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20일, 나에게 한통의 e메일이 날아왔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진화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 박사가 아프리카 콩고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3일만에 운명을 달리했다는 부고였다. 내 눈을 의심했지만 조만간 이 소식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었다. 장례식은 5일 후에 영국 옥스퍼드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나는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부랴부랴 짐을 꾸려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다윈 이래로 진화생물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들을 창안한 전설적인 학자가 돌아가시다니….’
해밀턴 박사의 장례식에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던 진화론의 대가들이 다 모였다. 해밀턴의 이론을 ‘이기적 유전자’라는 용어로 대중화한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해, 해밀턴에게 지적인 빚을 조금이라도 진 학자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도킨스측 학자들과 계속해서 마찰을 빚어온 하버드대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와 집단 유전학자 르원틴도 애도의 뜻을 직접 표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왔다. ‘생물학과 철학’이라는 학술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스티렐니와 저명한 생물철학자 소버가 장례식에 참석한 몇몇 대가들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이번 기회에 진화론을 둘러싼 그간의 혈전을 한번 결판내 보자는 것이다. 그들은 진화론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도킨스와 굴드를 제일 먼저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화 무림의 이 두 고수들은 모두 바쁜 일정을 핑계로 고사했다. 어쩌면 이 토론의 결과가 미칠 파장을 우려했는지는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닷새 동안 매일 저녁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한 후에 두시간 정도 토론을 하기로 합의했다. 내가 그 모임을 ‘다윈의 식탁’으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하자 다들 좋다고 찬성한다. 덕분에 나는 그 토론의 서기로 임명되는 영광을 누렸다.
장소는 토론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다윈의 손자가 설립한 케임브리지대의 다윈 칼리지 교수 식당으로 정해졌다. 나는‘네이처’의 편집장과 BBC 방송국 측에 토론의 일정과 토론자 명단을 급송했다.
드디어 다윈의 식탁 첫째날 저녁이 왔다. 식탁 주위에는 몇시간 전부터 BBC TV 카메라가 준비 상태로 있고, 식탁 뒤편에는 네이처의 편집장을 비롯해 저명한 진화생물학자들이 몇명씩 짝지어 앉아 있다. 방청객은 20명 정도로 모두 초청받은 사람들이다.
함께 식사를 마친 패널들이 지정된 자리에 앉기 시작한다. 토론이 이뤄지는 식탁은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사회자를 중심으로 양 옆쪽에 ‘굴드팀’(G팀)과 ‘도킨스팀’(D팀)이 마주 앉도록 돼 있다.
오늘은 첫날이기는 하지만 토론의 주제나 토론자의 면면으로 미뤄봐 틀림없이 다윈의 식탁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다. 오늘의 토론 쟁점은 자연선택의 산물인 ‘적응’을 그렇지 않는 것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자연선택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행동도 자연선택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관한 토론들이다.
토론 시간이 임박해지자 D팀 테이블에 도킨스와 에드위드 윌슨, 핀커, 그리고 코스미디스가 차례로 앉기 시작했고, 맞은 편 G팀에는 굴드와 르원틴, 촘스키, 그리고 코인이 자리를 잡았다(촘스키는 해밀턴 박사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며칠 전 세계평화대회 기조 연설자로 런던에 왔다가 핀커 교수의 부탁을 받고 출연하게 됐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건 꿈에서나 가능한 라인업이다! 내가 지금 이 역사적인 자리에 앉아 있다니, 그것도 서기로서.'
사회자(소버): 안녕하십니까? 역사적인 토론회를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토론의 사회를 맡은 엘리엇 소버입니다. 다윈의 식탁에 초대받으신 토론자와 방청객으로 참여하신 여러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토론자들께 한가지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다윈의 식탁은 전문가들의 토론이긴하지만 BBC와 네이처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는 만큼 되도록 쉬운 말로 의견을 개진해주십시오. 저는 사회자이지만 가급적 토론회에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사실 오늘의 토론자들은 별도의 소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나 유명하신 분들입니다(사회자는 돌아가며 토론자들을 짧게 소개한다).
예고해드린 대로 오늘 토론의 쟁점은 자연선택의 힘에 관한 것입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이후로, 자연선택은 진화론에서는 물론 생물학 전반을 통해서도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개념으로 평가받아 왔습니다.
각양각색의 개체들로 구성돼 있는 어떤 개체군에서 특정 개체들이 다른 개체에 비해 환경이 부과하는 문제들을 더 잘 해결한다고 해봅시다. 진화론의 교과서에 흔히 등장하는 후추나방의 예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될 것입니다. 후추나방의 경우에 어두운 색깔을 내는 색소 유전자들이 대물림된다면 세대가 거듭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어두운 색깔의 후추나방이 천적에게 쉽게 발견되는 밝은 색의 후추나방보다는 더 많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즉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개체군 내 형질들의 분포가 처음에 비해 크게 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시점에서는 새로운 종도 탄생될 수 있겠죠.
