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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극한 환경 무릅쓴 불굴의 도전

1백여년 탐험역사 중 발생한 조난 사고들

 

남극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는 빙산들. 남극 탐험대 중에는 이런 얼음 위에서 생존한 경우도 있다.


지난해 12월 6일(현지시간) 남극 세종기지 대원들이 탄 고무보트들이 잇따라 조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조난당한 대원 가운데 7명은 다행히 구조됐지만, 안타깝게도 전재규 대원은 차가운 남극바다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먼저 조난당한 동료를 구조하기 위해 나썼던 용감한 청년은 뛰어난 인재였기에 세종기지에 있던 우리는 더욱 애통했다.

우리나라가 남극을 연구한지 벌써 17년째다. 남극은 -89.6℃를 기록한 적이 있을 정도로 지구에서 가장 가혹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남극은 지구환경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며 지구환경변화가 고스란히 기록된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방대한 생물자원과 지하자원이 묻혀있는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다.

인간이 남극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크고 작은 조난과 사고들이 계속되고 있다. 남극탐험에 과학기술이 총동원된 20세기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실수나 기계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예측하기 힘든 남극의 날씨와 인간 심리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남극에서 발생했던 소중한 인명을 앗아간 사고를 통해 남극연구를 재조명해 본다.

생존의 신화 만든 영웅들의 시대
 

남극점 위에 선 스콧과 대원들. 귀환 중 전원 사망했다. 스콧은 남극점 경쟁에서 아문센에 뒤졌지만 마지막까지 용기를 잃지 않은 탐험가로 유명하다.


1895년 남극에 인류가 처음 내려선 이후, 남극이 어떤 곳인지 밝히기 위한 탐험이 활발하게 시작됐다. 1897년 벨기에 남극탐험대는 벨지카호를 타고 남극탐험에 나섰다. 탐험대는 1898년초 남극반도 서쪽의 섬과 지형을 기록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3월초 벨지카호는 알렉산더섬 근처에서 얼음에 완전히 갇혀버리고 말았다. 혹독한 남극의 겨울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남반구여서 계절이 우리나라와 반대다).

해군장교는 심장마비로 죽었고, 5월 중순 태양이 사라지자 사기는 더 떨어졌다. 탐험대는 펭귄과 바다표범의 고기를 먹고, 연료 대신 해표 기름덩어리를 사용하면서 버텼다. 11월 들어서는 몇사람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남극의 여름인 12월말이 되자 탐험대는 얼음을 잘라내, 1899년 3월 중순 얼음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벨지카호는 얼음에 갇힌 상태에서 13달 동안 서쪽으로 6백40km 이상 떠내려갔다. 이 탐험에는 노르웨이의 극지탐험가 아문센이 보수를 받지 않고 참가해 경험을 쌓았다. 아문센은 남극에서 월동한 경험을 살려 1911년 12월 14일 세계 최초로 남극점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20세기 들어서 스웨덴이 가장 먼저 남극을 탐험했다. 1902년 스웨덴 남극탐험대는 지질을 조사하기 위해 남극반도 끝 스노힐섬에서 월동을 했다. 그런데 그들을 데리러온 탐험선 안타크틱호가 얼음에 갇혔고, 1903년 2월 12일 결국 침몰해 버렸다. 선장과 선원 16명은 얼음 위로 내려와 남극 바다를 떠돌다가 28일 폴레라는 아주 작은 섬에 상륙했다. 그들은 펭귄을 잡아먹으면서 겨울을 가까스로 넘겼다.

탐험대와 배가 돌아오지 않자 아르헨티나는 구조대를 구성해 수색에 나섰다. 마침내 구조대는 2년이나 월동한 탐험대를 찾아냈다. 한편 안타크틱호 선장 일행도 기지를 찾아내 폴레섬에 남아있던 선원들 모두가 구조됐다.

