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일본 최대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는 이 업계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우주왕복선에 장미를 탑승시켜 우주에서 피는 장미의 향기를 포착한다는 내용이다. 그해 우주로 출발한 디스커버리호에는 정말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 두개가 달린 장미 한그루가 동승했다.
우주의 장미 향기 담은 향수
꽃의 향기는 꽃이 어떤 휘발성 분자들을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 분자들의 조성은 같은 품종의 꽃이라도 자라는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환경 요인은 빛, 온도, 습도, 토질, 그리고 심지어 소리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공간이라는 전혀 낯선 환경에 놓이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우주비행사들이 꽃의 향기를 직접 맡아보는 것은 아니다. 설사 맡아보더라도 그 순간의 기억을 지구로 귀환해 재현할 도리가 없다. 우주비행사들의 임무는 우주공간에서 꽃이 피면서 나오는 향기 분자들을 조그만 막대기에 흡착시켜 모으는 일이다. 우주왕복선에서 회수한 향기 분자들은 곧바로 최첨단 분석기기를 써서 그 조성이 밝혀졌다. 이 데이터를 토대로 재구성된 우주 장미의 향기는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한 신비스런 우아함을 지녔다. 시세이도는 이 향기를 테마로 삼아 향수 ‘젠’을 창조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신비로운 향기를 만들어내는 우주공간의 특별한 환경은 과연 무엇일까.
지구에서와 다른 우주공간만의 특별한 환경 중 대표적인 것은 진공과 무중력 상태다. 1643년 토리첼리가 처음으로 진공을 발견한 이후 이제 진공은 쉽게 만들 수 있고,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됐다. 그러나 지상에서 인공적으로 무중력 상태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가 지상에서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경우는 바이킹이나 자이로드롭이 떨어질 때이다. 고층에서 엘리베이터 줄이 끊어져서 떨어질 때에도 경험할 수 있다(물론 이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겠지만). 무중력 상태란 정확하게 말하면 중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중력에 대해 떠받치는 힘이 없어 중력을 느낄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중력을 느끼는 이유는 지구가 우리의 몸을 잡아당길 뿐만 아니라 바닥이 우리를 받쳐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중력이 나와 내가 있는 공간을 함께 잡아당긴다면 중력을 느낄 수 없는 무중력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간과 내가 함께 중력을 받아서 떨어지는 자유낙하를 할 때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
우주만의 독특한 환경, 무중력
우주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공위성이나 우주정거장 역시 지구의 중력을 받아서 중력에 수직 방향으로 움직이는 운동과 중력에 의한 운동이 합쳐진다. 그래서 중력에 의해 지구로 떨어지는 대신 일정 궤도를 같은 속도로 원운동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주정거장 안에서 인간은 무중력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미항공우주국(NASA) 글렌 연구 센터에는 이런 무중력 상태의 연구를 위한 실험 장치가 있다. 이 장치의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캡슐처럼 생긴 큰 통을 높은 곳에서 자유낙하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속에 있는 물체들은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게 되고 그때 일어나는 현상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이다. 이 장치는 무중력 상태에서의 여러 현상들을 이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긴 했지만 한가지 커다란 단점이 있다. 바로 무중력 상태를 유지하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이 장치가 자유낙하하는 높이는 약 25m, 시간은 겨우 2.2초에 불과하다. 이 장치로는 장미꽃 개화와 같은 실험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무중력 상태에서 오랜 시간 동안 안정적인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우주왕복선을 타고 우주공간으로 나가는 방법뿐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왜 무중력 상태에서 실험을 하려는 것일까. 무중력 상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꽃향기 실험 역시 어떤 결과를 예상하고 한 실험이 아니었다. 단지 무중력 상태에서 핀 꽃의 향기가 과연 지구에서와 같을지 다를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무중력 상태는 지구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환경이기 때문에 여기서 일어나는 거의 대부분의 현상은 호기심의 대상이 충분히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이용될 수 있지만 우리 생활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중력 상태라는 조건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일반 유리보다 1백배 투명한 무중력 유리
우리는 보통 유리라고 하면 유리창이나 유리컵을 생각한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유리로, 규소와 산소가 주성분인 규산염유리다. 보통 액체를 냉각시키면 0℃에서 물이 어는 것처럼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고체가 된다. 고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자나 분자들이 일정한 구조로 쌓여있는 결정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종류는 온도가 낮아짐에 따라 서서히 점성이 증가하면서 결국 고체가 된다. 이런 고체는 원자나 분자가 불규칙하게 결합돼 있는 비결정 상태다. 이런 상태의 고체를 넓은 의미로 ‘유리’라고 부른다.
유리를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재료를 모래처럼 가루로 만든 다음 높은 온도로 가열해 녹인 후 결정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식히면 된다.
