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경부선 기차를 타고 5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밀양역. 이곳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행선지 표지판에 ‘얼음골’이라고 쓰여진 산내면 남명리행 버스에 승차했다. 남명리행 버스는 밀양 시내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비닐하우스가 있는 농지를 지났다. 40분 쯤 지나자 어느새 평지는 사라지고 버스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계곡을 따라 점점 깊숙한 산중으로 들어가기를 30분 남짓, 버스는 종점에 다다랐다.
얼음골 관리사무소를 지나 시원한 바람이 부는 오른쪽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자 땀은 식고 어느새 가슴이 떨릴 정도로 추위가 느껴졌다. ‘이곳이 과연 얼음골이 맞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얼음골은 경남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해발 1천1백89m의 천황산 중턱에 위치한다. 이름이 말해주듯 이곳은 8월 한여름에도 가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춥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맘때까지도 자연적으로 생겨난 얼음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기이함 때문에 얼음골은 1970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얼음골에 대한 이같은 미스터리를 풀고자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변희룡 교수는 올 3월부터 거의 매주 이곳을 찾았다. 그는 얼음골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온도측정을 통해 지금까지 알려진 미스터리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 얼음골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여름에 얼음이 언다?
얼음골은 해발 4백여m에서 8백여m까지 좌우 30여m 약 3천평의 돌밭으로 돼 있다. 이 돌밭의 맨 아래쪽에는 한여름에도 얼음을 볼 수 있는 천연냉장고가 있다. 이곳은 가로 세로 7m 정도의 철책이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쉽게 눈에 들어온다.
한여름에 볼 수 있는 얼음은 언제 생겨난 것일까. 처음에는 이곳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빙고여서 겨울에 얼었던 얼음이 바깥날씨가 30℃를 넘어도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봤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까지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얼음은 6월 중순부터 얼기 시작해 7-8월에 절정에 이른다(하계결빙)고 한다. 과연 사실일까.
변 교수는 얼음골의 하계결빙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현장조사에 나섰다. 그는 3월 9일부터 6월 말까지 거의 매주 이곳을 찾았다. 이때마다 그는 철창으로 둘러싸인 얼음골의 중심지역과 그 주변을 자세히 조사하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겼다.
3월 9일 변 교수는 얼음골의 철책지역 안쪽에서 눈에 띄는 곳을 확인했다. 주변 지역은 이미 눈이 다 녹았는데 이곳만 유달리 눈이 남아 있었다. 이 장소가 바로 한여름까지 얼음이 언다는 곳이다. 이곳은 보존을 위해 그물이 덮여있었다. 여기를 중심으로 변 교수는 얼음이 오랫동안 남아있는 몇군데 지역(냉혈)에 대해 사진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냉혈은 모두 큰 바위 밑에 좁은 구멍이 나있다.
3월 초순 모든 지역의 냉혈 바깥에서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이때 변 교수는 바깥 얼음이 빨리 녹아 안쪽이 들여다보이는 한 냉혈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3월 초·중순 냉혈 안쪽에는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23일에 다시 가보니 흐르던 안쪽 돌 위로 단단하게 투명한 얼음이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일주일 후 그 얼음은 더욱 커졌고 그 주변으로 얼었다가 깨져 쌓여있는 얼음덩어리가 보였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 증거였다. 이 냉혈의 얼음은 4월에 접어들자 녹아 없어졌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남아있는 냉혈에서는 바깥 얼음 때문에 처음에는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3월이 지나면서 바깥 얼음이 녹아 냉혈 입구에 고드름이 즐비하게 생겨났다. 이 고드름은 4월에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 고드름은 봄철 데워지는 윗바위의 열기로 인해 위에서부터 녹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고드름을 한번 보면 마치 얼음이 거꾸로 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른바 ‘역고드름’이다.
실제로 2000년 일본인 다나카 박사는 얼음골을 방문해 조사를 벌였는데, 그때 역고드름이 생겨나는 특이한 곳이라고 보고했다. 변 교수는 “다나카 박사가 역고드름으로 오해한 것은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쨌건 4월에는 이곳 냉혈의 입구에 고드름이 녹으면서 그 안쪽이 보이게 됐다. 변 교수는 냉혈 안에서 녹았던 얼음이 물이 됐다가 다시 언 투명한 얼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5월에는 이 얼음도 녹기 시작했고 6월에는 깊숙한 안쪽에만 얼음이 남아있었다.
