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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바위들의 장엄한 행렬 비슬산 돌강

정상에서 기슭까지 2km 잇는 장관

1999년 11월. 제법 추운 날씨 속에서 두명의 지리학자가 비슬산에 도착했다. 대구대 지리교육과 손명원 교수와 필자. 작은 다리를 건너 비슬산의 첫 관문인 소재사를 지나 자연휴양림 매표소를 통과했다.

잠시 후 필자의 눈앞에는 장엄한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마치 큰 강물이 서서히 흘러내리듯 해발고도 1천여m 비슬산 정상부터 산기슭인 자연휴양림 입구까지 거대한 바위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돌강의 수려한 경관에 정신이 팔려 늦가을의 쌀쌀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한참을 뛰어다니면서 돌강의 모습을 필름 두통 가득히 담았다. 소중한 골동품이라도 얻은 것처럼 한편으로는 조바심이 다른 한편으로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필자와 비슬산 돌강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대구시 남쪽 비슬산 암괴류 발견


비슬산 정상부의 화강암 표면 에 수직 또는 수평으로 형성된 틈인 절리.


1986년 필자는 박사과정 연구논문의 주제를 찾기 위해 국내 여러곳을 답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경남 삼랑진 만어산에서 돌강이라는 지형을 처음 접했다. 고려시대에 건축된 절인 만어사 주변에 강처럼 늘어서 있는 거대한 바위들은 갓 학문의 길로 들어선 필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산지의 돌강에 관한 국내외 관련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처음 돌강 연구 지역으로 삼은 곳은 태백산맥의 남부산지, 즉 운문산-가지산-간월산-신불산-취서산에 이르는 해발고도 1천여m 이상의 고산지였다. 산악인들에게는 ‘영남알프스’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태백산맥이라고 하면 강원도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지리학적으로 볼 때 태백산맥은 강원도 북단부터 부산까지 연결돼 있다.

돌강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지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우연히 대구대 손 교수로부터 비슬산의 돌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바로 다음날 필자는 손 교수와 함께 비슬산의 돌강과 첫 만남을 가졌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대구에 살고 있으면서도 가까운 비슬산에 이렇게 소중한 지형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멀리 경남까지 가서 연구를 했으니 말이다.

대구 분지는 북쪽의 팔공산지와 남쪽의 비슬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팔공산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도를 하면 반드시 한번의 소원은 들어준다는 갓바위(관봉)와 노태우 전대통령 재임 당시 건립한 국내 최대 규모의 불상인 통일대불이 있는 동화사가 팔공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비슬산이라는 이름은 대구 시민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에게는 약간 생소한 편이다. 현재의 비슬산 자연휴양림 일대는 1980년대 행정구역상 대구시가 아닌 경북 달성군 소속이었고 교통편도 수월하지 않아서 쉽게 가볼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이 산의 돌강이 산악인과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잦아졌다.

화강암 부서져 만들어진 푸석바위

돌강이라는 용어는 돌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모습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돌강의 정확한 명칭은 ‘암괴류’(block stream). 하지만 필자도 일본식 한자어인 암괴류보다는 우리 정서에 더 맞는 것 같아 돌강 또는 바위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주인공은 화강암이다. 그렇다면 화강암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돌강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지각이나 맨틀의 상부에 있던 용융 상태의 마그마가 위로 올라오면서 식으면 굳어져 화강암이 형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강암이 점점 더 지표 가까이로 올라오면 위에서 누르는 큰 압력이 줄어들어 팽창한다. 이 과정에서 화강암 표면에 수직 또는 수평으로 균열된 틈이 많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절리’(joint)다. 여기에 수분이 스며들면 암석이 부서진다. 이 과정을 심층풍화 또는 지중풍화라고 한다. 땅 속에서 진행되는 풍화작용이라는 뜻이다.

풍화가 시작되면 암석의 모서리가 점점 깎여 나중에는 둥근 돌이 된다. 이것을 ‘돌알’(핵석, core stone)이라고 한다. 또한 거의 부스러진 상태의 작은 모래 또는 진흙 덩어리도 형성되는데, 이는 ‘푸석바위’(석비레, saprolite)라고 부른다(그림 1).
 

(그림1) 돌알, 푸석바위, 탑바위가 만들어지는 과정


돌알과 푸석바위는 화강암 산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설악산의 흔들바위와 비슬산 돌강을 이루고 있는 돌은 모두 돌알이다. 그렇다면 돌알과 푸석바위가 어떻게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장관을 연출하게 됐을까.

