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래
끼
파파 스머프. 한국 외국어대 사학과 박성래 교수에게 제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늘 만면에 인자한 웃음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말하는 모습이 닮아서다. 그리고 다소 엉뚱해보이는 농담을 잘 하기에 더욱 그렇다.
한 예로 박 교수는 ‘박성래 달력’을 만들자고 공공연하게 제안한다. 그는 늘 음력이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음력이야말로 오히려 과학적이라고 외치고 다녔다. 우리 민족이 설날을 양력 1월 1일로 공식 지정한 시기는 1896년. 일제시기와 군사정권기를 거치면서 양력설은 더욱 굳어지는 추세였다. 하지만 음력을 지키려는 국민 정서가 강했기 때문에 1985년 정부는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음력설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공휴일은 하루뿐이었죠. 저는 현재의 양력 체계가 단지 서양의 부활절 날짜를 맞추기 위해 정해졌을 뿐이며,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삼은 우리의 음력(태음태양력)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정부와 대중매체를 상대로 강력하게 제기했습니다”.
그의 ‘과학적’ 근거제시 덕에 1989년부터 음력설은 3일 연휴로 지정되면서 민족 최대의 명절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음력이 다소 불편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어서, 춘분(3월 21일)을 1월 1일로 정하는 새 양력, 즉 ‘박성래 달력’을 만들면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
하지만 박 교수 자신도 이 얘기가 실현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전통과학에 대해 모두가 막연하게 수긍하고 있는 생각에 허를 찔러 문제를 인식시키려는 의도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대학에 보낼 생각이 없었지만, 중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자 매형들이 ‘법관이 최고’라며 대학입학을 강력히 추천했다. 하지만 자신은 ‘아인슈타인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전국학술경시대회 도 대표를 뽑을 때 1, 2학년 후배들과 대표로 참가했다. 그런데 그만 혼자 떨어지고 말았다. 본인으로서는 ‘생애 최초의 망신’이었다.
이후 자신이 공부 잘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열심히 공부해 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를 쳐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학교 사정은 학문적 갈증을 채워주기에 너무 열악했다. 상심한 그는 순전히 ‘취직을 위해’ 신문사에 입사했다. 당시 창간된 잡지 ‘과학세계’에 글을 연재하면서 과학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글의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미군들이 읽다 버린 책을 파는 서점을 들락거렸습니다. 여기서 서양 천문학 역사를 비롯한 새로운 과학의 세계를 접하기 시작했어요. 이 우연한 계기 덕분에 평생의 진로를 선택할 수 있었죠.”
그는 과학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의 길을 택했다. 막상 미국 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신체검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한국은 ‘결핵의 왕국’이라 불릴 만큼 환자가 많았다. 그래서 미국 갈 때까지 X선 필름을 가져가 병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약간의 폐병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이 때문에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당시 한 의사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이 주효했다고 한다.
꾀
10여년의 유학 생활 후 귀국한 순간부터 그는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과학사 분야가 황무지나 다름없는 시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시절 여기저기 안끼는 곳이 없고 모르는게 없어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감초’답게 그는 강연, 집필, 방송출연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의 지식과 메시지를 쏟아냈다. 물론 ‘국가 체면’이 걸린 학술적 연구는 당연히 그의 주된 몫이었다.
1996년 8월 26일 열린 제8회 국제동아시아과학사회의에서 박 교수는 “중국학자들이 측우기를 우리보다 먼저 만들었다고 주장한다”며 그 왜곡 내용에 대해 정확한 근거를 토대로 반박했다. 중국과학사책을 조사해보니 중국이 측우기의 원조국이며, 이를 한국에도 배포했다고 기술돼 있어, 국제학술회의에서 처음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당시 중국학자들은 박 교수의 주장에 대해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중국과학사책이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외에도 박 교수가 주장해온 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일본 고대과학기술의 뿌리는 한반도다” “피타고라스정리가 전래되기 훨씬 전부터 우리 조상은 동일한 내용의 구고법을 알고 있었다” 등 그가 전하고 싶은 이런 얘기는 이미 여러권의 책으로 나왔지만 아직 다 담아내기 모자른 형편이다. 과학을 전공한 역사학자가 아니고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꿈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다. 당장은 일제시대에 과학활동을 벌인 인물들이 ‘친일파’로 매도당하는 현실을 고치고 싶다. 예를 들어 올해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이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서울과학관 본관 4층에 개설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생각해보자. 여기에는 고려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업적을 쌓은 과학자 14명의 생애와 유품이 전시됐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전파한 지석영도 후보 명단에 있었지만, 일부 시민단체가 그의 친일 활동을 문제삼아 최종 선정 과정에서 탈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 인물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과학적인 업적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과학의 날’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할 것이다. 현재의 4월 21일은 과학기술처가 발족한 날을 기념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엄연히 과학의 날이 있었다. 일제시대 민족과학운동을 벌인 김용관이 찰스 다윈의 사망일을 기념해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한 적이 있다. 불과 이틀 차이지만 결코 작은 차이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 우리의 과학사를 세계 속에서 바라보는 큰 안목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 한국 역사는 특히 19세기 이후는 세계사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역사를 보는 안목을 확대시킬 수 있도록 계속 얘기할 생각이다.