한편 영국 지질학자 다글라스 모슨은 동남극 조지 5세 랜드를 조사했다. 그는 1912년 11월 동료 두명과 개 썰매 3대를 타고 탐험에 나섰다. 그러나 12월 14일 기지에서 5백km가 넘는 곳에서 동료를 태운 썰매 1대가 크레바스(빙하 속 균열)에 빠져버렸다.

식량 대부분과 텐트, 옷이 바로 그 썰매에 있었고, 남은 두 사람은 열흘치 식량밖에 없었다. 그들은 개를 잡아 아껴먹으면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료는 아프기 시작했고, 1913년 1월 8일 새벽 숨을 거뒀다. 모슨은 동료를 얼음 속에 묻은 다음, 혼자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면서 1백60km를 걸어서 돌아왔다.

나중에 죽은 동료의 사인은 비타민A 중독으로 밝혀졌다. 육식동물의 간을 날로 먹으면 비타민A 중독에 걸린다. 비타민A는 사람의 몸속에 계속 쌓이며, 심하면 생명을 앗아간다. 모슨이 지나온 곳은 연평균 풍속이 22.2m/s로, 남극에서도 바람이 가장 센 곳이었다. 그는 로버트 스콧과 어니스트 섀클턴과 함께 영국이 자랑하는 3대 남극탐험가다.

스콧은 아문센보다 조금 늦은 1912년 1월 17일 남극점에 도달했는데, 불행히도 귀환중 4명의 대원과 함께 조난당해 생을 마쳤다. 개를 이용한 아문센과 달리 말과 초기 설상차를 선택한 스콧은 잘못된 판단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뤄야 했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위대한 남극탐험가는 어니스트 섀클턴이다. 그는 1914년 남극을 종단하는 탐험에 나섰다. 그의 탐험선인 엔듀어런스호는 1914년 12월 5일 사우스 조지아섬을 떠났는데, 이틀 뒤 생각과는 달리 너무 일찍 얼음을 만났다. 배는 다음해 1월 초순까지 몇km 밖에 남쪽으로 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 1월 19일 남극대륙 부근인 남위 76°34′, 서경 31°30′에서 얼음에 완전히 갇혔다.

섀클턴의 탐험대는 얼음과 떠돌면서 펭귄과 바다표범으로 식량을 대신했다. 배로 물이 많이 흘러들면서 10월 27일 얼음 아래로 내려갔는데, 한달도 되지 못해 배는 가라앉았다. 얼음을 타고 떠내려가던 탐험대는 1916년 4월 14일 작은 보트로 남쉐틀란드군도의 가장 북쪽에 있는 엘레펀트섬에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무려 16달만에 땅을 다시 밟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곳은 안전하지 않았다.

섀클턴은 구출될 방법이 없자 가장 강한 대원 5명을 선발해 4월 24일 작은 돛단배를 타고 항해에 나섰다. 그들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무려 1천3백km나 떨어진 사우스 조지아섬으로 갔다. 몇번이나 죽을 경우를 넘기면서 5월 9일 무사히 사우스 조지아섬 서쪽에 상륙했다. 섀클턴은 아픈 사람과 돌 볼 사람들을 뒤로한 채, 얼음과 빙하로 덮인 무려 2천m가 넘는 산을 넘어서 구조를 요청했다. 결국 8월 30일 엎어놓은 보트에 들어갔던 부상자들과 엘레펀트섬에 남아있던 사람을 포함해 28명 전원이 구조됐다.

남극탐험사상 유례가 없는 집단생존의 신화를 만들었던 섀클턴은 다시 남극탐험을 준비하던 1922년 1월 5일 사우스 조지아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1895년 남극대륙에 인간이 상륙하면서 시작된 ‘영웅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이후 남극에서는 비행기와 쇄빙선을 이용하는 기계 탐험의 시대가 열렸다.

