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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볍씨 발굴 이융조

구석기에 빠진 40년 고고학자의 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를 발견했다고 영국 BBC 방송에 보도된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의 이융조 교수(62).


지난해 10월 영국 BBC 방송은 “한국인 과학자가 1만5천년 전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를 발견했다”고 인터넷판에 보도했다. 이 특종의 주인공은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의 이융조 교수(62). 이융조 교수는 세계적인 구석기 전문 고고학자다. 그가 발굴한 유물은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와 세계를 놀라게 한 굵직굵직한 것들이다 1976-1983년 충북 청원 두루봉의 동굴에서 50만년 전 동굴곰 뼈와 4만년 전 인간의 전신 뼈(흥수아이) 등 각종 뼈 화석을 비롯해 그 당시 생활상을 알려주는 다양한 석기를 발굴했다. 1983-1996년에는 충북 단양군의 충주댐 수몰지역 수양개에서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의 이동경로를 밝혀주는 주먹도끼를 찾아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유적지를 파헤쳐 기존 우리나라 구석기시대 연구를 뒤집는 유물을 발굴했다. 이처럼 그가 발굴한 유물의 주종은 돌과 뼈다. 볍씨는 최근의 업적으로 원래 그의 전문분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융조 교수는 원래 뼈와 돌을 주로 발굴해왔다. 사진은 충북 청원군 두루봉에서 발굴한 사람의 전신 뼈.


볍씨는 언제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

관심이 없었어요. 농사를 지으신 아버님이 어릴 적에 논에 같이 가자고 하면 도망가기 일쑤였어요. 91년 경기도 일산 신도시 개발에 앞서 이 일대 문화유적 조사에 나서면서부터 벼와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조사의 단장을 맡으신 은사인 손보기 교수님이 아무런 유적 흔적이 없는 논을 조사해보라고 하시더군요.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저는 학생 50명과 함께 보름동안 땅을 팠습니다. 그러다가 토탄층을 발견했어요. 이것을 정밀하게 발굴했더니 볍씨 한톨이 나오더군요. 어찌보면 볍씨 발굴은 아버님에 대한 속죄의 기회였지 않았나 생각되네요.
 

1964년 연세대 사학과 조교였던 이융조 교수(가운데줄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고고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스승과 선배들과 함께 발굴조사현장에서 찍은 사진.


일산에서 발굴한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볍씨가 속해있던 토탄층의 연대는 5천년 전의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것도 매우 파격적인 결과였어요. 우리나라가 청동기 시대인 3천년 전부터 쌀을 먹기 시작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어요. 70년대 후반 서울대 조사팀이 경기대 여주에서 3천년 전의 볍씨를 찾아냈었거든요. 그런데 5천년은 신석기 시대에요. 그때 서울대 팀에서 조작이 아니냐며 날 매도했어요.

그 볍씨는 어떻게 인정을 받으셨나요?

하도 속상하고 볍씨가 아까워서 그 볍씨 사진으로 92년 신년카드를 만들어 아는 사람들에게 많이 돌렸습니다. 그 엽서를 9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학회에도 가져갔는데 그때 일본인 학자에게도 줬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해도에서 3천5백년 전 볍씨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일본 마이니치신문 1면에 보도됐어요. 볍씨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게 아니라 오히려 한국으로 건너간 거라며 일본에서 떠들썩했어요.

그때 엽서를 받았던 일본인 학자가 한국에서는 5천년 전의 것이 이미 발견됐다고 기사를 쓴 신문기자에게 연락했어요. 그 신문기자가 저를 찾아왔고 일본에서 먼저 나의 볍씨가 소개됐어요.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죠.

세계 최고의 볍씨는 언제 발견하셨나요?

1997년입니다. 충북 청원군에 오창과학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그곳 유적의 발굴작업이 이뤄졌지요. 당초 구석기 유물을 발굴하려고 했는데 또 토탄층이 발견됐어요. 일산에서 경험 때문에 혹시나 여기에도 볍씨가 있지 않을까 해서 6개월간 토탄층을 체질을 해가며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래서 또 볍씨를 찾아냈어요.

