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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가는 타고난 신경생리학자

뇌 구조에 맞는 그림이 아름다움 느끼게 해

20여년전 파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이를 속이고 출품한 유치원생의 그림이 성인들의 작품을 제치고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당연히 프랑스 화단은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은 ‘추상화의 아름다움은 보기 나름 아닌가’라는 대중들의 의혹을 확인시켜주는 사례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반대로 객관적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설일 수도 있다. 회화의 아름다움은 결코 화가의 숙련도나 묘사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과 공명하는 특정한 시각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이런 시각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면 비록 미숙한 터치로 그려졌어도 어느 정도의 절대미를 갖출 수 있다.

이것은 모더니즘 화가들이 묵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예술관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적 조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는 전문적인 화가도 유치원생과 마찬가지다. 화가들은 배후에 있는 원리는 이해하지 못한 채 이런 시각적 조건을 만족시키는 노하우, 즉 ‘기법’을 배우거나 때로는 창조한다.

어찌 보면 미술사는 기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독일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버트 뒤러가 완성한 투시도법이 그렇고 광선 표현에 대한 노하우가 인상파에 미친 영향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기법의 반열에 들어가 지금까지 대를 이어 아틀리에에서 전수되고 있는 노하우들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 많은 예술심리학자들이 노력해 왔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뇌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면서 예술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예컨대 파란색 옆에 검은색을 써서 파란색의 느낌을 맑게 만드는 기법의 배후에 있는 원리를 신경생리학적 수준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분야를 신경미학(neuroesthetics)이라 한다.

샤갈의 청색이 맑은 이유
 

샤갈의 ‘마을’^샤갈의 청색이 맑은 이유는 주변에 어두운 색을 적절히 배치했기 때문이다.


샤갈만큼 청색을 잘 썼던 화가도 없다고 한다. 샤갈의 그림에서 보는 청색은 매우 맑은 느낌을 주어 서정적인 그의 그림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샤갈의 청색을 재현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컴퓨터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해도 샤갈이 거둔 효과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샤갈의 청색이 갖고 있는 비밀은 청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색과 주변의 어두운 색들 사이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샤갈의 그림 ‘마을’을 자세히 보면 청색주변을 어둡게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위에 따라 검은색을 사용한 경우도 많다. 이렇게 어두운 색으로 둘러싸인 색채는 원래 밝기 보다 더 환하게 보인다. 반대로 밝은 배경에 둘러싸인 색채는 더 어둡게 보인다. 샤갈은 청색의 주변을 어둡게 해 청색의 밝기를 실제보다 높게 보이게 했다.

고흐의 그림 ‘까마귀떼가 나는 밀밭’은 샤갈과 유사한 청색처리에 노란색을 보태어 청색의 채도까지 높인 사례다. 고흐는 강렬한 색채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특히 노랑과 파랑의 대비를 사용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실제 사용된 색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만큼 채도가 높은 원색을 쓰지는 않았다. 순수한 청색과 노란색은 일부에만 사용됐고 대부분의 청색과 노란색은 어둡고 탁한 것들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인상은 그렇지 않다. 바로 보색인 노란색과 파란색이 서로의 채도를 높여 줬기 때문이다.

어떤 색이 실제 보다 밝아 보이면 맑은 느낌을 준다. 뒤에 형광등이 비추는 광고물의 색감과 유사하다. 이런 맑은 느낌이 있을 경우 배색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색 자체의 느낌이 좋아져 배색이 좀 서툴러도 봐줄 만하다. 그리고 채도가 높은 색은 선명하고 생동감을 준다. 샤갈의 청색이 맑게 보이고 고흐의 청색이 강렬해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물리적인 실제 밝기나 채도와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시각정보를 뇌에 전달하는 뉴런 사이의 ‘측면억제’라는 상호작용 때문이다. 측면억제는 시각통로에 있는 뉴런들이 옆에 있는 뉴런들의 활성화를 서로 억제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망막에 있는 감광세포는 빛의 강도를 감지하는 뉴런인데, 감지한 빛에 비례해 활성화된다. 그런데 이렇게 활성화된 뉴런은 측면에 있는 감광세포의 활성화를 억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샤갈의 청색은 어두운 색에 둘러싸여 있다. 이때 청색의 밝기를 처리하는 뉴런들은 별반 억제를 받지 않는다. 미미한 빛만을 받는 주위의 뉴런들이 활성화되지 않아 주변 뉴런들을 억제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러싸인 청색이 실제보다 더 밝게 보이게 된다. 반대로 밝은 색에 둘러싸여 있다면 해당 뉴런들의 억제가 심해 둘러싸인 색의 밝기를 담당하는 세포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해 색이 실제 보다 어둡게 보이게 된다.

