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극에는 문학적 지식인이 그리고 다른 한쪽 극에는 과학자, 특히 그 대표로 물리학자가 있다. 이 둘 사이는 몰이해, 때로는 적의와 혐오로 틈이 크게 갈라지고 있다. 더욱이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1959년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인 스노우는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의사소통 단절을 두고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주제로 이와 같은 강연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과학자의 길을 접고 두 문화의 중간영역을 고심하는 한 대학생이 있었다.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과학사·과학철학 분야.
과학사·과학철학은 오늘날 더욱 심하게 분열된 과학과 인문학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때문에 그 학생은 이후 상이한 두 문화를 맛보는 재미를 느꼈지만 동시에 언제나 둘 사이를 오가며 어디를 가도 비주류여야 했다. 그는 학문의 세분화가 점점 심화되던 20세기 중·후반의 거센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학생이 올 2월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바로 한양대 철학과 송상용(66) 석좌교수다. 송 교수는 한림대 사학과를 떠나 3월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해 12월호 한국과학사학회지는 정년퇴직을 앞둔 송 교수에 대해 ‘한국의 조지 사튼(미국에서 과학사를 학문 분야로 정착시키는데 지대한 역할 한 인물로, 유명한 과학사 저널 아이시스(Isis)와 오사이리스(Osiris)의 창시자), 한국 과학사학계의 대부, 한국 과학사학계의 산 증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국내 과학사·과학철학 분야의 초창기 멤버로 이 분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또한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데 앞장서 왔다. 과학과 인문학의 두 문화 속에서 송 교수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들어보자.
“교수님은 화학과를 졸업하시고 철학과로 편입하셨는데요. 이유가 무척 궁금합니다. 그 전부터 철학에 관심이 있으셨던 건가요?”
“나는 어릴 적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과학자가 되겠다고 꽤나 설쳤어요. 과학보다는 발명에 가까웠지만 집에서 실험을 하고, 중학교 교과서도 사보고 했어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모두들 종합적인 사고를 잘 한다며 내가 사회과학쪽으로 갈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나는 대학에 들어갈 때 전혀 고민하지 않고 화학과로 갔습니다.”
송 교수가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도 화학을 선택한 까닭은 중·고교 생활과 관련된다. 중학교 때 과외활동으로 과학부에 들어갔는데, 그때 화학반에 배정됐다. 또 고등학교 2학년 때 화학반장을 하기도 했다.
1955년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한 송 교수는 호된 교육을 받았다. 당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가끔 가서 낭만을 즐기던 다방에 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공부하고 밤새며 실험했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외국어 공부를 겸해 어학강의를 많이 수강했다. 독문과 8강좌, 영문과 5강좌, 불문과 1강좌를 들었다. 그러다 보니 과학에만 집중됐던 그의 관심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송 교수는 3학년 때 유기화학을 수강하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결정적인 회의가 들었다. 유기화학에서 잡다한 것을 외우는데 질려버렸고, 그 결과 D학점을 받았다. 그는 전형적인 과학자로서 일생동안 실험실에만 박혀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3학년을 마치고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평생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 그는 화학과 졸업 후 철학과로 편입했다.
“그런데 왜 하필 철학을 선택하셨나요?”
“방향을 바꾸기로 했지만 과학이 싫었던 건 아니에요. 단지 적성에 맞지 않았을 뿐이죠. 그래서 과학을 쓸 수 있는 분야를 찾게 됐죠. 과학과 인문학의 중간영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철학을 택한 이유는 인문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학문이기 때문이었어요.”
송 교수는 철학과에 편입할 때 3가지 가능성을 얘기했다.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저널리즘이 바로 그것. 그에게 철학은 바로 이 가능성에 가장 기초적이고 쓸모있는 분야였던 것이다. 그는 철학과의 일반적인 학생과 달랐다.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고민이 없었다. 그는 전쟁 때(중3) 양친을 잃고 세대주가 됐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만 했다고 한다.