우주공간에서 유리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좀더 깨끗한 유리를 제조하기 위해서였다. 지상에서 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녹인 물질을 그릇에 담은 후에 식혀야 한다. 그런데 유리를 만들 정도의 고온에서는 그릇의 표면도 약간 녹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유리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성분이 섞이게 된다.
하지만 우주공간의 무중력 상태에서는 녹인 유리를 그릇에 담을 필요가 없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유리 액체가 그대로 허공에 떠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릇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훨씬 더 깨끗한 유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주공간에서 유리를 만들어본 결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질이 좋은 유리가 나왔다.
좋은 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액화된 물질이 식을 때 가급적 결정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무중력 상태에서 그렇게 하기가 훨씬 더 쉬었다. 그 이유 역시 중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액체상태의 물질은 대류가 발생하면서 서로 섞인다. 대류가 일어나는 이유는 액체 내에서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은 부분은 밀도가 커져 중력에 의해 아래로 내려가고 높은 부분은 밀도가 작아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이 생기면 서로 결정을 만들기 쉬운 원자나 분자들이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유리를 확대해보면 이렇게 생긴 작은 결정들이 파편처럼 박혀있는 게 보인다.
반면 무중력 상태에서는 대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액화된 물질은 결정을 만들지 않고 현재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리게 된다. 이런 사실은 실제 생활에 많은 이용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지상에서는 결정 때문에 유리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제한돼 있다. 그러나 무중력 상태에서는 다양한 재료를 써서 특수 목적용 유리를 쉽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몸에서 서서히 녹는 재료를 써서 유리를 만들 수 있다. 교통사고로 뼈가 부서졌을 때 철사나사를 박는 대신 이 유리를 쓰면 뼈가 굳은 뒤에는 녹아 없어진다. 이런 유리를 생체활성 유리(bioactive glasses)라고 하는데, 외과 수술이나 암 치료에도 적용될 수 있다. 금속으로 유리를 만들면 놀랍도록 단단하고 부식에도 강하면서 정교하고 복잡한 모양을 만들 수 있다. 온도를 조금 올리면 말랑말랑한 상태로 돼 떡주무르듯이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지르코늄 등 여러 원소를 혼합해 만든 불화 유리는 규산염 유리보다 1백배나 더 투명하기 때문에 광통신에 쓸 수 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불화 유리 섬유 한쪽 끝에 불을 비추면 미국 뉴욕에 있는 반대편 끝에서도 그 불빛이 보일 정도이다. 지상에서는 결정이 쉽게 생겨 불화 유리를 만들기 어렵다.
우주 불꽃은 연소과정 이해의 열쇠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밤이면 책상에 앉아 타오르는 촛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을 태우며 끊임 없이 상승을 꿈꾸는 촛불. 마침내 그는 ‘촛불의 미학’이라는 소책자를 내놓기에 이른다. 이랬던 바슐라르가 무중력 상태의 촛불을 보았으면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지상의 촛불은 세로로 길게 늘어진 ‘눈물방울’ 모양이다. 이런 모양 역시 중력 때문이다. 불꽃에 의해 가열돼 가벼워진 기체가 위로 올라가면서 촛불의 모양을 위로 길게 늘어뜨리는 것이다. 만일 중력이 없다면 기체가 가열된다고 해서 위로 올라갈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무중력 상태에서는 심지에서 휘발한 원료가 모든 방향으로 확산하면서 연소한다. 따라서 불꽃은 둥근 공 모양이다.
촛불이 발명된지는 수천년이 지났지만, 놀랍게도 과학자들은 아직까지 촛불이 타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바람을 살살 불어주면 불꽃이 강해지지만 훅 불면 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소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가장 단순한 조건에서 실험해야 한다. 즉 연료도 수소나 메탄 등 간단한 분자를 쓰고, 대류도 없애야 한다. 연소 실험에 무중력 상태가 필요한 이유다.
연구자들은 무중력 상태에서 수소와 산소가 옅은 농도로 담겨 있는 통에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러자 잠깐 불꽃이 일더니 바로 잠잠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 저기에서 팥알만한 작은 불꽃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이를 불꽃공(flame ball)이라고 이름지었다. 마치 UFO처럼 날아다니는 불꽃공은 미미한 빛을 내면서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됐다. 지금까지 기록은 81분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불꽃공이 적은 연료만으로 빛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불꽃공이 이처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꽃공은 수소와 산소 기체가 서로 반응해 타고 있는 상태다. 그 결과 불꽃공 내부의 수소와 산소 농도는 바깥보다 낮다. 이때 외부에서 수소와 산소가 조금씩 확산돼 들어오기 때문에 연소가 계속된다. 만일 지상이라면 뜨거운 불꽃공은 밀도가 낮아 가볍기 때문에 급격히 위로 이동하면서 공기의 흐름이 활발해질 것이다. 대류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더 많은 수소, 산소와 접촉해 불꽃이 커지면서 순식간에 연료를 다 써버리고 곧 꺼질 것이다. 반면 무중력에서는 대류보다 기체의 이동이 훨씬 늦은 확산만 일어나기 때문에 불꽃이 오래간다. 중력에서는 짧고 굵게 살고 무중력에서는 길고 얇게 사는 셈이다.
