병이 제 첫 작품입니다.” 1979년 대학졸업 후 화학회사의 신규사업부에 입사한 그에게 떨어진 과제는 그동안 산업용으로만 사용되던 폴리에스터를 식품 및 음료용으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어떤 원료를 사용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꼬박 3년을 연구 개발에 매달렸다. 1981년 국내 최초로 음료용 플라스틱 페트병이 등장해 큰 인기를 얻었고, 그는 거금 2백만원을 포상으로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도전거리를 찾았다. 실리콘밸리로 무대를 옮겨 자신의 전공이나 경력과 전혀 상관없는 반도체 회로 공정 관리를 맡아 화학엔지니어에서 IT엔지니어로 변신했다.

2년 후 이번에는 독일계 회사에서 연매출 3백억원을 기록하는 세일즈맨이 됐다. 카멜레온 같은 그의 변신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일 어렵고, 새로운 일이 아니면 흥미와 투사같은 ‘전투력’ 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고정관념을 버려라

리튬이온폴리머전지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국내 대기업들도 수천억원의 돈을 들여 수년 동안 리튬이온폴리머전지를 상용화시키려고 연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주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반대로 그의 투지는 불타올랐다. 전지의 기본 정의부터 따졌다. 이 때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그동안의 경력도, 전공 지식도 아닌 시였다.

평소 시를 쓰면서 당연시 되는 것들에 대해 의심하는 버릇이 몸에 배 있었던 그는 전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똑같은 방식을 적용했다. 자연스레 전지를 꼭 기존 방식으로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

그는 전지의 구조를 바꾸기로 결론 내렸다. 대개 리튬폴리머전지는 리튬이온전지에 비해 용량과 에너지 밀도가 낮은 단점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리튬이온전지보다 에너지 밀도가 30% 가량 높고, 용량도 1백배 이상 되는 새로운 방식의 리튬이온폴리머전지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시켰다.

1997년 개발에 뛰어든 후 4년 만의 성과였다. 그의 뚝심과 고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튬이온폴리머전지가 성공하면 이육사의 청포도에서처럼 백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자고 약속했죠.” 전지 기술 개발을 담당했던 절친한 친구와의 다짐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백혈병으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개발 성공까지 홍 대표를 가장 좌절하게 만든 순간이었다.

환경 전선 문제없다, 코캄표 전지

코캄표 리튬이온폴리머전지는 세계 전지 시장의 판도를 뒤엎었다. 2002년 상용화 초기에는 주로 중국, 대만, 일본 등에서 디지털 카메라나 휴대전화용 배터리로 각광받으면서 단숨에 매출 2백80억을 기록했다.

하지만 2년이 안되는 짧은 기간 내에 이미 초소형비행체 시장의 70% 가량이 동력원으로 엔진과 연료통을 버리고 코캄표 전지를 선택할 정도로 스포츠, 레저용 시장에서 급부상했다. 가볍지만 힘 센 전지가 필요한 초소형비행체에 리튬이온폴리머전지만한 짝이 없었다.

덕분에 추운 겨울에 ‘인도어 플라잉’ (indoor flying)을 즐기는 동호회가 세계적으로 수천개가 생겼다. 전지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는 홍 대표의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과 독일에서 전기자동차와 보트에 사용되는 대형 리튬이온폴리머전지 주문도 이어지고 있다.

환경정책이 강화되면서 강이나 호수에서 엔진 대신 수질오염 걱정이 없는 전지 사용이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정책이 강화될수록 홍 대표에게는 유리해지는 셈이다.

중소기업인 코캄이 세계 시장에서 이만큼 성장시킬 수 있었던데는 그의 경영철학도 한몫했다. 근면성실이 바로 그것.

그는 침대 옆에 팩스를 두고 미국에서 연락이 오면 잠자다 말고 일어나 바로 팩스를 보냈다. 코캄의 대표직을 시작한지 벌써 15년째 접어들지만 아직까지도 자신이 직접 마케팅을 진두지휘하고 연구개발에도 뛰어든다. 인력을 최소화하되 능률을 극대화하려는 그의 철칙이다.

한국산 기술과 문화 알림이

“초등학교 때는 지하에 있는 책들을 남김없이 다 봤어요. 다행히 중, 고등학교 때도 학교에 도서관이 있어서 온갖 책들을 한번씩 다 뽑아서 봤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에게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과외나 학원은 꿈도 꾸지 못했던 그에게 유일한 선생님은 도서관을 빼곡히 매운 책들이었다.

중학교 때 주역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때는 대학 입시 공부를 뒷전으로 하고 철학 논문을 쓸 정도로 그는 글을 사랑했다. 책에서 간접적으로 얻는 모든 경험이 그에게는 귀중했다.

“커서 과학을 하고 싶은 청소년이라면 인문학을 꼭 병행해야 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고 그 위대함에 압도당해 문학가의 꿈을 버리기 전까지 그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목표였다. 하지만 그가 차선책으로 택한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관련 분야의 경험을 쌓는 동안 그의 문학적 소양은 큰 버팀목이 됐다.

그는 요즘도 여전히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고대사 공부에 열심이다.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니다보니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벌써 경주도 몇 차례나 다녀왔다. 한국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과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 정립하지 않으면 해외 출장길에 만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해 제대로 해 줄 얘기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리튬이온폴리머전지로 대한민국의 과학기술력을 전세계에 과시한 홍 대표는 이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릴 문화 ‘홍보대사’ 로서도 손색이 없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그가 보여줄 새로운 대한민국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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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박창민
  • 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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