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로, 메가, 기가…. 각각 1천배, 1백만배, 10억배를 뜻하는 접두어이다. 그렇다면 기가보다 1천배 큰 값인 1조배를 뜻하는 접두어는 무엇일까.바로 테라(tera)다. 그리스어로 1조를 뜻하는 테라는 수식에서는 ${10}^{12}$을 의미한다. 반대로 작아지는 방향의 접두어는 어떤게 있을까. 밀리, 마이크로, 나노가 있다. 각각 1천분의 1, 1백만분의 1, 10억분의 1을 뜻한다.
그런데 반도체기술에서는 이들 접두사간에 묘한 상관관계가 있다. 트랜지스터를 비롯한 반도체를 이루는 기본소자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라헤르츠의 속도, 즉 1초에 1조번 이상의 연산을 처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노미터 수준으로 반도체소자의 스케일을 줄여야 한다.
지난 1999년 당시 삼성종합기술원에 근무하던 이조원 박사가 이 일을 맡아 해보겠다고 나섰다. 이듬해 이 박사는 ‘테라급나노소자개발사업단’의 수장이 돼 지난 4년간 1021이라는 엄청난 스케일의 차이, 즉 테라와 나노를 오가며 연구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 박사는 모시로 유명한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1952년 태어났다. 주변에 금강을 비롯해 수려한 경치가 많아 어린 시절 맘껏 자연을 즐기며 보냈다. 라디오 어린이 연속극에서 연구원이 악당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장면을 듣고 연구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공부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 암기식 학습방식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꿈은 세상을 구하는 연구원
“제 어릴 때 별명이 ‘진드기’였습니다. 뭐라도 한번 관심을 갖게 되면 끝까지 물고늘어졌으니까요. 그런데 무조건 외우는 공부는 정말 지겨웠습니다.”
당시 친척 가운데 대학생이 있었는데 연구원이 되려면 대학에 가야한다는 말을 해줬다고 한다. 중고등학생 때 공부에 손을 놓지 않은 이유였다. 그럼에도 대학시험에 보기 좋게 떨어졌다. 하지만 이 박사는 어렸을 때의 꿈인 ‘연구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재수생활을 했다. 덕분에 당시 학원강사 중 한분이 ‘전망이 밝다’며 추천해준 금속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암기식 교육의 연장일 줄은 몰랐습니다. 실망이 커서 다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공부에는 여전히 취미를 붙이지 못했지만 이때 인생의 지침이 되는 책들을 많이 읽었다. 특히 그는 무실역행(務實力行, 진실을 몸소 실천함)을 강조한 도산 안창호의 사상에 심취했다.
신나는 대학생활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보낸 이 박사는 졸업과 함께 국방과학연구소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일하며 진짜 연구가 무엇인지를 보게 된 그는 유학을 준비하게 된다. 세상을 바꾸려면 암기로는 습득할 수 없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맘껏 공부한 12년간의 유학생활
“1980년 28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뉴욕공항에 내렸을 때 벅찬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넓고 깨끗하고…. 아, 이게 선진국이구나 싶더군요.”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이 단장이 겪은 문화충격은 엄청났다. 비행기를 타본 것도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당연히 유학생활 초기에는 고생도 많았다. 그러나 그가 석사와 박사학위를 한 펜실베니아주립대의 연구분위기는 그야말로 그가 꿈꾸던 연구자 생활을 가능케 했다.
“12년간 미국에 머무르면서 정말 맘껏 연구했습니다. 제 인생의 전성기였죠.”
이 단장은 박사과정에서 투과현미경으로 처음 금속원자를 봤고 1990년에는 IBM 왓슨연구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때 벌써 IBM에서는 기존 메모리소자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돌파구로 나노기술을 생각하고 있더군요.”
1986년 박사학위를 받은 이 단장은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국내에 대학교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일이 잘 안풀려 결국 교수를 포기하고 기업체 연구소를 택하게 됐다.
“한동안은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교수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마음껏 연구하는데 꼭 교수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죠.”
1992년 귀국해 삼성종합기술원에 입사한 이 단장은 IBM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영진들에게 나노기술의 중요성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미래는 나노기술의 시대라고 부르짖고 다녔다.
“다행히 삼성의 경영진들은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었습니다.”
1996년 나노소자팀을 만들어 본격적인 연구에 뛰어들어 국내 나노기술의 선봉에 선 이 단장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9년 나노기술 관련 21세기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의 공고가 났던 것. 10년간 1천7백억원이 투입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이 단장은 자신의 비전이 한 기업을 넘어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도 저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밀어줬습니다. 나노기술은 산학연이 공동으로 참여해야 결실을 거둘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죠.”
지난 4년간 이 단장이 이끄는 사업단은 ‘테라비트급 단전자 메모리 개발’ 등 테라시대를 가능하게 할 나노소자를 속속 만들어내고 있다.
“성과도 성과지만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일류과학자로 거듭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현재 사업단에 참여하고 있는 5백여명의 연구자 중 박사급만도 1백50여명이다. 이 단장은 프로젝트가 끝나는 2010년에는 10여명의 세계적인 과학자를 배출하는게 목표라고 귀띔한다. 우수한 인재를 알아보고 그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도 자신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늦깎이 음악가 지망생
너무 일만 하는 바람에 이 단장은 결혼이 꽤 늦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별로 변한게 없어 자신은 ‘빵점 남편, 빵점 아빠’라고 선선히 인정한다.
“제가 원래 하나에 몰입하면 주위를 돌보지 않는 타입이라서요. 가족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래도 고1인 딸이 이공계를 간다고 말했을 때는 몹시 기뻤다고 한다. 최근 이공계 기피 풍조로 혹시나 했는데 다행이라고. 이 단장은 자식 편한 것만 생각해 의대, 약대를 권하는 부모님들부터 바뀌었으면 한다. 그는 청소년들이 꿈과 도전의식을 갖기를 소망했다.
“좁은 테두리에서 안락한 삶을 찾기보다는 견문을 넓히고 눈높이를 올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기회가 되면 해외연수나 유학을 가는 것도 적극 찬성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격언을 온몸으로 체험해온 이 단장은 패기있는 젊은이들을 볼 때 마음이 흐뭇하다고 한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아침저녁으로 각종 회의에 참석해야하는 이 단장은 주중에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그에 대한 반작용일까. 주말이면 그는 달랑 배낭 하나만 메고 홀로 산행을 떠난다. 일주일간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숲속을 천천히 거닐며 푸는 그만의 방법인 셈이다.
“사색의 시간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쑥스러운 듯한 웃음을 지으며 이 단장은 자신의 소망을 내비쳤다. 2010년 사업단 활동이 끝나면 음악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대학시절까지 합창단에서 활동했을 만큰 노래를 좋아한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만 주어집니다.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지요.”
일 때문에 좋아하는 음악도 즐기지 못했지만 그는 절대 아쉬워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에서 밝은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도 매 순간을 보람있게 생각하는 그의 낙천성에서 비롯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