연소에 대한 이해가 더딘 이유는 너무나 순간적인 현상이고 시뮬레이션이 어렵기 때문이다. 무중력 상태의 불꽃공만 하더라도 관찰 결과가 과학자들이 예상한 시뮬레이션과 많이 달랐다. 그러나 불꽃공은 가장 단순한 연소 모형이기 때문에 개량된 시뮬레이션을 시험하는데 적합하다. 현재 연소과정에서 가장 큰 난제는 연료가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 불꽃이 꺼진다는 사실이다. 불꽃공 연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 연소 효율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불꽃공의 움직임 중에는 아직까지 예상하지 못한 형태가 많다. 공간에서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도는가 하면 벽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기도 한다. 몇몇 불꽃공은 거의 움직임 없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현상들을 이해하게 되면 연소의 원리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름 10cm의 물막도 쉽게 만들어져
이런 실험들은 우주왕복선에 탑승하는 우주비행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주비행사들은 한번 비행에 수십가지의 실험을 수행한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바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주정거장에 수개월 동안 머물러 있는 우주비행사들은 가끔씩 휴식의 시간을 갖곤 한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 6번째 체류하는 팀의 일원인 돈 쁘띠는 토요일마다 자신만의 우주실험을 해오고 있다.
어느날 그는 어릴 때 자주 했던 비누거품 놀이를 생각하며 얇은 비누막을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비누를 녹인 물과 철사로 둥글게 만든 고리를 준비했다. 그는 비누막을 만들기 전에 먼저 물로 실험해보기로 했다. 철사 고리를 물에 담갔다가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름 약 4cm의 고리에 얇은 물의 막이 붙어서 나오는 것이었다.
물로 된 막을 만드는 실험은 집에서도 쉽게 해볼 수 있다. 철사 고리를 만들어서 물에 담갔다가 꺼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지름 1cm정도 크기의 막을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만들어진다 해도 너무나 약해서 조금만 흔들어도 금방 부서져버릴 것이다. 그런데 우주공간에서 물의 막은 거의 지름 10cm 정도 크기까지 만들어지는데다 놀랄 만큼 튼튼해서 웬만큼 흔들어서는 부서지지 않았다.
물의 막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표면장력 때문이다. H2O라는 분자식에서 알 수 있듯이, 물분자는 산소 원자 하나에 수소 원자 두개가 결합돼 있는 구조다. 산소 원자핵은 수소 원자핵에 비해 주위의 전자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는 중성인 물분자를 들여다보면 산소 원자는 약간의 (-) 전하를 띠고 수소 원자는 그만큼 (+) 전하를 띤다. 그 결과 물분자 속의 산소 원자는 주위 물분자의 수소 원자와 서로 끌어당긴다. 물분자 간의 이런 작용을 ‘수소결합’이라고 부른다.
표면의 물분자들은 반쪽만이 수소결합을 하고 있으므로 속의 물분자들보다 불안정하다. 따라서 같은 부피라면 표면을 최소화하려는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데, 이 힘이 표면장력이다. 철사고리에 물막이 생기는 것도 이런 형태가 표면적이 가장 작기 때문이다.
반면 지상에서는 물의 막을 만드는 표면장력이 중력을 이기지 못해서 막을 쉽게 만들 수도 없고 금방 부서져버린다. 결국 무중력 상태에서는 표면장력만이 작용하기 때문에 막을 쉽게 만들 수 있고 잘 부서지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우연한 발견은 유체역학을 연구하는데 무중력 실험이 아주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지상에서의 유체는 중력의 영향 때문에 매우 이해하기 어렵지만 무중력 상태에서는 유체 자체의 움직임만을 볼 수 있어 그만큼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불행히도 앞으로 당분간은 우주공간에서의 실험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할 전망이다. 지난 2월 1일 발생한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 참사 때문이다. 컬럼비아호의 이번 비행에는 약 80여가지의 실험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물론 화면이나 자료의 형태로 많은 결과가 전송됐지만 직접 가지고 돌아왔어야 하는 많은 결과물과 자료가 함께 분실되고 말았다. 당분간 우주왕복선 계획은 중단되겠지만 무중력 상태에서의 실험은 예측되는 많은 유용한 결과 때문이라도 계속될 것이다.
무중력 상태라는 환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에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특수한 환경이다. 그러므로 이 곳에서는 직접 실험을 해보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는 매력이 있다. 물론 무중력 상태라는 조건을 가정하고 많은 실험을 해볼 수는 있겠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앞으로 또 어떤 실험들이 진행돼 새로운 발견이 나올지 관심을 가져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