측면억제를 잘 보여주는 예로는 ‘허링 그리드’(Hering grid)라는 격자무늬가 있다. 격자가 교차하는 지점은 똑같은 흰색이지만 마치 그림자라도 드리워진듯 회색빛이 감돈다. 상하좌우 네곳에서 측면억제를 받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차되지 않는 부분에서는 두방향에서만 억제를 받으므로 상대적으로 더 밝아 보인다.

측면억제는 밝기를 처리하는 뉴런뿐 아니라 색을 처리하는 뉴런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특히 서로 보색관계일 때 측면억제가 강화된다. 보색이란 색상환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색들을 말한다. 노랑과 파랑, 빨강과 녹색이 대표적인 예다. 고흐의 그림에서 밀밭과 하늘의 경계지점을 보자. 밀밭의 노란색에 활성화된 뉴런은 측면 뉴런의 노란색 반응을 억제한다. 따라서 밀밭에 접한 하늘을 맡은 뉴런은 파란색 성분을 더 강렬하게 지각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노란색은 더 노랗게, 파란색은 더 파랗게 보인다. 즉 색의 채도가 높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경은 왜 시각정보를 그대로 처리하지 않고 측면억제라는 지각의 왜곡을 일으킬까? 우선 사물의 윤곽을 파악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측면억제작용 덕분에 우리 시각은 밝기 변화가 급격하게 변하는 곳을 더 민감하게 지각할 수 있다. 밝기 변화가 심한 곳은 대개 표면이 급격하게 꺾이거나 끊어지는 윤곽부위다. 갑작스런 위기 상황에 닥쳤을 때 주변의 윤곽이나 모양을 금방 파악한다면 생존에 더 유리할 것이다.

시각뉴런의 피로도를 줄이려는 것도 한 이유다. 망막에 있는 감광세포는 매우 민감하지만 그만큼 쉽게 피로를 느낀다. 따라서 사물의 윤곽부위를 담당하는 뉴런들은 활성화시키고 윤곽 안쪽의 밝기 변화가 적은 영역은 측면억제로 뉴런을 덜 활성화시켜 쉴 여유를 주는 것이다.

보색은 잘 사용하면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효과를 주지만 조금만 비끗해도 촌스럽게 보이는 매우 어려운 배색이다. 미술심리학에서는 이런 촌스러운 보색대비를 보고 ‘색충돌’(Color Clash)이 일어났다고 한다. 한편 크라이틀러 같은 미술심리학자는 노랑-파랑보다도 빨강-파랑 같은 준보색이 더 강한 색충돌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노랑과 파랑의 경우 밝기 차이가 커서 색충돌을 상쇄시키는데 반해, 빨강과 파랑은 밝기가 서로 비슷해 색상차이가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허링 그리드^시각뉴런의 측면억제를 잘 보여주는 격자무늬. 상하좌우에서 측면억제를 받는 교차지점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처럼 회색빛이 감돈다. 반면 두방향에서 측면억제를 받는 지점은 같은 흰색이지만 더 밝게 보인다.


색충돌 피하는 르느와르의 솜씨
 

마티스의 ‘적색의 방’^빨간색의 준보색인 파란색이 배치돼도 촌스럽지 않은 것은 문양의 윤곽에 짙은 보라색이 칠해져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의 색충돌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마티스나 르느와르 같은 대가들은 보색을 빼어나게 잘 사용한 화가들로 꼽힌다. 그들의 그림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촌스럽지 않다. 색충돌을 피해 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색충돌을 피하려면 보색관계인 색들이 직접 만나지 않게 해야 한다.

이 방법 가운데 하나는 보색 사이에 보색의 혼색을 칠하는 것이다. 예컨대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에 보라색을 집어넣는다. 마티스의 ‘적색의 방’을 보면 빨간색 벽면에 파란색의 당초문양 같은 장식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문양의 윤곽과 몸통에는 부분적으로 짙은 보라색이 칠해져 있어 보색의 충돌을 피해가고 있다.