당시 과학사, 과학철학 등의 중간영역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송 교수는 교양서적을 많이 읽었는데, 사튼의 책 같은데서 이 분야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철학과에서의 공부는 어땠습니까? 과학사, 과학철학을 하는데 큰 도움을 얻으셨나요?”
“철학과에 편입한 때가 1960년 4.19가 일어난 해였죠. 사회는 어수선했습니다. 화학과와 달리 철학과의 분위기는 매우 자유분방했어요. 매일 술 마시며 나라 걱정 하느라 공부도 많이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철학과에서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당시 철학과 경향은 너무 관념적이라 내겐 실망이었죠.”
국내의 여건이 마땅치 않아 1967년 송 교수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인디애너대 과학사·과학철학과에서 2년간 공부를 했다. 거기서는 과학사를 주로 전공했다.
송 교수는 미국에서의 생활이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전기가 됐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과학을 보는 눈이었다.
그는 미국에 가기 전까지 과학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과학은 가장 믿을만하며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과학만능주의자와 같은 천진난만한 생각을 갖고 있던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과학을 모르는 사람들, 과학을 우습게 아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과학사를 공부하면서 생각했던 것만큼 과학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대 과학만이 유일하지 않으며 중세과학,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처럼 여러 과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송 교수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사회에 눈을 뜨면서 과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고 강조한다.
“교수님이 과학을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과학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과 교수님의 생각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나는 미국에 있는 동안 흑백분규, 베트남전, 대학투쟁, 로버트 케네디 암살, 아폴로 11호 달 착륙을 목격했어요. 그러면서 과학의 폐해를 봤습니다. 베트남전에 쓰인 고엽제와 네이팜탄은 과학이 반인간적인 연구를 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순박한 과학주의자에서 과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하지만 송 교수가 과학을 비판한다 해도 극단적인 입장은 아니다. 과학을 안한 사람이 비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과학에 대한 애정이 깊고, 과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미국 유학 시절 송 교수는 고전적인 과학철학에서 과학의 역사와 사회로 눈을 돌린다. 과학이 순수한 지적 호기심의 추구이므로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설사 잘못 이용되더라도 과학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은 틀렸다고 보기 시작했다. 그는 “과학이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 응용될 수 있는데, 이것을 만든 과학자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은 무책임한 말”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과학자가 잠재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때 형성된 생각은 이후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95년부터 생명윤리를 확립하기 위한 그의 행적이 바로 그 증거다. 그동안 그는 생명윤리 관련 국제학회만도 20여개를 쫓아다녔다. 지난해에는 우리나라에서 열린 아시아 생명윤리 회의의 조직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과학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갖고 국내로 돌아와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1969년에 돌아와 교수직을 얻는데 무척 힘들었습니다. 10년 동안 강사로 사대, 공대, 자연대, 인문대 등 여러 단과대학들을 전전했습니다. 40살에 교수직을 얻은 성균관대에서는 처음 소속이 낙농학과였어요. 내 전공인 과학사가 소속이 어디냐를 두고 자연과학에서는 인문학이다, 인문학에서는 자연과학이다 해서 서로 제기를 차듯 미뤄버려서 공중에 붕 뜬 겁니다.”
송 교수가 20년 가까이 몸담은 한림대에서는 사학과 소속이었다. 그는 사학과 출신이 아니어서 인정을 받지 못해 역사 강의는 하지 않고 손님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가 주로 강의해온 과목은 자연과학개론이다.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자연과학개론은 교양과목 중 인기가 가장 낮은 강좌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간 과학을 배울 만큼 배웠는데 대학에서도 똑같이 하는 것이 그 이유라고 본다. 이제는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에 대해, 즉 과학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자연과학개론을 과학사, 과학과 사회, 과학철학 등으로 다양하게 가르쳤다. 이 중 학생들에게 가장 잘 먹힌 것이 과학사였다.
