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자공학계의 새로운 화두는 ‘무기여 잘 있거라’다. 물론 여기서 무기는 헤밍웨이가 말한 무기(武器)가 아니라 무기물을 말할 때의 무기(無機)다. 최근 전자공학계는 전자재료를 무기물 대신 유기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고대인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그외의 것들을 이루는 물질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체의 기관(organ)을 이루는 물질을 유기(organic, 有機)물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무기(inorganic, 無機)물이라고 이름지었다.
이후 화학이 발전하면서 생명체를 이루는 물질은 탄소를 중심으로 산소, 질소, 수소로 구성돼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면서 유기물은 탄소가 포함돼 있지만 간단한 구조를 갖는 다이아몬드와 이산화탄소 등을 제외하고 탄소골격으로 이뤄진 물질이라는 의미를 갖게 됐다. 이런 까닭에 유기물은 탄소화합물이라고도 한다. 그외 물질은 무기물로 분류됐다.
지난 세기 전자공학의 눈부신 발전은 무기물의 전기적 특성에 대한 이해 덕분이었다. 알루미늄, 구리와 같은 금속과 함께 규소(실리콘), 갈륨과 같은 반도체의 전기적 특성을 이해하지 않았다면 편리한 삶을 가져다준 각종 전자제품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탄소를 골격으로 하는 유기물은 전기를 잘 통하지 않는다. 때문에 전자공학과는 거의 무관한 물질일 뿐이었다. 대신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각종 화학제품에는 유기물이 널리 쓰였다. 세제, 화장품, 농약, 식품 첨가물, 제약, 인공섬유, 페인트, 플라스틱 제품 등 이루 다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기물이 전자제품에까지 발을 넓히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실수로 밝혀진 전기적 특성
1970년대 과학자들이 유기물에서 전기적 특성에 대한 새로운 점을 발견하면서 유기물이 전자공학계에 데뷔하게 됐다. 일본인 화학자 히데키 시라카와는 새로운 유기물을 합성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촉매를 과다하게 넣는 실수를 했다. 이때 놀랍게도 원래 검은색을 띠는 폴리아세틸렌이라는 유기물이 아름다운 은빛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 흥미를 느낀 그가 온도를 달리해봤더니 그 유기물이 이번에는 구리빛으로 바뀌었다. 은빛과 구리빛은 금속이 갖는 성질인데 유기물에서 나타난 것이다.
같은 시기에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는 화학자 앨런 맥더미드와 물리학자 앨런 히거가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맥더미드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해 자신의 연구를 발표했다. 이 세미나 중간의 짧은 커피타임에 맥더미드와 시라카와는 자신들이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이후 이들 셋은 한자리에 모여 유기물이 금속처럼 전기가 잘 통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1977년 이 연구결과가 발표되면서 당시까지 알려진 유기물의 인상은 완전히 뒤바뀌게 됐다. 이제는 유기물이 전자공학계에서 볼 때 단지 좋은 절연체만이 아니게 됐다. 이들은 이 공로로 200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한번에 찍어내는 칩
이를 계기로 유기물에 대한 전기적 특성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금속처럼 전기가 잘 통하는 유기물 뿐 아니라 반도체와 같은 유기물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즉 유기물은 전기적으로 물질을 분류하는 모든 종류, 즉 도체, 반도체, 부도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유기물의 전기적 성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재 전자공학은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터전을 옮겨가고 있다. 그 결과 미래에는 ‘유기전자공학’의 시대가 펼쳐질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유기전자공학은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유기물은 반도체의 특성을 갖게 되면서 기존 무기물이 전적으로 차지하고 있던 반도체 산업을 넘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유기물은 현재 반도체의 여러 한계를 극복해줄 뿐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까지 보여주면서 전자공학의 핵심재료로 부상중이다.
