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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카메라와 종이를 확 바꾼다

‘일렉트로웨팅’ 액체렌즈·전자종이 개발에 돌파구

 

가브리엘 리프만은 1908년 컬러사진기 개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퀴리부부를 탄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소금쟁이가 잔잔한 연못이나 개울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물위를 사뿐히 떠다닐 수 있는 것이나 개미가 물방울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것은 물의 표면장력 때문이다. 우리 인간에게 물의 표면은 힘들이지 않고 깨뜨릴 수 있는 얇은 막이지만 개미나 소금쟁이와 같은 작은 곤충에게는 단단한 벽과 같은 존재다. 이들 곤충에게는 중력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표면장력이지만 인간에겐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과학자들은 이 표면장력을 일상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각종 제품을 점점 작게 만들어가면서 중력에서 표면장력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장력이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는 1990년대 ‘일렉트로웨팅’(electrowetting) 현상의 발견이었다. 전기로 표면장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일렉트로웨팅 현상을 차세대 디스플레이, 랩온어칩, 그리고 휴대전화와 같은 모바일 제품의 카메라 렌즈에 응용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떻게 전기로 표면장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일까?

가브리엘 리프만. 우리에게 낯설기는 하지만 컬러사진기를 개발해 19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위대한 과학자다. 또한 그는 퀴리부인을 지도했을 뿐 아니라 퀴리부부를 탄생시킨 중매쟁이이기도 하다.

리프만 박사가 오늘날 새롭게 주목을 받는 것은 1870년대에 전기로 표면장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 했기 때문이다. 수조에 물을 담은 후 그 안에 가는 관을 넣으면 물이 수조 안 수면보다 더 높게 올라간다. 모세관 현상인 것이다. 이때 수면의 높이가 관의 벽쪽이 높고 중심이 낮다.

리프만 박사는 벽면이 금속으로 된 수조와 관을 사용하고, 수조와 모세관 속 물에 전기를 통하게 했다. 그러자 관안의 수면에 변화가 일어났다. 관의 벽면과 가운데 사이 수면의 높이차가 커지는 것이었다. 관의 벽쪽 수면은 더욱 높아지고, 가운데 부분은 더욱 낮아졌다. 리프만 박사는 이를 ‘전기모세관’ 현상이라고 이름붙였다. 즉 전기를 걸어줌으로써 물의 표면장력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수면의 모양이 달라졌던 것이다.

리프만 박사의 전기모세관 현상은 1백년 간 응용되지 않았다. 전기모세관 현상 자체가 별다른 응용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기모세관 현상은 1V 정도의 낮은 전압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전압이 높아지면 물에 전기가 흘러 기포가 발생하면서 물이 분해되고 만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 ‘일렉트로웨팅’ 이라는 현상으로 새로이 주목을 받게 됐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인 브루노 버지 박사는 높은 전압에서 표면장력을 제어할 수 없는 문제점을 해결했다. 그의 방법은 금속과 물이 바로 접하지 않도록 전기가 통하지 않은 절연체를 머리카락 두께보다 수-수백배 얇게 금속에 코팅하는 것이었다.

금속판에 절연막을 씌우고 그 위에 한방울 떨어뜨린다. 그런 다음 금속판과 물방울에 전기를 걸어준다. 그렇게 하자 전압의 변화에 따라 물방울의 표면모양이 달라졌다. 전압이 높아질수록 물방울이 퍼지는 것이었다. 마치 표면에 더 적셔지는 것처럼. 버지 박사는 이 현상을 전기로 물을 적신다는 의미에서 ‘일렉트로웨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제는 낮은 전압뿐 아니라 수십V에서도 물방울의 표면모양을 맘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됐다. 전기로 표면장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과학자들은 혈액 한방울로 진단하는 랩온어칩, 새로운 개념의 디스플레이, 차세대 모바일 카메라 렌즈 등의 개발에 이를 활용하려고 한다.

일렉트로웨팅 현상이 어떻게 이들 첨단제품에 응용될 수 있는 것일까?

액체렌즈 자동으로 초점 맞추는 핸드폰 속 카메라
 

액체렌즈는 자동초점 기능뿐 아니라 5cm까지의 근거리 초점도 가능하다. 사진은 액체렌즈를 사용한 휴대전화 시제품.


