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에서 깨어 눈을 뜨자마자 텔레비전부터 켠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라면을 끓여먹고 나서 진공청소기로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한다.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컴퓨터를 켜고 e메일을 확인한다. 한가로운 휴일 풍경에 등장하는 텔레비전, 라면, 진공청소기, 커피, 컴퓨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진공기술이 없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진공(眞空)이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다. 진공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vacuum’은 비어있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vacua’로부터 유래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입자가 전혀 없는 절대진공을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실제로 진공은 주위 대기보다 압력이 낮은 공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숨쉬는 대기에는 질소, 산소, 수증기, 탄산가스, 헬륨, 아르곤과 같은 여러 기체가 섞여 있다. 이들 기체 분자의 수는 1㎤당 ${2.5×10}^{19}$개나 된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부피 안에 세계 인구 수의 40억배에 달하는 기체 분자가 있다는 말이다. 진공기술에 관련된 국제적 규격을 제공하고 있는 국제표준기구(ISO)와 미진공협회(AVS)에 따르면 진공은 ‘대기압보다 압력이 낮은 상태 또는 1㎤ 당 분자 수가 ${2.5×10}^{19}$개보다 적은 경우’로 정의된다.
젖먹는 갓난아이 입안은 진공 상태
진공의 정도는 공간에 들어있는 기체 분자의 밀도에 따라 달라진다. 진공도가 높아짐에 따라 기체 분자의 수가 적어지므로 압력이 낮아진다. 압력의 단위는 torr(토르) 또는 mbar(밀리바), Pa(파스칼)을 사용한다(1torr=1백33Pa=1.33mbar).
대기의 압력인 1기압은 1.013×${10}^{5}$Pa 또는 7백60torr로, 1㎠당 1kg의 무게 정도다. 손바닥에 성인 두명이 올라가 있는 것과 같은 정도의 큰 압력이다. 대기가 걷혀 이 압력이 제거된다면 어떻게 될까. 액체의 끓는점이 낮아지기 때문에 상온에서도 피가 끓어 순환기능이 마비돼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자연에서도 이런 대기압 환경보다 기체 분자 수가 적은 상태, 즉 진공 상태를 찾아볼 수 있다. 문어의 빨판 내부는 1백torr 정도의 진공 상태다. 갓난아이들은 입안을 7백40torr 정도의 진공 상태로 만들어 엄마 젖을 빨아먹는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숨을 들이쉴 때는 허파가 부풀어 젖을 먹고 있는 아이의 입안보다 약간 더 높은 진공 상태가 된다. 기압차 때문에 발생하는 기체의 흐름인 태풍이나 허리케인의 내부는 7백torr 정도 압력을 갖는 진공 상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대기압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저진공 상태다.
지상으로부터 8천8백48m 높이인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는 압력이 대기압의 40%로 낮아진 저진공 상태다. 이에 비해 우리별 1호가 있는 1천3백km 상공은 압력이 ${10}^{-8}$Pa인 초고진공상태다. 정지위성 궤도인 3만6천km 상공에서는 압력 ${10}^{-11}$Pa인 극고진공에 도달한다. 여기에는 1㎤ 안에 기체 분자가 3천5백개 정도만 존재한다. 이때 기체 분자는 다른 분자와 충돌하지 않고 50만km를 이동할 수 있고, 이 기체 분자들이 1㎠ 표면을 다 덮는데 걸리는 시간은 10개월이나 된다.
지구 반지름이 6천3백70km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지구 주위의 대기는 종잇장처럼 덮여 있을 뿐이고 지구 밖은 광막한 진공이다. 우주는 진공의 바다에 별들이 점점이 움직이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한편 별과 별 사이, 그리고 은하와 은하 사이는 거의 절대진공에 가깝다.
커피에서 반도체까지 다양한 응용
언뜻 생각하면 일상생활과 진공은 전혀 무관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컴퓨터, 텔레비전, 휴대폰, 카메라와 같은 대부분의 전기제품은 진공기술이 없다면 존재하기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식품이나 의약품을 제조할 때도 진공기술이 필요하다. 진공 상태에서는 어떤 현상이 생기길래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응용될 수 있을까.
진공도가 높아지면, 즉 분자 밀도가 줄어들면 분자 밀도가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압력 차이에 의한 힘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힘을 이용한 간단한 사례가 진공청소기다. 진공청소기 내부의 압력이 외부의 압력보다 낮기 때문에 먼지가 내부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주사기로 약물을 빨아올리는 것도 같은 원리다.
또한 압력이 낮은 공간에서는 기체 분자를 매질로 해 전달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다. 같은 원리로 열이 전도되는 정도도 작아진다. 보온병은 이중용기 사이를 진공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단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대기압의 40분의 1 정도 압력에서는 물이 실온에서도 끓는다. 이런 성질을 이용해 커피, 라면스프와 같은 식품이나 페니실린과 같은 의약품을 냉동시킨 후 압력을 낮추면 쉽게 수분이 건조된다. 그러면 열에 의해 성분이 변하지 않고 맛과 향기, 효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진공 상태에서는 공기의 주요 성분인 질소, 화학반응이 활발한 산소나 수증기와 같은 기체 분자 밀도가 낮기 때문에 금속이 산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한 것이 백열전구의 필라멘트다. 전구 안의 공기를 뽑아내지 않으면 필라멘트가 산화돼 금방 끊어진다.