6월 29일 얼음골에서 마지막까지 얼음이 남아있는 이곳에서 더이상 얼음을 볼 수 없었다. 이때 냉혈의 온도는 0.5℃로 더이상 영하가 아니었다. 올 여름에는 얼음골에서 얼음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이같은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변 교수는 ‘하계결빙은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얼음골의 얼음은 한여름이 아니라 봄철인 3-4월에 언다”고 설명했다. 이 얼음이 차가운 얼음골 환경에 의해 여름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 다만 올해의 경우 얼음이 일찍 녹아버린 것은 비가 많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뜻한 비가 내려 냉혈 안 얼음을 녹여버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뭄일 때 얼음이 한여름까지 보인다고 얘기되고 있다.
변 교수는 내년에는 이곳에 한여름까지 얼음을 더 많이 오래 남아있도록 만드는 환경실험을 계획하고 있다.
겨울철에는 오히려 따뜻하다?
얼음골에 대한 두번째 미스터리는 겨울철에 부는 따듯한 바람(동계온풍)이다. 주민들은 한겨울 매섭게 추울 때 이곳에 오면 오히려 더운 바람이 분다고 말한다. 특히 여름철 찬바람을 내는 냉혈이 겨울에 추울수록 뜨거운 김을 내보낸다고 한다. 얼음골에서는 계절이 거꾸로 진행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동계온풍은 과연 사실일까. 지금까지 얼음골의 동계온풍은 조사된 바 없다. 대개 얼음골에 대한 현장조사는 여름철 한때 이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음골에 대한 가장 긴 현장조사는 1990년대 초 서울대 대기과학과 정창희 교수가 인근의 주민들을 동원해 6월 말에서 10월 초까지 얼음골 바깥온도를 측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개는 이같은 관측 없이 몇차례 방문을 통한 관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변 교수의 경우는 이제까지 조사되지 않았던 3월부터 6월까지 4개월 간 직접적인 방문과 관측을 벌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점에서 변 교수의 조사자료는 앞서 살펴본 하계결빙뿐 아니라 동계온풍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3월 초 변 교수는 해발 8백-9백m의 위쪽 얼음골 돌밭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고지대인 이 지역은 아직도 눈이 쌓여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밭의 일부 지역에서는 눈이 다 녹아버리고 없었다. 더군다나 그곳에서는 이끼까지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이 장소가 지하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온혈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온혈의 존재에 대해 얘기는 있었지만 실제로 확인한 것은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4월 5일 변 교수는 냉혈과 온혈을 포함한 얼음골 20군데에 3시간마다 자동으로 온도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온도계를 설치했다. 그리고 6월 6일 7개의 온도계를 회수했다. 나머지 온도계는 돌이 무너져 내려 땅 속에 깊이 파묻히거나 사람들이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다. 7개 지점에 대한 3개월 간 온도변화를 분석한 결과, 그는 얼음골에 대한 새로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7개 관측지점 중 4개, 즉 ‘냉혈’, ‘냉혈 밖’, ‘온혈’, ‘온혈 밖’의 온도변화 그래프에서 변 교수는 바깥이 추울 때 언제 어디서 온도가 올라가는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확인했다. 측정기간이 비록 겨울은 아니지만 이 방법을 통해 겨울철 따듯한 바람이 나올만한 곳이 어딘지를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프 확인 결과 4월 7-8일경 냉혈과 온혈의 바깥 온도가 0℃가까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이때 놀랍게도 온혈에서는 온도가 10℃ 이상으로 급상승했다. 이후 4월 18일, 5월 7-8일경에도 온혈의 기온상승현상이 나타났다. 외부 온도가 갑자기 크게 떨어질수록 온혈에서는 주변과의 온도차가 심하게 벌어졌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냉혈에서의 상승효과는 미미했다. 냉혈에서는 외부 온도가 하강하더라도 그 차이가 더운 김이 나올 정도로 오르지는 않는 것이다.
