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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과학으로 들여다본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몸은 어른인데, 마음은 소녀?

"여긴 과즙 ‘팡팡’, 여긴 소녀미 ‘뿜뿜’ 한건데…”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일 만큼 볼을 빨갛게 물들인 여주인공이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다. 술을 마신 것은 아니다. ‘동안 메이크업’이라는 말에 혹해 처음 화장을 해봤다. 과한 볼 터치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영 서투르다. 행동도 순수한 소녀 같다. 몸과 마음이 10년은 차이 나는 것만 같은 이 여주인공.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혼수상태에서 13년 만에 깨어나 몸은 30세이지만 그 속은 17세 소녀 감성 그대로인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가 최근 인기다. 8월 14일 현재 시청률 10.5%(닐슨코리아 제공)를 기록하며 지상파 월화드라마 중 1위를 달리고 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겠지만,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의문이 생긴다. 과연 혼수상태에서 13년 만에 깨어난 사람이 실제로도 여주인공 같을까?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를 과학적으로 따져 봤다.

 

 

 

체크포인트 1. 정말 몰랐을까? 13년이 지났는지  


첫 회에는 13년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여주인공 우서리(신혜선)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못 알아보고, 저기 있는 아줌마가 누구냐고 간호사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진짜로 거울이라는 걸 몰랐는지,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실제로 못 알아봤을 가능성이 크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수상태에서는 기본적으로 뇌의 의식 관련 행동이 중단된다. 외부 자극을 인식한다거나 그에 대한 반응을 할 수 없다. 정나영 연세대 의대 신경외과 교수는 “의식을 담당하는 대뇌피질과, 뇌간에서 각성과 흥분에 관여하는 망상활성계(reticular activating system)가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황에서 시간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인지하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예외인 경우도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마틴 피스토리우스라는 환자는 오랫동안 의식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이미 수년 전에 의식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2001년 발견됐다. 그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환자의 경우 의식은 돌아왔지만 몸이 마비돼 자신이 깨어났음을 알리지 못하는 ‘락트인 증후군(locked in syndrome)’으로 확인됐다. 


한편 혼수상태의 식물인간에게 의식이 있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아드리안 오웬 영국 의학연구위원회(MRC) 인지및뇌과학부 소속 교수팀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2006년 9월 8일자에 발표한 논문에서 식물인간도 정상인처럼 인지에 의해 대뇌피질 영역을 활성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doi:10.1126/science.1130197 


오웬 교수는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를 이용해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에게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하도록 요청하자 환자의 대뇌피질 일부 영역이 건강한 사람 수준으로 활성화됐다”며 “식물인간 상태에서도 음성 명령을 뇌가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환자의 뇌가 비록 음성 자극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외부적인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만큼 의식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며 “예를 들어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이 주변이 차갑고 시끄러운 걸 인식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잠에서 깨 반응하지 않는다면 의학적으로 의식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체크포인트 2. 13년 만에 움직이는데, 이렇게 금방?


극 중 우서리는 깨어난 직후에는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재활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몸을 회복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을 탈출할 수 있는 수준으로 회복된다. 13년 동안 걷기는커녕 꼼짝도 못 했던 환자치고는 몸이 너무 빨리 회복된 건 아닐까. 


혼수상태로 오랫동안 누워있으면 근육 손실이 일어난다. 자의로 근육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혼수상태나 마비 등으로 오랜 기간 근육을 움직이지 못해 기능이 퇴화하는 것을 ‘불용성 근위축(disuse muscle atrophy)’이라고 한다. 