화재 발생하면 눈속이라도 끌 수 없어

비행기는 훌륭한 교통수단이지만 일단 사고가 나면 몽땅 죽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비행기가 남극탐험에 쓰이면서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1904년부터 사우스 오크니군도의 오르카다스 기지를 시작으로, 여러 기지를 운영한 아르헨티나는 긴 역사만큼 사고도 많았다.

가장 큰 비극은 1976년 9월 15일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에서 남서쪽으로 1백km 정도 떨어진 리빙스톤섬에서 일어났다. 아르헨티나 해군비행기가 1천7백m 높이의 버나드산에 충돌해 타고있던 11명 전원이 사망한 것이다. 비극은 계속됐다. 사고가 난 다음해 1월 수습을 나갔던 육군 헬리콥터가 추락해 3명이 더 사망했다.

1979년 11월에는 동남극 로스섬에 있는 에레부스 활화산을 관광하던 뉴질랜드 비행기가 추락해 2백57명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화산의 분화구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한쪽으로 모이면서, 비행기가 심한 바람 속에서 균형을 잃었다고 추측된다. 이 사고 이후 뉴질랜드에서는 비행기로 남극을 관광하는 것이 금지됐다.

1985년 말에는 킹조지섬의 남서쪽에 있는 넬슨섬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킹조지섬 활주로를 찾던 경비행기가 불시착해, 조종사와 승객 등 10명이 사망했다. 칠레 공군장교들이 연말연시를 남극에서 보내자며 초청한 미국인 승객들이었다. 경비행기가 마젤란해협에 있는 푼타 아레나스를 이륙했을 때는 킹조지섬의 날씨가 좋았는데, 도중에 나빠진 것으로 생각된다.

큰 비행기라면 돌아갈 수도 있지만 작은 비행기는 연료 때문에 그러기 힘들다. 그들이 안개 속에서 킹조지섬 활주로라고 기대하면서 착륙한 곳이 넬슨섬의 빙원이었다. 기상팀이 날씨가 좋다고 하더라도 사실 대자연의 변화는 예상하기 쉽지 않다. 너무 작은 비행기를 운행한 칠레 공군당국의 잘못으로 생각된다. 대자연 앞에서 겸손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자주 다닌다고 방심했던 것이다.

1989년 1월말에 일어났던 아르헨티나 물자운반선 바이아 파라이소호의 좌초·침몰도 잊지 못할 사고다. 미국 파머기지를 구경하고 나오던 관광객을 태운 배가 암초에 충돌해 침몰했다. 6천만달러짜리 배도 아까운데다가 대당 1천5백만달러나 하는 헬리콥터 두대도 함께 잠겨버렸다. 암초에 아래쪽 선체가 찢기면서 주기관이 멈췄다고 하는데, 격납고 문을 열지 못해 헬리콥터를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산소절단기로 격납고 문을 자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모두 배에 대해서만 염려하면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고가 발생하자 물자운반과 현장조사를 위해 칠레 해운회사에서 빌렸던 세종기지의 배가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현장으로 급파됐다. 당시 현장에 나갔던 한국해양연구원 송원오 박사에 따르면 바다가 아주 거칠어서 원칙으로는 항해를 중단하고 대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바다의 상황이 좀더 나빴더라면, 구조선마저도 조난을 당할 수 있었던 아주 끔찍한 순간이었다.