이와 함께 그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과학대중화 운동이다. 1970년대 전파과학사 손영수 사장과 함께 과학에 관심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두권쯤 읽어봤을 현대과학신서 1백50권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70여권은 그의 손을 거쳤다. 직접 기획하고 교정보고 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과학의 인간적, 사회적인 면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각종 대중매체에 과학의 인간적인 면, 과학의 사회적인 영향, 과학자의 책임 등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이런 공로로 1997년 대한민국과학기술상(진흥상)을 수상했다.
“교수님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을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요.”
“과학과 인문학은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거죠. 이런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서로 대립하고 멸시하며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서로를 알아야 합니다. 과학사와 같은 중간영역을 공부하면 과학과 인문학이 전혀 다른 게 아니며, 과학에도 인문학적 요소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케플러나 뉴턴 때만 해도 과학은 철학, 신학, 점성술, 연금술과 섞여 있었죠.”
송 교수는 과학과 인문학의 중간영역을 키움으로써 두 분야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데 노력해왔다. 그는 과학사학회의 창립회원으로, 20년 간 간사로 일하며 두 문화 사이에서 학회가 자리잡도록 노력했다. 과학사학회의 경우 과학계에서 인정받게 하려고 1980년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 인문학계에도 한다리 끼게 하려고 1977년 전국역사학대회에 가입시켰다. 같은 취지에서 1995년 과학철학회도 만들었다.
한편 송 교수는 아직까지 과학사학자·과학철학자들 다수가 외면하는 과학의 사회적 측면을 개척하고자 젊은이들을 독려해왔다. 3년 전 그는 한국 대표로 일본, 중국의 학자와 함께 베이징에 모여 ‘동아시아 STS(과학기술과 사회)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재작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이 모임이 열렸고, 오는 8월에는 대만에서 모인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볼 때 교수님은 자신의 성향이 과학과 인문학 중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나의 기질은 과학에 가깝습니다. 문과 사람들은 상당히 헐렁해요. 하지만 난 정확한 걸 좋아하고 따지는 편입니다. 중요한 형성기에 과학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계시종교와 전체주의를 거부하고 과학적 휴머니즘을 표방하는 운동을 한 영향도 크다고 봅니다. 하지만 생활은 좀 달라요.”
송 교수는 1993년부터 환경운동연합의 초빙을 받아 환경운동을 벌이고 있다. 환경운동에는 2가지 극단적인 입장이 있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환경을 개선하자는 것과 과학기술을 완전히 거부하고 원시로 돌아가자는 극단적인 심층생태주의가 그것이다.
송 교수는 심층생태주의까지는 아니지만 과학기술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보는 ‘중도좌파’다. 에너지 문제에 대해 그는 대체에너지가 시원치 않으니까 원자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오히려 대체에너지 개발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생활은 어떨까. 송 교수는 과학기술과 거리가 먼 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과학자로 오해하거나 과학적인 사람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자동차 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흔한 운전 면허증도 없다. 심지어 아버지가 전기기술자 출신이지만 정전이 되면 꼼짝도 못한다. 자연적인 것을 좋아해 기계문명의 이익을 잘 챙기지 못한다. 그래서 과학을 못하고 방향을 돌린게 아니냐고 말한다.
송 교수는 앞으로 과학혁명의 역사서술에 관한 연구를 정리해 책으로 묶으려 한다. 강의와 학회활동에 얽매여 매듭짓지 못한 논문이 많다. 쿤의 패러다임의 기원, 니덤의 초기사상 등이 그가 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한다. 그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계획을 잘 세워야겠다”고 말한다.
★ 송 교수는 다음번 주인공으로 서울대 수학과 박세희 명예교수를 추천했다. 박세희 교수는 위상수학과 비선형 해석학을 연구해왔고 수학의 철학적, 역사적 의미를 찾는데도 관심을 가져왔다.