요즘 판매되는 휴대전화는 카메라가 부착된 게 주류를 이룬다. 최근에는 디지털카메라급 화소수를 자랑하는 카메라폰이 등장하면서 조만간 카메라가 휴대전화 속으로 아예 흡수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휴대전화용 카메라는 휴대전화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할 정도로 작아야 하기 때문에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다. 카메라 렌즈는 유리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다. 문제는 카메라폰 렌즈가 워낙 작아야 하기 때문에 유리나 플라스틱으로 된 렌즈로는 초점을 자유자재로 맞춘다거나 줌 기능까지 포함하도록 하기가 어렵다. 현재는 팔을 뻗어서 자신의 얼굴을 찍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만 초점이 제한돼 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리나 플라스틱과 같은 단단한 물질 대신에 액체를 사용하는 렌즈가 등장하고 있다. 삼성전기와 필립스가 현재 휴대전화와 같은 모바일 제품에 사용할 액체렌즈를 개발하고 있다. 액체렌즈의 원리는 눈이 초점을 맞추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눈은 가까운 곳을 볼 때 수정체를 두껍게 변화시킴으로써 렌즈의 곡면을 좀더 볼록하게 만든다. 반면 먼 곳을 볼때는 수정체를 얇게 함으로써 렌즈의 곡면을 좀더 평평하게 만든다. 액체렌즈에서는 물과 기름이 렌즈가 된다. 물과 기름의 경계면을 일렉트르웨팅 현상으로 변화를 줌으로써 모양에 변화를 준다. 이 변화를 통해 초점을 5cm부터 무한대까지 자유자재로 맞출 수 있다.

현재 삼성전기는 모바일용 액체렌즈의 개발을 놓고 필립스와 경합을 벌이는 중이다. 삼성전기의 조호진 수석연구원은 “현재 액체렌즈를 사용한 휴대전화는 출시 임박 상태”라면서 “이는 일렉트로웨팅을 이용한 첫번째 상품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디스플레이 비디오처럼 화면속도가 빠른 전자종이
 

필립스의 연구원이 일렉트로웨팅 현상을 응용한 디스플레이를 개발하는 모습.


일렉트로웨팅 현상은 글자는 물론 화면이 1초에 수십번이나 바꿔는 동영상까지 보여주는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전자종이에도 응용되고 있다.

전자종이는 1990년대부터 조만간 출시될 것이라며 꾸준히 화제를 모아왔던 기술이다. 하지만 소비자가 만족할만큼 기술이 완성되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다. 화면이 느리게 바뀌는 문제점이 전자종이의 상업화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장에 출시된 전자종이는 화면을 표시할 때 전기로 제어하는 매우 작은 입자를 사용한다. 이 입자가 움직임으로써 화면에 글자나 그림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입자의 움직임 때문에 화면의 반응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최근 입자 대신 유동성이 큰 액체를 마이크로 단위로 이용하려고 한다. 바로 일렉트로웨 팅 현상을 이용해서 말이다. 일렉트로웨팅을 이용한 전자종이는 필립스에서 현재 연구중이다. 그들에 따르면 일렉트로웨팅을 이용할 경우 전자종이의 반응속도가 동영상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빨라질 것이라고 한다.

일렉트로웨팅을 이용한 디스플레이의 원리는 전기를 통해 유체의 표면장력에 변화를 줌으로써 화면을 표시할 수 있도록 유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현재 필립스는 화면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픽셀을 일렉트로웨팅 현상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랩온어칩 미세관 속 물방울 전기로 이동시킨다
 

미 듀크대 연구팀이 개발한 장치에서 미세유체가 이동하는 모습. 물방울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혈액 한방울로 질병을 진단하는 손바닥 안의 실험실. 이것이 바로 랩온어칩(Lab On a Chip)이다. 혈액이든 화학물질이든 적은 양의 시료를 채취하고 이를 반응시켜 분리·분석한 다음, 마지막으로 데이터까지 얻어내는 과정이 작은 칩 위에서 이뤄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미세한 양의 시료가 랩온어칩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관을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료가 미세관을 이동하면서 성분이 나눠지고 다른 물질과 반응도 하면서 분석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랩온어칩 개발의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미세유체의 이송이다. 일렉트로웨팅 현상은 미세유체의 이송을 원활하게 하는데 응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미세유체의 이송에 사용되고 있는 전기적 방법은 수만V의 높은 전압을 요구하면서도 이동속도가 무척 느리다. 반면 일렉트로웨팅 현상을 이용하면 수-수십V의 전압으로도 1초에 1cm 정도로 기존보다 1백배나 빠르게 시료를 이송시킬 수 있다. 또한 일렉트로웨팅 현상이 액체로 전류가 흐르지 않는 범위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전류에 비례하는 값을 갖는 전력은 거의 소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기적으로 표면장력을 제어하는 일렉트로웨팅 현상으로 어떻게 유체를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일까? 방법은 물방울의 한쪽 부분에만 표면장력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미세관 속 물방울의 양단에 전기가 따로 걸리도록 구조를 만든다. 그리고 물방울의 한쪽 끝에만 전기를 걸어준다. 그렇게 되면 한쪽 끝에만 일렉트로웨팅 현상이 일어나 물방울의 모양이 퍼지게 된다. 이 퍼지는 힘에 의해 물방울이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일렉트로웨팅을 이용해 미세유체를 제어하는 연구는 현재 미 듀크대,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대 등 일부 대학에서 진행되고 있다.

2004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박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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