이것이 바로 다윈이 제시했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핵심입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대체로 자연선택의 산물을 ‘적응’이라고 부릅니다. 즉 적응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과정이 자연선택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적응과 적응이 아닌 것들을 구별하는 합당한 기준과 측정방법 등을 놓고 지금까지 많은 논란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자연선택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그 힘이 인간의 행동과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에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해왔는지에 대해 생물학계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진행돼 왔습니다. 이 논쟁은 자연선택의 힘을 강조하는 ‘적응주의’와 이 힘을 경시하는 ‘반적응주의’ 간의 논쟁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토론에는 도킨스 교수를 비롯한 대표적 적응주의자들과 사명감을 갖고 적응주의를 반대해오신 반적응주의자들(굴드와 르원틴을 가리키며)이 함께 앉아 계십니다.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기 위해 좀 구체적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코스미디스 교수님, 남성의 강간 행동은 적응입니까?
코스미디스(D팀): 아마도 진화생물학자 쏜힐 교수가 최근에 쓴 ‘강간의 자연사’(2000)를 염두에 두고 하신 질문같군요. 저는 남성의 강간 행동이 단지 폭력이며 학습된 문화적 행동일뿐이라는 기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쏜힐이 잘 보여줬듯이 강간은 오랜 진화의 역사 동안 직접적으로 자연선택됐거나 또는 왕성한 성적 활동 때문에 생겨난 성적인 행동입니다.
코인(G팀): 과연 그럴까요? 그 악명 높은 책은 저도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네이처’에서 서평을 써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읽었지만, 제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끔찍한 경험이었습니다.
쏜힐은 그 책에서 강간이 왜 적응인지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통계자료를 잘못 처리해 놓고는 가임기 여성이 비가임기 여성에 비해 강간의 피해가 더 크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통계자료를 보면 44세 이상의 피해 여성(비가임기 여성)과 12-44세 사이의 피해 여성(가임기 여성)이 정신적 충격과 폭행에 의한 피해 측면에서 별 차이가 없는데도, 쏜힐은 큰 차이를 보인다고 주장했지요.
또한 쏜힐 교수는 그의 연구대상인 수컷 ‘밑들이’(scorpion fly)에게 강간 행동을 용이하게 하는 특정한 기관이 존재한다는 점을 근거로 인간의 경우에도 남성의 강간 행동이 적응이라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미숙함과 왜곡 행위는 현재의 진화심리학이 좋은 과학의 징표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보기에 진화심리학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지 과학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강간이 짝짓기에 어려움을 겪는 남성에게 하나의 적응적 행동이라니요?
코스미디스(D팀): 확대 해석이 지나치시군요. 방금 지적해 주신 통계자료 부분에서 쏜힐이 약간의 실수를 범했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밖에 그의 전체적인 논지와 방법론 등에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코인 교수의 서평을 읽으면서 코인 교수야말로 진화생물학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한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진화생물학계에서 적응에 대한 논의들이 얼마나 세련되게 발전해 왔는지를 전혀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쏜힐의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그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강간의 적응적 요소들을 추려내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실 겁니다. 하기야 초파리 유전학이 진화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는 볼 수 없겠죠(코인의 주전공이 초파리 유전학인 것을 비꼰 말이다).
사회자: 강간이 적응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란은 과학 내부의 논쟁을 넘어서 인문사회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도 큰 파장을 몰고 온 것 같습니다. 핀커 교수께서 이 부분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쏜힐의 책 뒷날개에 추천의 글을 써주시지 않으셨나요?
핀커(D팀): 네 그렇습니다. 저는 오히려 인문사회학자들이 인간의 성 행동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이데올로기적으로만 접근하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쏜힐의 연구가 성차별적·수구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쓰레기’라고 비난하시는 분들은 적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쏜힐의 주장대로 강간을 적응이라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남성의 강간 행동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고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뜻이 됩니까? 강간이 적응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일차적으로 사실에 관한 진술일 뿐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런 사실 진술을 가치 진술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추천의 글을 쓰게 된 동기 중 하나는 강간 행동을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때 오히려 강간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더 효과적인 방법들이 모색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회자: 강간 논쟁은 이쯤 해두죠. 논의해야 할 게 많으니까요. 이제 자연스럽게 적응이 무엇이며 그것을 적응이 아닌 것들로부터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는가 라는 문제로 넘어온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떤 형질을 자연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진 적응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까?
도킨스(D팀): 가장 분명한 예는 인간의 눈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19세기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는 인간의 눈이 가진 정교함을 근거로 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다윈은 설계자로서 ‘신’ 대신에 ‘자연선택’을 끌어들인 사람이죠. 자연선택만이 이런 정교한 형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어떤 형질이 적응이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이상의 복잡성을 보여야 합니다.