이 사고의 결과 세종기지에 있던 우리들은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배에는 반드시 보조기관이 있어야 한다. 주기관이 멈춰도 보조기관을 움직여 비상구조신호와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각 장비의 담당자들은 비상시에 그 장비를 어떻게 구조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배에 있으면 죽는다는 공포심이 들겠지만, 배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불도 무서운 존재다. 남극은 바람이 세기 때문에 불이 더 무섭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이었던 1957년 8월 러시아 미르니기지에서 전기사고로 생각되는 화재가 발생해 건물 한채가 타고, 8명이 희생됐다. 당시 눈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초속 30-40m의 남극 폭설풍(blizzard)이 불었다. 건물이 두께 1.5m의 눈으로 덮였어도 불길이 워낙 강해 불을 끌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1987년 7월 킹조지섬에 있는 칠레공군 프레이기지에서도 화재가 발생해, 건물 한동이 탔고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당시에도 워낙 강한 폭설풍이 불어와 불끄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기지를 지키는 사람 대부분이 군인이어서 화재상황에서 행동이 민간인보다 더 체계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2001년 9월 킹조지섬에서 남서쪽으로 8백km 정도 떨어진 아델라이드섬에 있는 영국 로드라기지에서도 불이 나 실험동이 몽땅 탔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아주 큰 현대식 연구동을 잃어버렸다. 화재의 원인은 문가에 있었던 전선이 문을 여닫는 충격으로 닳아 누전됐기 때문이었다. 문을 여닫는데 전선이 얼마나 닳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닳는 것은 분명 닳는 것이다.

열악한 장비가 위험을 부른다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세종기지 전재규 대원의 시신이 참석자들의 애도 속에 마지막 길을 떠나고 있다.


1993년 5월 14일 킹조지섬의 남서쪽에 있는 넬슨섬에서 체코인 두사람이 실종됐다. 체코는 넬슨섬에 작은 집을 짓고 몇사람을 파견해 겨울을 넘기곤 했다. 그런데 두사람은 세종기지에 왔다가 돌아가던 길에 실종된 것이다. 그때 우리 기지에서는 날씨가 나쁘다며 돌아가기를 만류했다. 그들이 탄 카누는 길이가 5m 정도인데, 뱃전의 높이가 수면에서 겨우 15-20cm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했다.

한때 그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섬에 살아 있다는 그럴듯한 소문이 났다. 지명은 확실치 않으나 섬에 카누가 표류해서 그곳에 살아있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는 칠레 헬리콥터 조종사들이 물개를 인간으로 착각해서 생긴 뜬소문으로 확인됐다.

정신착란에 따른 방화사고도 있었다. 1984년 4월 12일 남극반도 바이아 파라이소만에 있는 알미란테 브라운기지에서 일어났던 사고다. 당시 50대 의사였던 기지대장이 정신착란으로 기지에 불을 질렀는데, 나무로 지은 주요한 건물 모두가 타버렸다. 나무로 기지를 지으면 불에는 약하지만 보온력이 좋고 가공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불을 지른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소문만 떠돌았다. 1년 월동한 다음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정부에서 1년 더 있으라는 명령을 받고 정신이상을 일으켰다는 설이 있다. 또 상당기간 혼자서 실험을 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말도 있다. 세종기지에서 월동하면서 만나는 아르헨티나인들에게 몇번이나 그때 일을 물었는데,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월동대원을 뽑을 때, 심리검사를 두번씩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사람을 골라내기는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1990-1991년 세종기지에서 두번째 월동했을 때 만났던 아르헨티나 주바니 기지대장은 12명이라는 많지 않은 대원 가운데 두사람이나 되돌려보냈다. 일은 잘했지만 한사람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다른 한사람은 술버릇이 좋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 심리학과 교수 등은 남극대원들의 심리나 성격에 관심을 갖고 매년 여름 기지로 와서 연구를 진행한다. 아르헨티나 기지에서 월동하는 대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중류계층 수입의 6-10배를 받는다. 그래도 월동대원을 모집하는게 쉽지 않다고 한다.

남극은 위험한 곳이다. 남극의 바다는 더욱 위험하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해서 자원의 보고이면서 지구의 비밀을 알려주는 남극에 대한 연구를 피할 수는 없다. 우리가 남극을 계속 연구하려면 위험한 점들을 알아서 이에 대해 충분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종기지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사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다. 그 가르침을 잘 배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살아남은 우리가 할 일이다. 이는 27세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피지도 못하고 간 전재규 대원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그의 영혼이 편안히 잠들기를, 남극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 위에서 두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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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장순근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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