로라 지안그레고리오 캐나다 워털루대 신체역학과 교수팀이 2006년 ‘척수의학저널’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척수 손상으로 마비가 발생한 환자들의 근육량은 마비 이후 6주 동안 18%에서 많게는 46%까지 감소했으며, 이후 6개월간 평균 16% 정도의 근육량이 추가로 감소했다.

doi:10.1080/10790268.2006.11753898


변성은 분당차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팔이나 다리에 장기간 깁스를 한 경우 깁스를 한 쪽만 가늘어지는 현상도 불용성 근위축의 일종”이라며 “2012년에는 식물인간 행세로 20년간 형집행정지를 받았던 재소자를 의사 출신인 송한섭 대전지검 천안지청 검사가 불용성 근위축이 없다는 점을 통해 잡아낸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13년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근위축이 심할 수밖에 없다. 설령 아니라고 해도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구축(contracture)’이다. 구축이란 오랜 기간 움직이지 않아 관절 운동이 비정상적으로 제한되는 상태로, 심하면 관절이 아예 굳어버리기도 한다. 변 교수는 “구축이 발생하면 근위축보다 더 오랜 기간 재활이 필요하다”며 “심한 경우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변 교수는 “근위축은 전기 자극 치료로, 관절 구축은 꾸준한 관절 운동으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면서도 “13년간 혼수상태였다면 정상 수준으로 돌아오는 데 최소 연 단위의 재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체크포인트 3. ‘금손’ 되찾을 수 있나   


쌩쌩한 몸 상태와 달리 여주인공의 두 손은 아직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주인공 우서리는 촉망받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17세의 나이에 독일 음대에 합격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자랑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돼 망가져 버린 자신의 바이올린처럼, 13년이 지난 현재 그는 간단한 시범 연주 하나 제대로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 


이렇게 오랜 기간 혼수상태에 있는 경우 근력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 같은 세심한 움직임도 쉽지 않다. 정 교수는 “뇌의 원활한 활동이 장기간 중단돼 오랫동안 뇌 회로를 쓰지 못한 상태”라며 “의식이 돌아왔다고 해도 뇌 속 회로들의 연결이 정상화돼 뇌 기능을 회복할 때까지는 높은 수준의 연주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여주인공이 신체기능을 더 빨리 회복하고 싶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활을 잡고 연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클레망 프랑수아 스페인 바르셀로나대 기초심리학과 교수팀은 악기 연습이 신경 재활에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국제학술지 ‘프런티어 인 사이콜로지’ 2015년 4월 28일자에 발표했다.

doi:10.3389/fpsyg.2015.00475


연구팀은 뇌졸중이나 파킨슨병 등 뇌질환을 앓는 환자들에게 악기 연주를 배우게 했을 때 운동과 청각, 언어 능력에 관여하는 대뇌피질과 피질 하부의 신경가소성이 증가하면서 뇌 회복과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경가소성이란 인간의 두뇌가 경험에 따라 변화하고 순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프랑수아 교수는 “뇌가 음악이라는 외부의 감각 자극에 반응하면서 신경가소성이 개선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체크포인트 4. 정신만 17세에 멈춰 있다? 


여주인공의 생물학적 나이는 30세이지만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17세다. 남주인공이 깔아뭉갠 초코 과자에 절망하고, 떡볶이 먹자는 말에는 금세 얼굴이 밝아진다. 뇌는 13년간 성장했을 텐데, 왜 여전히 17세에 멈춰 있을까.


이는 정체성이 확립되기 전 정신 성장이 청소년기에서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이 개발한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나이에 따라 영아기, 유아기, 학령전기, 학령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등 총 8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은 단계마다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확립한다. 이때 단계별 과제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적절하게 진입하지 못한다.


이 중 청소년기에 해결해야 할 과제는 바로 정체성 확립이다. 여주인공 우서리는 한참 자기 자신에 대해 탐색하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청소년기에 사고를 당해 정신적인 성장이 멈춰버렸다. 안현웅 마음나래의원 원장(순천향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은 “집과 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저지르는 실수를 보면, 여주인공이 성인으로서 갖춰야할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엿볼 수 있다”며 “청소년기에 필요한 정신적 성장을 아직 못 이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우울장애, 불안장애 등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여주인공의 상태가 아주 절망적이지는 않다. 미뤄졌던 정신적 성장을 이룰만한 계기가 있기 때문이다. 에릭슨은 청소년기에 중요한 과제로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하나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고, 하나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탐색이다. 


안 원장은 “우서리는 남주인공을 비롯해 새로 만난 친구들을 통해 소속감을 얻었고, 또한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찾는 과정에서 새로운 탐색을 하고 있다”며 “드라마 전개상 여주인공에게 심각한 정신적인 어려움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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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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