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들어와 세계적으로 진공기술은 여러 산업 분야에서 핵심기술로 인식되고 있다. 진공기술의 응용분야도 다양화, 다변화되고 있으며 그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아직도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이 진공기술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의 기술을 단순히 수용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반도체 생산량이 세계 1위임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생산 공정에 필요한 대부분의 진공장비나 부품을 선진국으로부터 수입해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진공펌프를 비롯한 각종 장비와 부품의 국산화율은 현저히 떨어진다. 물론 국내에서도 일부 제작되고 있지만 반도체 공정에서 많이 사용되는 고진공장비와 같은 핵심부품은 아직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때문에 진공기술 관련 분야에서는 매년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수출입 불균형이 일어나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가 반도체를 생산하면 할수록 진공장비를 제작하는 나라는 앉아서 돈을 버는 셈이다. 첨단산업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장비와 관련된 기술을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다.
진공장비 신뢰성 뒷받침할 사업
그렇다면 우리의 기술 수준이 외국보다 많이 뒤떨어져 있는가? 그렇지 않다. 국내 진공기술도 외국과 우위를 겨루고 있는 분야가 많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진공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는 국내산 진공기술 관련 제품의 신뢰성이 부족하다는데 있다. 과학자들조차 외국제품은 믿어도 국산제품은 못미더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산제품의 정확한 사양이나 성능이 데이터로 보증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 진공산업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즉 진공장비에 대한 기술 교육을 실시하고 진공장비를 국산화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함은 물론, 제작된 진공장비의 품질을 보증하기 위한 과학적인 데이터를 확보해야 한다. 이와 같은 진공기반기술의 확충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에 의해 유지돼야 한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과학기술부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4년 간 총 1백억원의 예산을 지원해 한국표준과학연구원으로 하여금 ‘진공기술기반구축사업’을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 진공산업의 미래를 바라볼 때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판단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사업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진공기술기반사업단(단장 정광화 박사)을 구성했다.
15개 부문 ISO 9001 국제인증 획득
사업단은 연구원 내에 약 5백60m2의 실험실 공간을 확보하고 진공도 10-9Pa 정도까지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각종 진공장비에 대한 평가장치를 구축하고 있다. 여기서는 진공펌프의 성능을 평가하고 진공 상태가 얼마나 정확하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총 72개 항목으로 나눠 측정할 수 있다. 그 중 현재까지 50여 항목이 완료돼 실제 평가에 활용되고 있다. 이를 이용하면 진공장비에 대해 국제적으로 신뢰성 있는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구축된 장치들은 기술이전이나 기술자문, 산학연 콘소시엄에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진공도가 10-11Pa인 용기를 제작하는 기술과 함께 이를 측정한 데이터를 제공함으로써 막혔던 수출의 길이 열린 경우도 있었다. 의료용 고급 램프나 인공위성에 사용되는 부품을 제작하기 위한 진공장비를 평가하는 기술도 개발됐다. 또 사업단은 세계 최초로 진공 공정에서 나노 크기 입자를 실시간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바 있다. 이런 성적을 기반으로 진공기술 관련 15개 부문에서 2002년 ISO 9001 국제인증을 획득했다.