지구는 지금으로부터 수백만년-1만년 전은 빙하기, 즉 1년 중 가장 따뜻한 달의 평균기온이 영하이며, 물이 항상 얼음 상태로 존재하는 기후였다. 특히 마지막 빙하기였던 8만년-1만년 전의 기간 동안 우리나라는 보통의 빙하기후보다는 기온이 조금 높아 0℃를 오르내렸다. 이런 기후를 ‘주(周)빙하기후’라고 한다. 현재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미국의 알래스카 등지에서 나타나는 툰드라 지역이 주빙하기후에 해당된다. 이곳은 대체로 연중 9개월 이상은 기온이 영하, 3개월 이하는 영상이다.

0℃ 오르내리던 기후 때 형성

돌강은 마지막 빙하기 동안의 주빙하기후 환경에서 만들어졌다. 기온이 영하에서 영상으로 올라가면 얼어 있던 지층 중 지표에 가까운 부분은 녹아서 마치 밀가루반죽처럼 유연한 상태로 변한다. 이런 상태의 지층을 ‘활동층’이라고 한다. 활동층 아래에는 연중 녹지 않고 얼어 있는 지층(영구동토층)이나 풍화를 받지 않은 신선한 상태의 바위층(기반암층), 물이 통과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치밀한 층(불투수층)이 있다. 이런 단단하고 치밀한 지층에는 수분이 잘 스며들지 않는다. 따라서 수분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에 활동층이 유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푸석바위와 돌알로 구성된 활동층은 약간의 경사만 있어도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쪽으로 이동한다. 이런 현상을 ‘솔리플럭션’(solifluction)이라고 한다. 산지 곳곳에서 형성된 활동층은 계곡 쪽으로 연간 수-수십cm 정도로 서서히 이동한다. 그러다가 빙하기가 끝나면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멈추게 된다. 그후 비가 와서 이런 지형들 사이로 물이 흐르게 되면 모래나 진흙과 같은 작은 물질들은 씻겨 내려간다. 따라서 무겁고 큰 돌만 남아 마치 강물처럼 흘러 내려가는 모습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돌강으로는 비슬산 돌강과 더불어 경남 삼랑진 만어산 돌강(길이 1km, 경사 15°)과 부산 금정산 돌강(길이 0.8km, 경사 14°)이 있다. 특히 만어산 돌강에는 전설이 전해진다. 만어산 근처는 먼 옛날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던 바다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바다가 육지로 변하면서 물고기들이 모두 바위로 변해버렸다. 그후 고려 때 이곳에 절을 지었는데, 그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있는 절’이라는 뜻의 만어사(萬魚寺)라고 지었다고 한다. 최대 폭 약 1백20m, 길이 약 1km에 달하는 만어사 돌강의 거대한 바위들 중 어떤 것은 두드리면 목탁소리나 종소리가 나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영험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화강암 속에 들어 있는 광물 성분의 구성비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소리라고 판단된다.

미국, 뉴질랜드, 캐나다, 영국, 호주, 일본 등지에도 돌강이 발달해 있다. 영국 다트무어에 길이 0.9km, 경사 7° 규모의 돌강이 있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지역에도 길이 0.8km, 경사 22°인 돌강이 형성돼 있다. 비슬산 돌강은 그 길이가 약 2km에 달해 경사가 15°인 돌강 중 세계에서 최대규모다.

돌강엔 둥근 돌, 너덜지대엔 각진 돌
 

(그림2) 돌강이 형성되는 과정


한편 경사가 없는 지층에서는 푸석바위가 제거되고 나면 돌알들이 풍화되지 않은 기반암이나 다른 돌알 위에 그대로 탑처럼 쌓인다. 이를 ‘탑바위’(토르, tor)라고 부른다. 토르라는 말은 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영국 남서부 콘월 지방의 토속어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금강산, 설악산, 북한산, 매화산, 속리산, 팔공산 등지의 탑바위가 잘 알려져 있다. 비슬산 돌강이 시작되는 정상부 일대에도 부처바위, 곰바위, 형제바위, 스님바위, 기도바위, 코끼리바위, 상감모자바위 등 무수히 많은 바위들이 층층이 쌓여있다. 설악산의 흔들바위도 거대한 바위 위에 돌알인 흔들바위가 놓여 있으므로 일종의 탑바위다.