이같은 결과, 동계온풍은 냉혈이 아니라 온혈이 근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겨울에 대한 관측기록이 아직 없기 때문에 이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암석이 냉기를 보존한다?
하계결빙 현상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얼음골이 기이한 곳임은 분명하다. 한여름에 얼음을 볼 수도 있고 한기가 느껴지도록 찬바람이 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변 교수는 첫번째 이유로 주변 산세를 말한다. 밀양의 얼음골은 1천m가 넘는 고봉이 7개가 있는 영남알프스의 가운데쯤에 위치한다. 즉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다.
이런 지형적 특성은 냉기를 오랫동안 끌어안게 해준다. 상공을 지나는 한랭한 공기가 이곳으로 한번 들어오면 바깥으로 잘 빠져나가지 못한다. 차가운 공기는 따뜻한 공기보다 무겁다. 따라서 상공의 기류가 얼음골로 쉽게 들어올 수 있지만 따뜻한 공기는 그렇지 못하다. 때문에 상공에 온난한 공기가 지나가도 얼음골 안쪽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잘 들어올 수 없다. 오랫동안 얼음골에 냉기가 유지되는 것이다. 실제로 변 교수는 얼음골의 3개월 간 기온변화 그래프에서 연속적으로 저온이 유지되는 것을 6차례 확인됐다. 1차 연속저온현상의 경우 78시간 동안 낮은 기온이 유지됐다.
반대로 이곳 산세는 상공을 지나는 더운 대기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한 낮 동안 태양의 복사에너지로 데워진 공기가 얼음골에 머무르지 못하게 해준다. 따뜻한 공기가 가벼워 차가워진 얼음골로 들어오지 못할 뿐더러 이곳에서 생겨난 더운 공기도 금새 상승해버리기 때문이다.
주변 산세와 함께 변 교수는 돌밭의 경사가 얼음골의 냉기 흡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얼음골로 들어온 차가운 공기는 돌밭의 수많은 돌덩어리와 흙 사이로 스며들어간다. 차가운 공기가 무겁기 때문이다.
이때 돌밭 속에 있던 따뜻한 공기는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면서 위쪽으로 상승한다. 돌밭 속에서 차가운 공기는 아래쪽으로 뜨거운 공기는 위쪽으로 이동하는 대류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냉혈은 돌밭의 아래쪽에 온혈은 위쪽에 위치하는 것이다.
변 교수는 이같은 대류현상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돌밭의 적절한 경사라고 말한다. 경사가 완만하면 공기의 대류현상이 잘 일어나지 않고, 급경사이면 공기 대류가 너무 빨리 진행돼 얼음골의 냉기 보존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음골의 경사는 60도 정도라고 알려져 있는데, 변 교수는 실제로 이 정도는 40도 정도이며 이것이 적절한 경사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대류현상은 지금까지 발표된 얼음골 신비를 설명하는 이론들 중 하나다. 하지만 변 교수의 주장은 이전의 이론과 다른 점이 있다. 이전 이론에 따르면 대류현상에 의해 냉기가 겨울철 얼음골의 돌에 축적됐다가 여름에 방출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변 교수는 겨울철 암석에 보존된 냉기가 낮 최고기온이 25℃가 넘어서는 봄철을 이겨내지는 못한다고 반박한다. 겨울철 암석에 보존된 냉기는 바깥 온도가 30℃ 정도면 하루만에 모두 배출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여름까지 냉기가 지속되는 이유는 ‘땅이 숨을 쉬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땅이 숨쉰다는 말은 봄철 주기적으로 상공을 지나가는 한랭한 대기를 얼음골의 대지가 숨을 쉬듯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봄철 여러 차례 나타나는 연속적인 저온 현상이라고 한다.
아직까지 얼음골 미스터리는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변 교수는 앞으로도 얼음골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러 자연적 조건이 빚어낸 얼음골의 신비에 매료돼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 얼음골이 점점 훼손돼 가고 있음에 안타까워했다. 얼음골 아래로 큰 길이 뚫리는데 이것이 얼음골의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로선 얼음골 얼음의 운명은 날씨보다 사람에 더 달려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