실리콘과 갈륨과 같은 무기 반도체를 이용한 트랜지스터 개발에는 극한 환경과 복잡한 공정과정을 요구한다. 무기물에서 원하는 전기적 특성을 갖게 하려면 녹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온도와 높은 압력을 요구한다. 실리콘의 경우 1천℃가 넘어야 액체상태가 된다. 또한 녹인 상태에서 반도체의 특성을 갖게 하기 위해 특수한 불순물을 주입하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이물질이 포함되지 않도록 고진공 상태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전체 공정과정에서도 먼지가 있으면 칩 불량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초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무기 반도체 공정은 극한 환경을 요구하는 만큼 공장을 짓는데 많은 돈이 들어간다. 현재 무기반도체 제조공장의 건설에는 1조원대가 소요된다. 그런데 앞으로는 칩의 집적도를 높일수록 그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반면 유기 반도체는 이처럼 극한 환경을 요구하지 않는다. 유기 반도체의 트랜지스터 제조시 2백-3백℃ 정도로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가능하다. 이 정도는 기존 반도체의 제약조건을 상당히 제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기 반도체의 경우 1천℃가 넘는 환경에서 제조되기 때문에 트랜지스터에 포함되는 재료는 고온을 이겨낼 수 있어야 했다. 때문에 기판 재료로 녹는점이 높은 유리나 금속이 쓰였다. 반면 유기 반도체 공정에서는 이보다 낮은 온도이기 때문에 플라스틱과 같은 물질을 트랜지스터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트랜지스터는 플라스틱처럼 잘 휠 수 있다.
유기물을 사용하면 반도체 제조공정도 달라질 수 있다. 기존 반도체 트랜지스터는 반도체, 절연체, 알루미늄이나 구리 같은 금속 등으로 여러 층을 쌓으면서 빛을 쏘아 회로를 만들어낸다. 때문에 전체 제조는 여러 단계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둘둘 말 수 있는 디스플레이
하지만 현재 과학자들은 유기물 재료로 한단계만에 트랜지스터를 제조하는 새로운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미국의 벨연구소에서는 1998년부터 실크스크리닝처럼 한번에 찍어내는 방식의 유기물 트랜지스터를 개발하고 있다. 플라스틱으로 된 얇은 층 위에 회로가 그려져 있는 망을 덮는다. 그런 후 액상의 유기물을 부어 쿡 누르면 뚫어진 부분에만 회로가 그려진다.
한편 유기물을 이용해 잉크젯 프린터 방식으로 칩을 제조하는 연구도 진행중이다. 종이 대신 플라스틱 기판을, 잉크 카트리지에는 유기용액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복사기 전문업체인 제록스는 세계적인 화학전문회사인 다우케미컬과 함께 유기물을 프린터의 잉크로 개발하고 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유기 제조방식이 실용화되면 반도체 제조비용은 종전의 무기물에 비해 1/10 이상 절감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제조되는 유기 트랜지스터는 무기물을 이용한 트랜지스터보다 성능이 우수하지 않다. 유기물이 기존 무기 반도체 산업을 완전히 대체하는 일은 나노(10-9m)세계에서나 가능하다. 유기물은 크기가 수nm에 해당하는 분자로 이뤄져 있다. 이 분자들은 외부에서 일일이 지정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조립해 물질을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자기조립(self-assembly) 능력을 활용하면 나노기술의 혁신을 불러올 수 있다. 따라서 유기물은 전자공학이 나노세계로 들어가는데 큰 역할을 할 주역이 될 수 있다.
한편 유기 반도체는 전기적 특성 못지않게 광학적 특성이 매우 우수하다는 점도 발견됐다. 대표적인 광학적 특성은 유기 반도체 필름에 전류를 흘려주면 빛을 내는 ‘전기장 발광’(electroluminescence)이다. 이 점은 유기 반도체가 차세대 디스플레이의 재료로 활용되게 해준다.
전기장 발광은 전기에너지가 빛에너지로 직접 변환하는 것이다. 때문에 열 발생이 적어 전력이 적게 들고 효율이 좋다. 전기장 발광 현상을 이용한 광원은 20세기 초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 광원을 발광다이오드(Light Emitting Diode, LED)라고 한다.
지금까지 발광다이오드는 집적회로처럼 무기 반도체로 만들어졌다. 발광다이오드는 무기물의 종류를 달리하면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의 빛을 낸다. 따라서 이들을 이용해 저전력의 디스플레이를 개발할 수 있다. 지난해 월드컵의 함성과 함께 했던 거리의 전광판 중에는 발광다이오드를 이용한 것도 있다.