그전 발굴에서 하도 말이 많아 이때는 볍씨가 발굴된 토탄층의 연대측정을 미국의 연대측정연구소에 의뢰했어요. 결과는 세계적으로 놀랄 일이었죠. 1만3천-1만5천년 전의 것이었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볍씨는 중국 양자강 유역에서 발견된 1만5백년 전의 것이었어요. 쌀의 진화와 이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낳게 된 거죠.

이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토탄층에서 비닐이 나왔다, 볍씨가 토탄층으로 흘러들어온 거다, 정말 벼가 맞느냐는 등 내 연구에 흠집을 내려는 일들이 벌어졌어요.

이런 얘기를 들으니까 화가 나고 오기도 생기고 해서 99년에 선사유적 발굴도록을 냈어요. 그리고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하나하나 반박해나갔습니다. 볍씨 자체의 연대를 측정했고 전자현미경과 DNA 분석을 통해 실제로 벼라는 것도 증명했습니다. 또 중국, 필리핀, 미국에서 열린 국제학회에 참석해 연구결과를 발표했어요. 그러자 지난해 10월 BBC에서 제 연구결과가 소개된 것입니다.

교수님만의 발굴비법은 무엇입니까?

볍씨발굴의 비법은 체질이었습니다. 흙에 숨어있는 벼를 찾기 위해 일일이 체로 걸러내는 거죠. 일산과 청원 2차례 모두 포크레인으로 떠올린 막대한 양의 토탄층을 체질해서 볍씨를 찾아냈어요.

다른 고고학자의 경우 유적지에서 볍씨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저는 토탄층에서 볍씨를 찾아냈기 때문에 체질이 중요했어요. 아마도 이런 발굴방법은 세계적으로 유일할 겁니다. 다른 발굴에서도 체질은 기본조사방법입니다.

수양개 조사에서는 어려움이 없으셨나요?

처음에는 백평 정도의 밭에서 탐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유물이 상당히 많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더 넓게 조사를 해보려고 도청과 수자원공사를 찾아갔어요. 그곳에서 더이상 못한다고 하더군요. 왜 못하냐니까 감사지적대상이라나요.

유적지에 물이 계속 차오르고 너무나도 유물이 아까워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감사원장뿐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원장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어요. 결국 연장발굴의 허가를 받아냈어요. 이후 총 7차례 발굴을 통해 얻은 수양개 유물은 세계 어딜 내놔도 손색없는 구석기 유물입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으셨나요?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학생들이 내게 힘을 줬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어떻게 그냥 묻어두냐는 당찬 말로 나에게 자극을 줬어요. 학생들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한 때가 참 많았습니다. 89년 7월 21일이 정말 그랬어요. 날짜까지도 기억하는 그날은 비가 엄청 내렸어요. 그때 수양개 유적을 발굴했는데 불어난 강물을 건너야 했어요. 나와 10여명의 학생들은 그 강물을 작은 노를 저어 건넜습니다. 그래서 학생들 얘기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울먹이게 됩니다.

현장을 자주 나가시는데 가정생활에는 지장이 없으셨나요?

F학점 아빠입니다. 제대로 같이 놀아준 적이 없어요. 그래도 아내와 아이들은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돼줬어요.

우리 애들은 어릴적부터 내가 하는 일을 봐왔어요. 막내는 한두살때부터 발굴현장에 데려갔어요. 애들도 저랑 같이 흙을 파고 고생도 했죠. 그래서인지 집을 비우는 아빠를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고 항상 조심하라고 격려해줍니다. 볍씨 때문에 가까운 친구에게 모함을 받았을 때 아이들은 아빠를 믿어요 하고 말해줬어요. 나 대신 집에서 약국을 하는 아내가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줬어요.

막내가 나를 이어 고고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과학동아에서 취재온다고 했더니 아들이 좋으시겠어요 하더군요. 나는 환갑 넘어 과학동아에 실리지만 우리 아들은 40대에 소개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3년 남은 현직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구석기 유적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습니다.

토탄층

식물이 두껍게 퇴적된 층. 검은색을 띤다.

2004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박창민
  • 박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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