돌강과 더불어 주빙하기후 환경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지형이 한가지 더 있다. ‘애추’가 바로 그것. 애추는 일본식 한자어이므로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너덜지대’ 또는 ‘너덜겅’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다. 너덜지대는 우리나라 산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지형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너덜지대는 경남 밀양 천황산에 있다. 이곳은 한여름에도 고드름이 맺히는 얼음골로 유명하다. 얼음골은 이런 너덜지대에서만 발달하고 있어 흥미롭다. 충북 제원군 금수산의 얼음골, 경북 청송의 얼음골 등지도 모두 너덜지대다.

돌강과 너덜지대는 외형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돌이 이동한 방식에 차이가 있다. 지표에 노출된 거대한 절벽 모양의 바위에 절리가 형성되면 그 사이로 수분이 스며든다. 이 수분이 얼어 절리 사이가 점점 벌어지면 절리를 경계로 각진 바위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이 바위들이 아래로 굴러 떨어져 쌓인 것이 너덜지대다. 너덜지대가 만들어진 이런 과정을 ‘암석낙하’(rock fall)라고 하며, 돌강을 만들어낸 솔리플럭션 방식과는 다르다(그림 3).
 

(그림3)너덜지대가 생기는 과정


너덜지대의 돌은 돌강에 비해 비교적 작다. 비슬산 돌강을 이루고 있는 돌은 길이가 보통 1m 이상이며 10여m가 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너덜지대의 돌은 크기가 주로 1m 이하인 것이 대부분이다. 돌강의 돌은 고온다습한 땅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주로 둥근 형태다. 이에 비해 너덜지대의 경우 지면에 노출돼 있던 돌에 한랭건조한 상태에서 수분이 스며들어가 언 다음 부서졌기 때문에 각져 있다. 즉 어떤 기후조건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따라 돌의 모양이 달라진 것이다. 또한 돌강은 경사가 15° 내외로 완만한 반면, 너덜지대는 약 30° 정도로 급한 경사를 보인다.

돌강과 참꽃군락지 천연기념물 예정

비슬산 자연휴양림을 등산하다 보면 등산로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둥근 형태의 큰 돌들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계곡을 따라 이어져 있는 돌강이 있다. 돌강은 마지막 빙하기 동안 한반도가 주빙하기후 환경에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지형이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등산로의 왼쪽에는 각진 형태의 작은 돌들이 좀더 급한 경사를 이루며 너덜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같은 화강암이라도 형성된 방식에 따라 다른 지형을 만들어낸 돌강과 너덜지대를 한번에 관찰할 수 있는 비슬산은 그 자체가 훌륭한 교육자료다.

돌강의 주변 경관도 매우 수려하다. 미국의 지형학자 데이비스는 그의 지형윤회설에서 최초의 평탄한 지형면이 융기해 원지형면이 형성되고, 오랜 기간 동안 침식을 받아 장년기와 노년기 지형을 거쳐 최종적으로 준평원 지형이 된다고 했다. 장년기 때는 산지가 매우 높고 험준한데, 설악산이나 지리산이 이에 해당된다. 그후 노년기 때는 산지가 많이 깎여 비교적 낮은 구릉성 산지가 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지가 노년기 지형이다. 높은 부분이 다 깎여 거의 평지에 가까운 지형인 준평원이 형성되면 더이상 침식과 퇴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북한에 있는 낙랑준평원이 이런 지형이다.

준평원이 융기해 산지를 형성하면 산 정상부는 평탄하다. 이를 고위평탄면 또는 융기준평원이라고 한다. 돌강이 시작되는 비슬산 정상 부근에도 여의도 면적의 1/3 정도인 약 30여만평에 이르는 고위평탄면이 있다. 4월 하순경에는 여기에 참꽃이 군락을 이뤄 온 산을 붉은색으로 물들인다. 달성군에서 매년 4월에 개최하는 비슬산 참꽃축제 때는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지난 2001년 3월 필자는 문화재청에 비슬산 돌강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관할 지방자치단체인 대구광역시의 행정 협조를 받아 현재 지정을 눈앞에 둔 상황이다. 또한 올해 봄 문화재청에서는 비슬산을 방문한 후 참꽃군락지도 국가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대구광역시가 이를 위한 행정 절차를 밝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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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전영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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