굴드(G팀): 그것 참 애매한 기준이네요. 도대체 얼마나 복잡해야 적응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부산물이 된다는 말입니까? 사실 저와 르원틴 교수는 적응을 가려내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지난 20여년 동안 줄기차게 경고해왔습니다. 1979년에 저희 두사람이 발표한 ‘성마르코 성당의 스팬드럴과 빵글로스적인 패러다임’이라는 논문은 이미 고전이 됐더군요.
르원틴(G팀): 굴드 교수와 저는 그 논문에서 적응을 너무도 손쉽게 양산해내는 그 당시 진화생물학자의 풍조를 ‘적응주의 프로그램’이라고 부르고 호되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형질이 자연선택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굴드 교수는 이런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적응주의의 전형적인 실수를 ‘스팬드럴’이라는 건축물에 빗대었죠.
굴드(G팀): 별 말씀을. 화면을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스팬드럴은 대체로 역삼각형 모양인데 돔을 지탱하는 둥근 아치들 사이에서 형성된 구부러진 표면을 지칭합니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성 마르코 성당에 있는 스팬드럴은 네명의 기독교 사도들이 그려져 있는 타일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지요. 적응주의자들은 이런 스팬드럴을 보고 틀림없이 기독교적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구조물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 스팬드럴은 아치 위의 돔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구조적인 부산물일 뿐인데 말이죠.
르원틴(G팀): 적응주의자들은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낙천주의를 야유하기 위해 쓴 ‘깡디드’(1759)에 등장하는 빵글로스 선생에 비유될 수도 있습니다. 깡디드에 나오는 이 선생은 모든 일, 심지어 지진마저도 신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최선이라고 믿습니다. 적응주의자들도 자연선택이 거의 모든 형질을 가장 최선으로 만들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우스개 소리지만 극단적인 적응주의자들은 우리의 코는 안경을 받치기 위한 적응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핀커(D팀): 좀 전에 굴드 교수가 1979년 논문이 이제는 ‘고전’이 됐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두분 교수님과 다른 의미에서 그 단어를 쓰고 싶습니다. 단언하건데, 오늘날 ‘거의 모든 형질이 적응’이라고 믿는 적응주의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1979년이면 몰라도 지금은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십시오.
저는 최근에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1997)라는 책에서 인간의 종교와 예술 등은 인간만이 할 수 있으며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응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적응을 양산했던 1970-1980년대하고는 사정이 다릅니다. 지금은 세련된 적응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에드워드 윌슨(D팀): 이 대목에서 제가 고백 비슷한 것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생물학’(1975)이나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1978) 같은 제 책을 꼼꼼히 읽어보신 분들은 제가 이런 쟁점에 대해서 다소 둔감했었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제가 진화 이론을 인간의 행동에 적용하는 야심찬 작업을 하다보니 때로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코스미디스(D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다니 사회생물학을 계승·발전시킨 진화심리학자로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도 윌슨 교수의 몇가지 실수를 알고 있지만, 그런 실수가 인간의 마음과 행동, 그리고 문화를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기 위한 교수님의 선구적 노력을 절대로 깎아 내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교수님의 최근 역작인 ‘콘실리언스: 지식의 대통합’(1998)에는 최근의 진화심리학적인 성과들도 상당 부분 반영돼 있어서 좋았습니다.
에드워드 윌슨(D팀): 그렇게 말씀하시니 큰 위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다소 묘해졌다. 윌슨 같은 대학자가 공개 석상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뜻밖의 사태에 대해 모두들 적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이때 사회자가 재빨리 촘스키에게 마이크를 넘긴다.
사회자: 촘스키 교수님은 언어의 보편문법을 주장하시면서도 언어 능력이 자연선택의 산물은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것 같은데요, 맞습니까?
촘스키(G팀): 네 그렇습니다. 언어기관이 생득적이긴 하지만 언어능력은 기본적으로 두뇌가 커졌기 때문이거나 일반지능의 발달 때문에 부산물로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언어가 의사소통을 위해 자연선택됐다고들 하지만 저는 언어의 일차적인 기능이 ‘독백’이라고 봅니다.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일종의 정신언어인 셈이지요.