반면 르느와르의 ‘미역감는 여인들’에서는 다른 방법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는 보색의 혼색을 칠하지 않으면서 혼색의 느낌을 주는 기법을 볼 수 있다. 그림에서 여인을 제외한 부분에는 무수히 많은 노란색과 파란색 그리고 빨간색과 녹색의 작은 붓자국이 나있다. 그리고 이 작은 붓자국들이 서로 공간적으로 섞여 있는 곳이 많다. 섞여있는 부분들에서 우리는 실제로는 칠해지지 않은 혼색의 느낌을 지각하게 된다.

이는 색채를 지각하는 신경단위의 크기와 관련이 있다. 색면의 크기가 색채를 지각하는 신경단위에 비해 크면 우리는 색을 그대로 지각한다. 그러나 매우 작을 때에는 색의 혼합이 일어난다. 색면의 크기가 그 중간쯤일 때에는 색의 동화가 일어난다.

르느와르의 그림에 있는 색면들의 크기는 보는 거리에 따라 색의 동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색의 혼합이 일어나기도 하는 정도다. 좀더 그림에 가까이 하면 붓자국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커져 색의 동화가 일어나 보색인 노란색과 파란색이 서로 유사해 보인다. 좀더 멀찍이 보면 노란색과 파란색 자국의 크기가 작아져 색의 혼합이 발생한다. 그래서 실제로 칠하지 않은 녹색이 보이게 된다. 아주 가까이서 보거나 멀리서 보면 보색의 충돌을 경험할 수도 있다. 보는 거리에 따라 이런 변화무쌍함을 연출해내는 르느와르의 그림은 그 만큼 풍요로운 색감을 보여주면서도 절묘하게 보색의 충돌을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르느와르의 ‘미역감는 여인들’^배경에 보색관계인 노란색과 파란색, 빨간색과 녹색이 쓰였는데도 색충돌이 느껴지지 않는다. 색색의 붓자국이 서로 섞여 본래의 색은 사라지고 전체적으로 혼합된 색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윤곽 무시하고 색을 칠한 피카소
 

피카소의 ‘엄마와 아기’^ 머리카락과 옷의 색이 윤곽선을 벗어났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색상 사이의 밝기 차이가 크지 않으면 색들이 윤곽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뇌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작품 ‘엄마와 아기’를 보자. 이 그림에서 우리는 거장의 과감한 기법 한 가지를 볼 수 있다. 엄마와 아기 머리의 갈색이나 옷의 하늘색이 가는 윤곽선을 무시하고 칠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윤곽선의 무시가 결코 어색해 보이지는 않는다. 수많은 이들이 우연히 이런 기법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수로 간주해 버린다. 반면 피카소 같은 거장은 하나의 기법으로 당당히 내놓고 있다. 대단한 자기 확신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을 색으로 칠하는 방법을 배워왔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무시한 그림이 왜 어색해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일까? 피카소의 그림에서는 자연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그 어긋남이 새로운 맛을 주기까지 한다. 왜 그럴까?

인간의 시각정보처리 기제는 모양, 색, 깊이와 운동 정보에 선별적으로 반응하는 세개의 정보처리통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각기 모양정보처리통로, 색채정보처리통로, 깊이·움직임처리통로로 이해하면 큰 무리가 없다.

모양정보처리통로는 주로 밝기정보에 의존해 모양을 파악한다. 이 통로는 색채의 종류, 즉 빛의 파장과는 관계없이 그 색의 밝기가 어느 정도인가에 매우 민감하다. 미세한 밝기 변화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해상력이 높고 처리 속도도 빠르다. 모양을 신속하게 지각하는 것이 그만큼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반면 색채정보처리통로는 밝기정보는 처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해상도도 낮은 편이다. 이처럼 각기 독립적으로 처리된 밝기와 색상에 관한 정보가 나중에 통합돼 하나의 완성된 모습으로 지각된다. 밝기는 같지만 색상이 다른 두 면이 인접해 있다고 하자. 이 경우 밝기 차이에 민감한 모양정보처리통로는 무력해지므로 색채정보처리 통로에만 의존해서 두 색면의 경계모양을 파악해야한다. 그 만큼 모양지각이 부담스럽고 불안정하게 된다.