마찬가지로 유기 반도체로도 효율이 높은 발광다이오드가 가능하다. 1987년 미국 이스트코닥사의 중국인 과학자 칭 W. 탕이 처음으로 유기 발광다이오드를 개발했다.
분자세계를 설계하는 유기화학자
그런데 발광다이오드를 유기물로 대체할 경우 디스플레이에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됐다. 유기 반도체는 무기 반도체보다 가볍고 무엇보다도 소재 자체가 유연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1백-2백nm 정도의 유기박막층을 사용하기 때문에 두께가 무척 얇다. 그래서 얇은 종이처럼 만들 수 있어 둘둘 말 수 있다. 이처럼 유기 반도체를 이용한 디스플레이는 딱딱하고 무거우며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기존의 디스플레이를 몰아내고 새로운 개념의 ‘플렉서블(flexible, 구부러지기 쉽다는 의미) 디스플레이’ 시대를 열어주고 있다.
이런 놀라운 장점 때문에 디스플레이 영역에서의 유기물 활용이 다른 전자분야에 비해 빠르게 진척되고 있다. 유기 반도체를 이용한 디스플레이 제품이 이미 출시돼 있을 정도다. 한편 유기물은 디스플레이 외의 다른 광전자공학 영역에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광통신, 광저장매체, 그리고 태양전지의 개발 분야가 그렇다. 이 경우에도 유기물을 이용해 값싸고 효율이 높은 광전자시스템을 이뤄낼 수 있다.
전자공학의 재료로서 유기물이 갖는 매력은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하대 물리학과 이창희 교수는 “재단사가 맞춤양복을 만들 듯 전자공학자는 유기물을 이용하면 자신이 원하는 특성의 소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강력한 장점”이라고 말한다.
유기물은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화학전공자 중에는 외워야 할 유기물이 엄청난데 질려서 화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유기물의 핵심인 탄소는 지구에 있는 1백여가지의 원소 중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화합물에 포함돼 있다. 탄소로 된 화합물이 많은 까닭은 다른 원자의 전자와 결합할 수 있는 팔이 4개로 다른 원소에 비해 많고 원자량이 작기 때문이다. 원자량이 클 경우 최외각 전자가 원자핵에서 멀리 있기 때문에 다른 원자와의 결합이 약해 안정한 분자를 이루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유기물은 쉽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19세기 초 화학자들은 유기물을 인공적으로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화학이 발전하면서 유기물을 합성해내는 방법이 수없이 많이 개발됐다. 유기화학자들은 세제, 화장품, 약품으로 쓰일 유기물을 설계하고 합성해내는 건축가적 능력을 갖게 됐다. 최근에는 유기물의 설계에서 컴퓨터를 활용하면서 매년 10만개 정도의 새로운 유기물이 등장한다.
이창희 교수는 “유기화학자들은 이제 분자세계의 설계기술을 전자공학 분야에서 펼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유기전자공학은 새로운 유기물 제조능력을 가진 유기화학자와 어떤 물질을 필요로 하는지를 아는 공학자나 물리학자가 공동으로 연구하는 학제간 영역이다.
화학적 변성이 걸림돌
유기물을 이용하는 또다른 장점으로 생체와의 적합성을 빼놓을 수 없다. 앞으로 전자공학은 생명공학과의 융합을 통해 신체의 장애와 질병을 극복하는데 기여할 전망이다. 전자공학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 생체적합성 소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시각 장애인에게 인공적으로 시신경을 전기적으로 자극해주는 인공망막이 그렇다. 현재는 눈에 이식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전기시스템을 만드는데 무기물이 이용된다. 하지만 무기물은 인체 내 단백질과 같은 생체물질에 잘 이식되지 않는다. 유기물은 생체물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단박에 해결해줄 수 있다.
이처럼 유기전자공학은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긴 하지만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다. 유기물은 공기와 빛, 물에 노출되면 화학적 성질이 변하기 쉽다. 이런 까닭에 현재는 수명이 짧고 안정성이 부족하다.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유기전자공학의 큰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