이 외에도 진공 관련 각종 규격과 기술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도 사업단의 중요한 목표다. 더 나아가 국제규격이 미비한 분야에서도 사업단이 먼저 선도해 규격을 제정하고자 한다. 또한 진공기술에 대한 정보를 확산시키기 위해 연 12회에 걸쳐 연구성과 발표회와 산학연교류회를 개최하고, 연 2회 진공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외국의 전문가를 연 2명 초청해 기술력 향상도 꾀하고 있다. 사업기간 중에 일군 이같은 성과들은 현재까지 국내외 전문학회지에 7편, 학술회의에 36편 발표됐다. 한편 홈페이지(vacuum.kriss.re.kr)를 구축해 진공기술에 관련된 정보도 자료실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양보다 질, 극청정 진공 환경
사업단은 과기부 지원에 힘입어 제2단계로 극청정 진공기술기반구축사업을 2004년부터 수행할 예정이다. 지금까지의 진공기술은 단순히 공간 안에 있는 기체 분자의 수를 줄이는 데만 치중했다. 그러나 좀더 나은 진공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진공장비 자체 또는 재료의 표면에 붙어 있는 기체 분자 하나하나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최근 NT(나노기술), ST(우주항공기술), IT(정보기술) 분야의 신기술 개발을 위해서는 분자나 원자 각각을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 진공도의 좋고 나쁨도 중요하지만 진공 환경의 청정도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기술은 불순물이 없는 극청정 환경에서라야 실현이 가능하다. 따라서 극청정 진공환경을 만들어내야 함은 물론, 진공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범위를 확대하거나 새로운 측정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와 같은 극청정 진공측정기술은 신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매우 중요한 인프라임과 동시에 새로운 산업의 창출을 선도하는 돌파구가 된다.
일찌감치 이런 상황을 예측한 일부 선진국에서는 치열한 경쟁과 막대한 연구비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진공 관련 부품, 장비, 재료를 제작하는 업체 간에 공동연구가 활성화되고 있다. 일본의 유수한 업체 간 연구 콘소시엄의 탄생이나 미국 업체 간 포괄적 협력선언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극청정 진공기술기반구축사업을 통해 진공기술 인프라를 확고히 해야 한다. 사업단은 원자나 분자 단위까지 제어가 가능한, 불순물이 극도로 제거된 극청정 환경을 제공해 미래산업의 신기술이 이 환경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야심에 찬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면 우리나라도 차세대 진공기술 수출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
머지않아 실현될 극청정 진공기술이 다른 분야와 어울렸을 때 일상생활의 모습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상상해보자.
두루마리 화면과 극소형 로봇내시경 실현
무겁고 투박한 모양이었던 과거의 휴대폰과는 달리 현재의 휴대폰은 손바닥보다 작고 수첩보다 얇다. 게다가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다운받으며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도 갖춰 시판되고 있다. 그러면 미래의 휴대폰은 어떤 형태가 될까. 휴대폰 하나에 웬만한 PC의 기능이 모두 들어있게 될 것이다. 주머니에서 보통 펜보다 조금 길어보이는 펜을 꺼내 한쪽을 살짝 누른다. 그러면 펜이 두루마리처럼 활짝 펴져 노트만한 크기의 화면이 된다. 현재 휴대폰의 부피가 7-8년 전보다 꽤 많이 줄어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상황은 단순한 상상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의료 분야에서는 초기 형태이기는 하지만 알약 크기의 소형 로봇내시경이 인체 안을 돌아다니면서 무선으로 영상을 보내는 기술이 개발돼 있다. 미래에는 이 로봇내시경이 영상뿐만 아니라 진단 결과까지 인체 밖으로 보내게 될 것이다. 또 인체 안에 머물면서 각 조직이나 기관의 상태를 모니터한다. 질병이 생긴 조직을 발견하면 이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약물의 양도 조절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미래 기술은 휴대폰이나 로봇내시경을 만들 때 사용되는 소자나 센서의 극소형화가 이뤄져야 가능하다. 매우 작은 소자나 센서는 미세한 오염 입자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다. 즉 원자나 분자 단위까지 제어할 수 있는 극청정 진공 환경이 마련되지 않고서는 극소형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첨단 신기술을 연극배우에 비유한다면 극청정 진공기술은 무대장치기술과 같다. 극청정 진공기술이 우선 확립돼야 그 기반 위에서 다른 신기술이 마음껏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소자나 센서를 제작해내기 어렵다.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첨단 신기술을 연극 배우에 비유한다면 극청정 진공기술은 무대 장치기술과 같다. 극청정 진공기술은 무대 장치기술과 같다. 극청정 진공기술이 우선 확립돼야 그 기반 위에서 다른 신기술이 마음껏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