진공 상태에서는 재료에 금속막을 깨끗하게 입힐 수 있다. 오염 입자가 적어 표면이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공 상태에서 알루미늄을 유리면에 입히면 거울이나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반사경이 된다. 또 티타늄과 질소를 적당히 조절해 입히면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운 금빛을 띤다. 시계나 안경테와 같은 장식품을 만드는데도 역시 진공기술은 필수다.
고진공과 초고진공 상태에서는 기체 분자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수십cm-수천km까지 크게 늘어난다. 이 현상은 디스플레이 장치를 제작하는데 응용된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브라운관 안에서 움직이는 전자는 다른 기체 분자와 충돌해 없어지거나 휘어지지 않고 스크린에 제대로 도달해야 한다. 그래야 정확하고 선명한 화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0}^{-5}$Pa 정도의 초고진공 상태가 유지돼야 한다. 텔레비전이 오래되면 브라운관 내부의 진공도가 낮아지기 때문에 화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특히 반도체 관련 산업에서 진공기술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반도체 기판에 원하는 물질을 입히고 회로를 새기는 공정은 오염 입자가 없는 진공 상태에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칩 크기가 점점 작아질수록 칩 위에 새겨야 하는 모양도 더 조밀해진다. 따라서 매우 작은 입자도 칩의 동작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공정에 사용되는 장비 안의 오염 입자가 많이 제거될수록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펌프로 뽑아내고 끈끈이로 붙인다
진공기술이 응용되는 범위는 이처럼 점점 넓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공 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기체 분자들은 소리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서로 또는 다른 입자를 만나 충돌한다. 한 기체 분자가 충돌 직후 또다른 기체 분자와 충돌하기 전까지 이동할 수 있는 평균비행거리는 약 60nm(나노미터, 1nm=${10}^{-9m}$)에 불과하다.
이렇게 좌충우돌 움직이는 기체 분자들을 진공펌프를 사용해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진공펌프는 대기압부터 10-1Pa 정도의 저진공이나 중진공 환경까지 만들어내는 저진공 펌프류, 초고진공이나 극고진공 환경까지 만들어내는 고진공 펌프류로 크게 구분된다.
저진공 펌프는 용기 안의 기체를 대기압 이상으로 압축시킨 후 밖으로 배출한다. 그러나 좀더 높은 진공도를 원한다면 이 방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각각의 기체 분자들을 아주 빨리 회전하는 터보로 쳐서 용기 밖으로 내보내는 터보분자펌프를 사용해야 한다.
고진공이나 초고진공 이상의 진공 상태를 만들 때는 공기를 붙잡아두는 흡착펌프를 사용하기도 한다. 기체 분자들을 펌프 내의 특정 공간이나 물질에 화학적으로 결합시켜 붙잡아둠으로써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파리를 잡는 끈끈이와 같은 원리다.
기체 분자 하나씩을 쳐서 내보내거나 달라붙게 하는 고진공 펌프가 작동할 때는 반드시 저진공 펌프가 뒷받침돼 있어야 한다. 고진공 펌프는 용기 안이 최소한 중진공 정도의 상태가 됐을 때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작동중에도 펌프 배기구의 진공도가 중진공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고진공 펌프는 저진공 펌프로 먼저 초벌 배기한 후 작동을 시작해야 하고, 작동중에도 저진공 펌프로 배기구를 중진공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한편 대기와 접한 모든 재료의 표면은 질소나 산소와 같은 기체 분자들로 덮여 있다. 높은 진공 상태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용기 벽이나 재료의 표면에 붙어 있던 기체 분자들이 떨어져 나오면 진공도는 떨어진다. 따라서 펌프로 기체를 밖으로 배출시키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진공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공장비 자체나 그 안에 넣은 재료에서 발생하는 기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표면처리 기술이 중요하다.
또한 진공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용기 내부의 기체 분자를 밖으로 배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기체가 스며들어가지 않도록 용기 자체를 밀폐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거의 모든 진공 용기는 밀폐하기가 비교적 쉬운 스테인리스강 또는 알루미늄을 사용해 만든다. 기체가 스며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특수용접 방법들도 개발됐다.
현재 첨단 기술을 사용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 진공 상태는 1cm³당 단지 몇개의 입자를 포함하는 ${10}^{-16}$torr 정도라고 한다. 최근에는 진공기술이 단순히 용기 안의 기체 밀도를 줄이는데 그치지 않고 용기 안에 들어가는 기체 성분을 조절하고 제어하는 차원으로 발전했다. 또한 기체가 없는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진공 중에서 다양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어떤 분야에 적용되는가에 따라 필요한 진공도가 다르기 때문에 진공펌프가 갖춰야 할 조건도 훨씬 다양해졌다. 새로운 진공장비가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