핀커(D팀): 바로 이 대목이 촘스키 교수님과 제가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입니다. 이른바 ‘언어 부산물 이론’은 몇가지 큰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우선 언어 능력과 일반 지능이 항상 같이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일반 지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언어 능력에 큰 손상이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2년 전에 발견된 ‘FOXP2’ 유전자는 언어 능력과 일반지능의 분리를 지지하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 유전자에 변이가 생긴 사람은 다른 뇌기능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말하기와 문법 능력에 심각한 장애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침팬지와 고릴라를 비롯한 영장류 동물과 심지어 쥐도 FOXP2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유전자는 두 부분에서 인간의 FOXP2 유전자와 차이가 납니다. 염기서열 분석을 통해 밝혀진 바로는 이런 변이가 12만년 전쯤에 생겼다고 합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고고학자들이 대략 이 시기에 인간의 문화가 시작됐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FOXP2는 언어 능력을 관장하는 수많은 유전자 중 하나일 터이지만, FOXP2의 발견은 언어 능력의 유전적인 기초를 처음으로 밝혀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언어를 두뇌나 일반 지능의 부산물로 보는 견해는 최근의 과학적 성과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회자: 그렇다면 언어가 일종의 적응이라는 말씀이신가요?
핀커(D팀): 물론이죠. 저는 그동안 언어가 정보소통 때문에 진화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언어는 적응형질이 만족해야 하는 까다로운 여러 기준을 다 통과합니다. 구체적인 증거들은 제가 쓴 ‘언어 본능’(1994)에 정리돼 있습니다. 고도로 복잡한 기능을 하고 있는 언어가 적응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형질들이 적응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르원틴(G팀): 글쎄요. 저는 그렇게 확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진화적 과거에 관한 지식은 늘 불확실한 겁니다. ‘단지 그럴듯한 이야기’(just so story)로 구렁이 담 넘어 가듯 한다고 해서 설명이 됐다고 볼 수 없죠.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핀커 교수, 그러면 최초로 문법을 갖게 된 한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됐는지, 그래서 결국 문법능력이 전 개체 내로 퍼지게 됐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단 단지 그럴듯한 이야기는 사양하겠습니다.
핀커(D팀): 좋습니다. 동물행동학적인 대답을 먼저 해보죠. 동물들은 새로움(예컨대, 최초의 문법)에 직면한다고 해서 쉽사리 포기하지 않습니다. 무관심하거나 피하는 행동을 하다가도 어떤 시점에서는 무작정 따라하거나 흉내를 내기도 하며 심지어 주의깊게 배우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도킨스 교수님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도킨스(D팀): 예를 들어보죠. 일본 고시마 섬에 살고 있는 마카크원숭이 중 ‘이모’(Imo)라는 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놈이 더러운 감자를 처음으로 바닷물에 씻어먹기 시작했죠. 그러자 다른 원숭이들도 몇세대 안에 거의 전부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새로운 형질이 어떻게 개체군 내로 확산되는가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입니다.
핀커(D팀): 매우 적절한 사례를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한편 최근에는 이론 생물학자들 사이에 언어의 진화를 시뮬레이션하는 작업이 유행입니다.
그들은 언어가 아주 단순한 원시형태의 소통 체계에서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가를 수학 모형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기능만으로도 언어는 화자와 청자의 적응 정도를 높여주는 쪽으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문법을 가진 언어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런 증거들은 모두 언어가 의사소통을 위한 적응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줍니다.
촘스키(G): 말씀하신 사례들은 모두 간접적인 증거일 뿐이지 않습니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좀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증거인데….
사회자: 아, 이거 어쩌죠. 논쟁이 한참 무르익어 가는데 벌써 끝을 맺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다윈의 식탁 첫날이라 그런지 시간이 매우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오늘 토론은 큰 틀에서 보면 자연선택의 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즉 자연선택에 의해 산출된 형질(적응)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 자연계에 얼마나 많은 적응들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어떤 부분들이 적응인지에 대한 토론이었습니다. 특히 적응의 문제는 생물학 내부의 논쟁을 넘어 우리의 일상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토론의 제목을 다소 선정적으로 정했습니다. 이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토론은 강간에서 시작해서 언어로 끝날 정도로 폭도 넓었으며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특히 자연선택의 힘을 강조하는 적응주의자들과 어떻게든 그 힘을 최소화하려는 반적응주의자들 사이의 대립이 여실히 드러난 자리였습니다. 강간과 언어가 적응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이제 여러분들이 직접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공식적 토론은 여기서 접기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석학들께서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앞으로 거의 불가능할 것 같으니 잠시 쉬었다가 와인 한잔씩 하시면서 비공식 토론을 조금 더 이어가겠습니다. 비공식 토론회를 저희들끼리만 즐기게 되어서 죄송스럽지만, 내일도 자연선택에 관한 토론이 이어지니 조금만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내일 다윈의 식탁에서는 주로 이타적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즉 자연선택이 과연 어떤 수준에서 작용하는지를 논의할 것입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후 칠레산 최고급 와인이 들어오고 다윈의 식탁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다. 서로를 찌르는 수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하버드대의 위·아래층에 연구실을 두고 있는 르원틴과 윌슨만이 서로를 향해 입을 다물었다. 아니 눈길도 주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혐오의 극치가 무관심이라고 했던가? 나는 말로만 듣던 그들 사이의 싸늘함을 그날 처음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