피카소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아기 머리카락과 옷을 표현하는 윤곽선은 짙고 가는 선으로 그려져 있다. 윤곽선과 배경 사이에는 밝기차이가 커서 모양정보처리통로는 이 윤곽선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반면 머리카락의 엷은 갈색과 옷의 하늘색은 배경과 밝기차이가 크지 않다. 따라서 모양정보처리통로는 이 색들이 윤곽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우리는 윤곽을 벗어난 색들을 두드러지게 느끼지 못한다.

얼굴에 청색을 쓴 세잔

한편 색상정보처리통로는 머리카락과 옷의 색이 배경과 확연히 다름은 지각하지만 해상도가 낮기 때문에 모양정보는 주지 못한다. 결국 모양정보처리통로와 색채정보처리통로가 처리한 정보는 각각 가늘고 진한 윤곽선과 전체적인 색상에 관한 것뿐이다. 이 둘은 나중에 대뇌 피질에서 통합된다. 다시 말해 갈색과 하늘색이 윤곽선을 벗어났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하고 마치 윤곽선에 잘 들어맞게 칠해진 것처럼 느끼게 된다.

모양정보처리통로와 색채정보처리통로의 특성으로 이해해볼 수 있는 또 다른 기법이 있다. 인상주의화가 세잔의 작품 ‘애연가’를 보자. 이 그림에는 이전까지는 보기 힘들던 새로운 특징이 있다. 세잔은 얼굴을 표현하면서 살색과는 무관한 청색을 이마와 입 주위 그리고 볼에 과감하게 칠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런 색상의 변주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어색하다거나 얼굴에 청색이 묻어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과감한 색채의 사용은 마티스의 그림에서도 가끔 등장하는데 매우 따라하기 어려운 기법이다. 필자도 그 원리를 이해하기 전에는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었다. 왜 그런지 다시 한번 모양정보처리통로와 색채정보처리통로의 특징을 살펴보자.

사실 모양정보처리통로가 직접 모양에 관한 정보를 추출해 전달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각기제가 이 통로를 통해 전달된 정보, 즉 밝기변화에 관한 정보에 주로 의존해 사물의 윤곽을 파악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세잔의 그림을 보자. 얼굴에 엉뚱한 청색이 칠해졌지만 그 청색의 밝기는 원래 있어야 할 살색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그림을 흑백으로 바꾸어 보면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모양정보처리 통로는 이 흑백으로 바뀐 그림에서와 같이 밝기에 관한 정보만을 시각피질에 전달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로 이 정보에 의존해서 애연가의 얼굴 모양을 파악한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모양을 표현하는데 왜 밝기 정보가 중요한지, 왜 엉뚱한 청색을 칠해도 밝기관계만 정확하면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를.

얼굴처럼 동일한 표면의 들어가고 나온 모양을 표현할 때 이런 밝기관계를 정확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세잔은 청색을 사용하지 않고 남들 하듯이 짙은 살색으로 얼굴을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청색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화가들 보다 배경색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얼굴 뒷부분에 얼굴색의 보색인 청색을 칠해도 보색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적황색조의 얼굴에 청색을 칠함으로써 얼굴의 전체적인 색조가 배경의 청색과 유사해지고 이렇게 색상이 비슷해질수록 그 색들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세잔의 그림과 유사한 사례를 한지희의 일러스트레이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엷은 분홍색 돼지의 몸통에는 엷은 하늘색이 부분적으로 칠해져 있다. 바닥에 있는 개울물의 반사를 표현한 것이다. 개울물의 반사를 표현하기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핑크색과 하늘색은 같이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러스트레이션의 작가는 반사광을 무난히 소화해낼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 그림이 다양한 색감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세잔의 그림에서처럼 하늘색의 밝기가 정확했고, 하늘색과 흰 배경간의 밝기차이가 피카소의 그림에서처럼 작았기 때문이다.

예술과 과학.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분야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이 두 분야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예술속에도 엄연히 과학적 진실이 숨쉬고 있으며 예술은 과학이 탐구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탐구가 가져올 유용성도 무척 커 보인다. “뛰어난 예술가는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2004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지상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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