장회익
끼
30여년 간의 서울대 교수 생활을 마감하고 올해 초 녹색대학 초대 총장을 맡아 화제를 일으킨 장회익 교수. 그는 자신을 ‘도사’라고 소개한다. 물리학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 설명하는데 도가 텄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지칭한 말이다.
녹색대학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과학과 문명을 실현하고자 설립된 국내 최초의 대안 대학이다. 환경과 인간을 파괴해온 현대 문명을 치유해나갈 녹색 전도사를 양성하는 일이 목표다. 그런데 까다로운 조건이 있다.
“녹색대학을 졸업하려면 최소한 뉴턴과 아인슈타인 정도는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조금 주춤해지는 대목이다. 물리학자에게는 ‘최소한 어느 정도’이겠지만, 일반인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교양수준이라지만 미적분학을 비롯한 수학공식을 배워야 하고, 뉴턴법칙이니 상대성이론이니 하는 난해한 물리법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사가 바로 장 교수 자신이다. 30여년 간 대학과 각종 대중강연회에서 물리학을 쉽게 풀어낸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다시 태어나도 반드시 물리학자가 될 것이라 단언하는 물리학 예찬론자다. 제자들이 전공을 바꾸려 할 때 ‘갈 땐 가더라도 물리학을 쥐고 가라’고 강조한다. 그에게 물리학은 ‘세상에서 여의주에 가장 가까운 보물’이다. 과학의 기초적 사고 틀과 방법론이 세상사를 풀어가는데 너무나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끈
“어린 시절 독학할 수밖에 없던 어려운 환경이 오히려 도움이 됐습니다.” 장 교수는 결코 편하지 않았던 소년기를 겪은 덕분에 현재의 자신이 있다고 담담하게 표현한다.
초등학교 시절 수학과 물리학책을 즐겨 보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물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6.25 전쟁이 벌어지자 할아버지가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나 지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어 이때부터 혼자서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도 독학의 길을 걸었다. 다행히 담임선생님이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 대학생용 물리학 교재를 권했는데, 혼자 읽고 소화해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상대성이론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돼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졸업 후 공군사관학교에서 물리학 교관으로 근무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은 양자역학에 기반한 반도체 이론. 박사논문이 완성될 즈음 생물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기본이 된 탓에 DNA의 작동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하던 텍사스대에서는 노벨 화학상(1977년)을 수상한 물리학자 프리고진을 만나 생명현상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프리고진은 열역학적 방법으로 생명을 이해하는 연구를 진행중이었다.
꾀
장 교수는 미국유학 생활을 마치고 서울대에서 자리를 잡은 후 생명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중반에 태양과 지구를 연결하는 하나의 큰 유기적 체계를 생명의 진정한 단위로 파악하는 ‘온생명’ 사상을 정립했다.
1988년 봄 유고슬라비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열린 과학철학 학술대회에서 ‘온생명’ 이론을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생명의 단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 것이었다. 의존적 생명의 단위인 ‘낱생명’과 달리 자족적인 생명의 단위로 태양과 지구를 포함하는 ‘온생명’ 개념을 설정했다. 장 교수는 “프리고진의 생명 이론,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어빈 슈뢰딩거의 생명론 등을 비롯해 동서양사상을 바탕으로 창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생태계 문제도 ‘온생명의 건강’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었다. 인간이 자신만 살겠다고 ‘몸’을 해친 결과가 바로 생태계 파괴라는 것이다. 국내의 굵직한 환경운동에서 장 교수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리고 최근 녹색대학에 몸담으며 평생 자신이 쌓아온 핵심을 전수하려 하고 있다.
그는 1990년 과학의 철학적 기반과 이를 사회, 윤리의 문제로 연결시킨 ‘과학과 메타과학’을 냈으며, 1998년에는 ‘삶과 온생명’을 출간해 본격적인 온생명 사상의 전도사로 나섰다.
이 공로로 2001년 성균관대 심산사상연구회가 수여하는 제14회 심산상을 수상했다.
꿈
‘아인슈타인이 되실 분만 오세요!’ 상당히 과감한 표현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 과학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많겠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영재 학원의 홍보문구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녹색대학 모토의 하나다.
“21세기형 아인슈타인을 키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물론 천재 물리학자를 양성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현재의 병든 문명을 치료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지적 능력과 삶의 자세를 갖춘 후학을 키우겠다는 뜻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삶의 자세란 무엇일까.
“사회문화적인 개혁가로서의 자세를 말합니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세상의 불합리한 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정치적인 발언을 많이 했어요. 인류의 평화를 위해 세계정부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점이 한 사례죠.”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지금 태어난다면 아마도 물리학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 교수는 생각한다. 물리학을 붙들고 있기에는 너무도 긴박하고 중요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바로 위기에 처한 현대 문명의 생존문제다.
그는 아인슈타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21세기형 아인슈타인이 되라”고 권한다. 업적을 많이 내기 위해 과도한 경쟁의식에만 몰두하면 정작 이 세상을 변화시킬 역량을 기를 수 없다는 녹색스승의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